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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날 ㅣ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4
카롤린 라마르슈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림원 / 2022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림원 출판사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네 번째 책인 '카롤린 라마르슈의 데뷔작' <개의 날>은 출간된 1996년 벨기에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빅토르로셀상을 수상하며 문단과 평단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지어낸 가족 이야기로 신문 잡지에 사연을 보내는 트럭 운전사, 더는 교회에 오지 않는 여성 신도를 찾아 헤매는 노신부, 상처받기 전에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지려는 미녀, 집에서 쫓겨나 직장과 친구도 잃고 매일 밤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동성애자 남성,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스스로 버려졌다고 여기는 과부와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준 아버지를 잃고 폭실증에 걸린 딸. "누군가 나를 버렸다"는 가깝고도 아득한 고통의 기억 속에서 도로 위, 질주하는 익명의 개를 목격한 목격한 여섯 인물은 '미친 개, 길 잃은 개, 질주하는 개'에게서 죽음의 기회를 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독백은 오로지 삶만을 되뇌고 있다. 극에 달한 고통을 기점으로 뒤집히는 삶과 죽음, 어쩌면 인생은 그런 부활의 연속 뿐일지도 모른다.

'트럭 운전사 이야기'는 지어낸 가족 이야기로 신문 잡지에 사연을 보내는 트럭 운전사의 이야기를 담았다. "저번 날, 고속도로에서, 버려진 개가 중앙분리대를 달려가고 있었다."로 시작하는 편지를 '가족신문'에 보내려고 글을 쓴다. 그의 직업은 트럭 운전사이지만 그는 허구의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아내와 아이들이 떠난 트럭 운전사가 고속도로에서 질주하는 개를 보며 자신과 동일시하여 바라보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트럭운전사가 '가족신문'에 편지를 쓴 이유는 사람들 앞에서 울고 싶었던 심정 때문이다. 그는 개 이야기를 들은 그들이 얼마나 슬퍼할지에 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다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있지 않고 아내는 떠났기 때문에, 나에게는 창조하는 것조차도 일이다. 어쩌면 그 개도 내가 창조해낸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트럭을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려서 사람들에게 큰 몸짓으로 속도를 늦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시속 백이십 내지 백사십 킬로미터로 달려오다가 순순히 속도를 줄였다. 그들은 무슨 사고라고 났는 줄 알았나보다. 더구나 그들은 트럭 운전사들이 트럭에 타고 있거나 트럭 옆에 있을 때 트럭 운전사들을 존중한다. 따라서 그들은 개라고 상상하든, 아니면 사고라고 생각하든 간에 속도를 늦췄다. 그러나 나는 중앙분리지대를 따라 미친 듯이 달려가는 개를 분명히 보았다. 그것은 지붕 위에서 본 베갯잇처럼 하나의 관찰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트럭을 세웠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뒤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 죽으러 가는 짐승의 눈을 더 이상 보지 않는 것, 책임을 회피하는 것, 정직하고 가벼워지는 것은 쉽다. 그리고 신문들은 그런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가볍고 정직한 채식주의자이며, 버려진 동물들에 관해서, 그리고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을 시켜야 하는 아이들에 관해서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트럭 운전사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나는 이 개가 고속도로에 버려지기 전에 어떤 개였을지를 상상해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것은 한 인생을 꾸며내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 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이며, 상상 속의 삶이 아닌 실제의 어떤 삶을 살아왔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그 녀석이 버려지기 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꾸며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아코디언 연주를 배웠다면, 또는 단지, 내 노래가 아버지에게 손님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아버지 곁에서 노래를 부를 수만 있었어도, 어떤 가족 이야기를 꾸며내서 신문사에 투고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 나는 트럭을 몰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그라스마이스 씨와 그의 아들을 종종 생각한다. 나는 결코 내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절대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봤자 아무 소용 없을 테니까."
'천사와의 싸움'은 더 이상 교회에 오지 않는 여신도를 찾아 헤매는 노신부의 이야기를 담았다. 노신부는 고속도로에서 버려진 개와 그 개의 미친 듯한 질주를 보며 "그들 사이에 하느님의 얼굴이 있다. 한 마리의 늙고 미친 짐승, 그에게 광명을 주던 시력을 잃은 한 마리 개, 천사에게 버림받아 물도 빵도 먹지 못하는 성 로쉬가 바로 그 얼굴이다."라고 독백한다.
"내 정신과 육신은 인간으로서의 여러 가지 유혹과 싸웠다. 한편 내 마음은 빛을 잃고, 나무들이 자신의 차가운 수액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주여, 내 이름은 무엇입일까?"라는 기도를 간직하고 있다.
나는 이제 그것을 깨달았다. 지난 월요일에 고속도로에서 개를 본 순간, 나를 기다리는 이름이 섬광처럼 내 머리에 떠올랐다. 미친 개, 길 잃은 개, 질주하는 개, 뒤쫓고 있는 죽음, 그것이 바로 나다."
"오늘날, 미온적인 사람들은 외로워지고, 정열적인 사람들의 열정은 히스테리와 유사하다. 거세된 인간성. 아무튼 내게는 교구의 신도들이 있고, 그들은 어쩌면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인지도 모른다."
"그 개는 죽어서 분해되었을 것이고, 지금은 도로변에 일부가 남아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고독과 엄청난 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는 죽음인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 중 누구도 그것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마리의 개. 버려진 한 마리의 개. 버린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쫓아버리고 싶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필요없게 느껴지고 지나치게 부담스럽고, 신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니, 차라리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실은 전부가 아니지만, '전부'는 존재하며, 그것을 증명해주는 구체적인 얼굴, 즉 여자의 얼굴, 금지된 얼굴이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우리는 그를 다시 소유하고자 하며 시선으로 그를 삼켜버리려 하고, 성체의 빵처럼 구체화하려 하고, 성사의 샘물을 다시 마시고자 할 것이다."
"죽은 뒤 영혼이 다른 육체에 깃드는 것은 사실이다. 영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그런 부활의 연속일 뿐이다. 지난 월요일 고속도로에서 그 개가 내 시야에 불쑥 나타남으로써 드러난 부활은 어쩌면 그에 앞서 나타났던 부활들처럼 내 몫의 고통과 경이인지도 모른다. 나도 그 개처럼 죽음에 맞서서 혼자 가리라. 죽음을 침착하게 수용하는 이미지보다 훨씬 더 잘 늙음을 정의해준 미친 질주. 그것이 내포한 눈먼 폭력과 더불어 죽음이 언젠가 내게 다가오리라. 왜냐하면 내 나이에는 '엘리 엘이 라마 사박다니'를 충분히 심사숙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스승도 신도 심지어는 인생의 초기에서처럼 천사의 그림자조차도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된다. 우리가 이스라엘이 되려는 순간에 야곱일 때, 거기에는 아무런 구원도 없다. 하찮은 호소를 뭉개버리기 위해 도로변에 모인 몇몇 사람 외에는."
'생크림 속에 꽂혀 있는 작은 파라솔'은 상처받기 전에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지려는 미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주인공 여성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개를 보았을 때 사랑하는 남자를 생각했다. 여성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너는 달리기 시작했겠지. 눈멀고 귀먹어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겠지. 고통의 망치가 관자놀이를 두르리고, 눈멀게 하겠지."라고 독백한다. 자신이 태어난 후 우울증으로 고통받던 어머니가 리에브라는 이름의 네덜란드인 유모를 두었고, 헌신적으로 자신을 돌보던 유모는 교통사고를 당한 오빠를 돌보기 위해서 자신의 곁을 떠났고,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또다시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별하려는 여성은 개가 자신의 내부에서 일깨워놓은 것은 "사랑이 끝나는 것은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장면에서 여성은 사랑을 우정으로 대체하는 말은 이상한 접목이며, 그것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바람이 잔잔해지면, 나는 파도 속으로 뛰어든다. 태풍이 부는 날은 차라리 쉽다. 쉽다기보다는 덜 어렵다고 해야겠다. 무한한 사랑이란 것도 그런 식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야만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따면 우리가 거기에 몸을 맡길 것인가? 바람 부는 날, 나는 대체로 물에 쉽게 들어간다. 즉시 추위가 나를 휩싸고 호흡이 멎는 한편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비명을 지르고 팔다리를 마구 휘젓는다. 고통스러운 나머지 물 밖으로 나가고픈 유혹과 다시 한번 그 과정을 알기 위해 전보다 더 헤엄을 치려는 욕망 사이에서 싸운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취기가 오르는 짧은 순간이다. 그 순간에는 혈액순환이 활발해져서 우리를 흥분상태로 몰고 간다. 그러나 곧 추위라는 환각제가 약효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행복감이 밀려오고, 그것은 너무 강렬한 것이라서 거기에 끝없이 몸을 맡기고 싶어진다. 탈진할 때까지 그 행복에 빠져들다가 죽을 수도 있다. 요점은 적당한 순간에 거기서 빠져 나오는 것이다."
"한 가지 오해가 있었다. 너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왔다. 나는 사랑을 받고, 강렬한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데, 너는...... 사냥중이고, 최면상태이고, 희망과 절망으로 경직되어 있고......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고속도로에서 그 개를 본 이후 그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 개이며, 너는 그 개의 주인이다. 나는 그 개를 위해 울었다. 얼마나 어리석을 짓인가! 동점심일까 아니면 절망의 이면일까. 학살을 은폐하기 위한 교훈적 감정이다. 언젠가 누군가 나를 버렸다. 사랑. 사랑은 항상 당신들을 버린다. 아무리 짧은 순간의 사랑이라 하더라도. 아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환희의 순간에도 당신들을 버린다. 그때 이미, 태양은 우물 속에 가라앉고, 검은물 아래 버려진 개가 있는 것이다."
""오, 무한한 사랑이여! 나의 이성과 유머와 생명조차도 파괴하는 자, 연가의 쓰레기처리장, 숭고하면서도 텅 빈 쓰레기통...... 나는 영원히 너를 혐오한다!" 난 갑자기 담뱃불을 짓이겨 끄고, 너에게 미소를 보내면서 생크림 속에 작은 파라솔이 꽂히고 초코시럽이 흘러넘치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주문하고 싶어졌다."
'자전거를 타고'는 집에서 쫓겨나 직장과 친구도 잃고 매일 밤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동성애자 남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남성은 파티에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실직 사실을 알리고,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것까지 고백했지만, 남성의 절망과 고뇌의 비명은 그들에게 침묵으로 발현된다. 남성은 고속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질주하는 개로 인해서 자전거에서 넘어져 부상을 당하고, 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짐승처럼 호흡하는 상처 하나를 얻고 아주 오랜만에 처음으로 생각을 정리한다. 남성은 자전거를 타고 고속도로로 나옴으로써 "나 자신을 희생시키면서 즐기는 것도, 세상에 정면으로 승리감에 도취된 경멸을 보내는 것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 "이제부터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는 친구들의 무능함에 자신도 무능함으로 답하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성은 나약함으로 인해 자살을 하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고속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아주 오랫동안 참을성 있게 달렸다. 하지만 남성은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 개가 마치 자신의 눈앞에서 자발적인 죽음으로의 질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나타났고, 그래서 자신은 넘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천장의 거미 한 마리'가 가장 내면적이고, 가장 확실한 나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의 화신 같은, 물기과 기름기가 없는 이 벌레와의 대면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울증은 아직 광기의 형태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지만 곧 정말로 미쳐버릴 것이다. 아무튼 광기는 그 표현방식에 있어 집을 짓는 거미와 비유할 수 있다. 그것은 천천히, 실을 분비하기 위한 휴지기를 가지며 집을 짓는다. 광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실이 아니라 흔적의 거대한 혼선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둘은 같다. 그 혼선은 일시적 소강상태를 거치지만 폭풍우를 피할 수 없다."
""한번 궤도를 벗어나면 영원히 그 모양이라고요. 누군가 당신을 다시 궤도 위에 올려놓을 거라고 믿어봤자 소용없어요. 얼마 안 가서 우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될 사람들, 즉 루프 부인 같은 사람에게 걸려들고 말아요. 그리고 당신들도, 당신들도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요. 그리고 나 역시 아무도 필요없어요. 아무도!""
"달리는 것은 하나의 일이며, 나의 내면에 무언가를 철저하게 건설하는 행위다. 나는 아직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앞에 서 있는 방파제의 도도함과 부서지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도 아니고, 즉각적인 위험도 없이 습관처럼 단조롭게, 고속도로의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이 모든 차량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달리고 있는가?"
"그 후 나는 더 이상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 상처는 아물었다. 어제 상처의 딱지가 떨어졌고, 상처 가장자리 피부에는 주름이 잡혔다. 마치 매끄러운 한 가닥의 실이, 지갑의 아가리를 연상시키는 자줏빛 새살 주변으로, 피부를 모아놓은 것 같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이 상처를 간직하게 될 것 같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모두들 그렇듯이, 나도 팔십쯤까지 살지 않을까. 다들 그렇듯이, 나도 매일매일 죽음의 개념에 저항할 것이다. 내가 받는 고통이 이 시대의 실업자들이 참아내는 고통 이상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 이상은 아니다. 사냥개 떼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미친 듯이 달려가는 개. 다만 사냥개가 없고, 아무도 추적하지 않고, 당사자만 있다. 우리고 꼭 그런 식이다. 완벽한 건강을 갖고 아주 편리한 일상적인 지식을 갖춘 젊은이인 우리들은 숨이 차도록 달린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를 추적하지 않으며 가장 친구들조차도 우리를 찾지 않는다. 직업상의 이동의 필요가 냉혹한 힘으로 이동시키는 자동차들 안에 우리를 위한 자리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무엇을 쫓고 있는 것인가?"
'별 수 없음'은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스스로 버려졌다고 여기는 과부의 이야기를 담았다. 여성은 본 적이 없는 개 한 마리가 고속도로에서 앞을 가로질러 갔고, 이후 마침내 어머니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여성은 개에게 시선을 주기를 피함으로써, 딸인 안이 힘을 되찾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버려진 여자. 지불해야 할 계산서, 갈아야 할 퓨즈, 교육해야 할 아이, 결단을 내려야 할 중대사항 따위와 함께 나를 혼자 남겨두고 간 그에게 분노를 느낀다.니코의 시선이 내게 머물지 않았던 이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의 추억에 특히 화가 난다. 나는 우리의 신념이 사라져버렸던, 우리에게 힘이 부족했던 이 기간을, 사후에라도 결정적으로 메워넣을 힘을 어디선가 찾아야 했다."
"내가 집에서 갑자기 니코의 죽음이라는 대지진을 만났을 때, 대지진은 갑자기 니코의 생명을 앗아갈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 누가 나를 웃길 것인가? 안은 분명 아니야. 나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애는 가장 없는 가장의 힘없는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해. 나는 곧이어 이런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그런 생각은 아마 그 애가 지금 먹는 것들 때문인 것 같다. 그 애는 옛날에 니코와 함께 웃던 자리, 그들이 함께 만들어낸 이상한 노래들 중 하나를 불어대며, 그와 함께 그것을 부르던 추억을 잊기 위한 것처럼 마구 먹어댔다. 안은 항상 이상했다. 나는 차라리 그 애가 빨리 결혼하기를 바랐다. 누군가가 안이 지나치게 먹는 것을 금해주고 그 애의 은밀한 생각을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그렇다, 나를 사랑했던 니코처럼 그 애를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그 애로부터 나를 해방해줘야 할 것이다."
"어쩌면 고속도로에서 개를 본 날, "별수 없잖아"라고 말했을 때, 방법을 찾아냈는지 모른다. 좀 더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진정한 본질에 눈뜨게 하지 위해 내가 꼭 해야 할 말이고 그녀가 꼭 들어야 할 말이었다. 그녀는 버려진 짐승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어머니를 거부하는 열렬한 처녀였다. 그녀가 내게 던지던 그 시선이란! 내가 접근할 수 없는 하늘, 저 높은 곳에, 그 애의 아빠가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나에게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상복 입은 여자들로 이루어진 울타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나는 변했다. 내가 본 적이 없는 어떤 개 한 마리가 내 앞을 가로질러 갔고, 이후 나는 마침내 어머니가 되었다. 나에게 시선을 주기를 피함으로써, 안이 힘을 되찾게 해주었다. 이후, 그녀는 혼자다. 왜냐하면 내 내부의 모든 것이 평정을 되찾고 '별 수 없잖아'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휴식'은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준 아버지를 잃고 폭식증에 걸린 딸의 이야기를 담았다. '별 수 없음'이 어머니의 시선에서 바라본 독백이라면, '영원한 휴식'은 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독백으로 흥미롭다.
"이따금, 나는 엄마와 함께 있을 때 나의 죽음을 상상한다. 그녀 앞에서 식사를 하거나 그녀와 함께 아우디를 타고 있을 때, 나는 아빠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것처럼 나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나의 장례식에서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아무도 나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엄마조차도. 어쩌면 그녀는 만족할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는 나의 죽음이 사소한 문제일 테니까."
"엄마는 왜 개 주인이 개가 없어졌는데도 그녀는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 말은 내가 죽더라도 그녀는 슬퍼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겠지. 그녀는 피 같은 것은 질색이기 때문에 냉정해지고 싶은 거야. 그녀는 아빠 때문에 피를 충분히 보았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피를 볼 생각은 없을 거야. 내 생각으로는, 개 주인이 개를 찾아 나설 것이고, 그 동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모르고 있는 한 마음이 편치 못할 것 같았다.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 속에서, 나는 죽은 개를 향해 걸어가서, 개를 뒤집고 그 이름을 확인할 것이다. 이름은 안. 그 개는 암컷이며 이름은 나와 같다. 다시 시작하자. 안이 죽었다는 말이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 개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개, 영리하고 세련된 짐승이라고 내게 알려줄 것이다. 그는 울 것이고, 현실을 믿지 않으려 할 것이고, 안의 죽음에 관해 책을 쓸 것이다."
"이제 나는 녀석과 마찬가지로 힘센 근육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본능이 나를 안내하고, 나는 그 개가 무사히 살아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울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약하지도 않고 벙어리도 아니다. 나는 강철 같은 근육을 가지고 있으며, 아무리 달려도 숨이 차지 않는 폐활량을 가지고 있고, 나를 지옥으로부터 구해낼 의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인내심이 강해서 어떤 출구가 보일 때까지 달릴 수 있다. 나는 확고한 본능의 명령에 따라서 달리기 때문에 놀라움과 감탄을 불러일으키면서 고속도로를 벗어날 것이고 사람들은 소리를 지를 것이다. 나의 달리는 동작은 아름다울 것이다. 긴 근육, 늘씬하고 긴 다리 근육, 영리하고 침착한 얼굴, 내재해 있는 조용한 힘.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나는 죽든 살든 변함없는 결심으로 달린다. 나는 내 주인, 내 생의 반려자를 찾아 달린다. 그는 나를 영원히 사랑하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찾아다니고, 아빠가 스핑크스의 자세로 앞으로 뻗은 길고 가느다란 두 팔로 만들어놓은 터널 속으로,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디에서건, 곧 들어올 것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