-파란 돌
[먹빛 하늘이 서서히 밝아집니다.
이렇게 푸른빛이 실핏줄처럼 어둠의 틈으로 스며들 때면,
내 몸속의 피도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의지,
내 기억, 아니, 나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워집니다.] p153
-왼손
내안에 두 인격이 버젓이 산다.
의식과 무의식 교집합 안의 내 기억, 내 의지, 내 본능을 달래고 가두려는 오른 손과 풀어 놓아주려는 왼 손.
결국은 더 짐승(¿)에 가까운 것이 세다.
사월 중순의 밤바람은 소슬했다. 그가 기댄 나무둥치는 차가웠고, 그의 마음은 무겁고 산란했다. 그는 이날 오후 수차례 몰래 들여다보았던 왼손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와 같은 손이었다. 잔주름이 많은 손금, 남자치고 가늘고 긴 손가락들, 바싹 깎인 손톱들. 기다리던 버스가 다가올 때까지 그는 왼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P166
그의 왼손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막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ㆍ ㆍ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커다랗게 치켜뜬 눈에 밤 불빛들이 술렁였다. 그의 왼손은 번지듯 뺨에서 미끄러져 그녀의 섬세한 콧날을, 이마를, 눈두덩을 어루만졌다.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닿았을 때에야 그의 왼손은 짧게 떨며 멈췄다. - P170
알고 있었어. .....뭘? 네가 날 좋아하는 거. 그런데 왜..... 왜 줄곧 모르는 척했냐구? 그녀는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고백하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만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으니까. - P174
가장 나쁜 것은, 왼손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것이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그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ㆍ ㆍ 빠져나오려는 왼손 때문에 쩔쩔매는 사이 전화벨이 울리고, 고객이 찾아왔다. 왼손을 책상 아래로 숨기기 위해 그는 안간힘을 다했다. 단단한 끈으로라도 왼손을 묶고 싶었다. ㆍ ㆍ 햇빛이 불투명하게 투과되는 유리를 더듬더듬 어루만지던 그의 왼손이 마치 틈을 찾는 듯 창과 창의 이음새를 따라 간절히 뻗어 갔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그것의 움직임이 격해지려 하는 순간,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자리로 되돌아왔다. ㆍ ㆍ 꿈틀거리는 왼손과 그것을 거세게 붙든 오른손. - P181
이젠 그만. 더 움직이지 마. 파랗게 솟아오른 왼손의 정맥들을 오른손으로 쓸어내리며, 그는 마치 잘 아는 사람에게 말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 P184
그의 왼손이 햇빛 속으로 뻗어 올라갔다. 갓 돋아난 연둣빛 갈참나무 잎사귀들이 그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잎사귀들 중 하나에 왼손이 닿았다. 무엇인가 왼손 속으로 스며든 것 같은 감각에 그는 손을 끌어내려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바람이었나. 당겼던 고무줄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듯 왼손이 잎사귀들 속으로 떠올랐다. 잎사귀와 가지 들 틈으로 조용히 흔들리는 왼손은 마치 연푸른 물속을 유영하는 것 같았다. - P185
당신과 함께 사는 거 불행했어. 당신은 아이도 사랑하지 않고, ㆍ ㆍ ㆍ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만 보잖아. 지난 몇 년간 나한테 당신은 현금 지급기 같은 거였고, 난 당신한테 아이 키우고 살림하는 기계 같은 거였지. ㆍ ㆍ 죽은 듯이..... 내 감정 따윈 없는 셈 치고,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 상태를 유지하려고도 했어. 하지만 오늘 아침 깨달았어. ㆍ ㆍ 더 이상은 버티고 싶지 않다고.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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