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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시선 -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
이윤희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2년 7월
평점 :

<불편한 시선>은 여성의 시선에서 미술의 역사와 고전으로 내려오는 그림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오거나 이미 익숙해져 간과해왔던 의문을 다시 끄집어낸다. 이 책은 역사적으로 미술 작품 속에서 여성이 표현되는 방식을 지적하면서, 여성 미술가가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인 한계와 더불어 이를 넘어서고자 노력했던 여성 미술가의 작품을 살펴본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부터 중세의 교회 건축 조각,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 뿐만 아니라 근현대 작가들의 회화, 퍼포먼스 작품까지 고루 담아내, 미술 영역에서 여성이 어떻게 표현되어 왔는지 그리고 여성 미술가들은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역전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이 책은 '1장 의문: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존재하지 않았는가, 2장 시선: 왜 여성은 언제나 구경거리가 되는가, 3장 누드: 미술 작품에는 왜 벗은 여자들이 많을까, 4장 악녀: 여성은 남성을 괴롭히는 악한 존재인가, 5장 혐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영웅적 행위가 될 수 있는가, 6장 허영: 거울 앞의 여성은 아름다움에 눈먼 존재인가, 7장 모성: 현실의 어머니가 언제나 고요하며 아름다울 수 있는가, 8장 소녀: 소아성애는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9장 노화: 노년의 이미지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공평한가, 10장 위반: 현실의 여성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10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에밀리 메리 오즈번의 작품 <이름도 없고 친구도 없는>에서는 공공장소에 나와 일하는 19세기 여성이 감당해야 했던 '시선'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고 말한다. 그림 속의 여성이 처한 어려움은 그림을 팔아 살아가는 가난한 화가로서의 고충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사회에 나온 여성들이 불필요하게 감내해야 하는 음험한 시선에서 오는 고통 역시도 무시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사실상 화가는 '보는' 직업이다. 특히 추상미술이 출현하기 이전인 19세기까지 화가의 일이란 대상을 '응시'하여 자신의 세계관과 감성으로 재현하는 작업이었다. 에밀리 메리 오즈번의 그림 속 주인공인 여성 화가 역시 정물이건 풍경이건 대상을 관찰하고 이를 화폭에 옮기는, 다시 말해 '바라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공공장소로 나서는 순간 그는 '바라봄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저자는 미술사 대부분의 시기 동안 그림을 주도적으로 관람하고 비평적 언사를 표현해온 관객은 남성이었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화가들은 남성 관객의 입맛에 맞는 주제와 소재를 선택해왔다. 심지어 화가에게 적극적으로 그림을 주문하는 이들 역시 권력층 남성이 압도적이었다. 저자는 이를 보면 그동안 여성 누드화가 그렇게나 많이 제작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고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화가가 남성이기도 했지만, 시장이 남성 관객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누드'라는 서양미술 속의 개념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보편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미술 작품속에서도 남성 누드는 행동하는 주체이지만, 여성 누드는 시선의 대상이 된다. 주체와 대상의 불평등한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저자는 천사처럼 선한 여자와 천하의 몹쓸 악자라는,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 구도는 유래가 깊다고 말한다. 미술의 역사 속에서도 숭배해야 할 여인과 경계해야 할 여인은 구분되어 있었다. 저자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실제의 여성은 선하거나 악하다는 단순한 카테고리로는 이분화되지 않지만, 유달리 악한 여자들의 이야기와 이미지가 예술에 많이 등장하는 시기가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팜프파탈이라 불렀던 치명적인 여인들은 아름답고도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나타나 남성을 유혹하여 곤경에 빠뜨리고 살해했다. 구약성경이나 신화 속에서 선한 역할을 담당했거나 그다지 비중이 크지 않았던 인물까지도 모두 악녀로 변신하여 남성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저자는 달리 보자면 이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상황을 자기중심적으로 이끌어가는 인물들이었고, 갑자기 이들이 미술의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것은 당시의 시대적 변화의 양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19세기는 가정에 속박되어 있던 여성들이 집 밖으로 나와 배움에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학교를 다니고 학위를 따기 시작하는 시대였다. 의사 면허를 받거나 물리학자가 되기 시작했으며, 남편에게 먼저 이혼을 요구하고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지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사회적 책무에 눈을 떠 참정권을 요구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19세기에 등장한 이러한 신여성은 남성에게 대단히 골칫거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의 권리를 말하는 여성들을 보며 남성들은, 기존에 보아 왔던 여성들과는 다른 종류의 생경하고 생생한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여성들에게 한번 걸리면 패가망신의 지금길이라는 위험 또한 감지했을 것이다. 남성 예술가들은 그러한 두려움을 온갖 유형의 팜므파탈 이야기에 실어 날랐다."
저자는 모성은 잉태의 순산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모성이 넘치는 행복한 어머지'라는 이념은 계몽주의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여성이 어머니가 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통념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저자는 추상적으로 그려지던 모성의 실체는 실제적인 출산과 육아의 경험을 말하는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살과 피를 얻는다고 이야기한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출산과 양육은 신체가 뒤흔들리는 경험이고, 그럼에도 기쁨을 동반하며, 아이들을 위해 세상에 맞서는 것이라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특히 이 책에서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직시하는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의 작품 <헨리 포드 병원>과 <나의 탄생>에 관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출산이 여성에게도 남성에게도 중요한 인생의 변곡점이고 나아가 그것이 사회적인 의미이기도 하다면 왜 화가들은 이 사건을 다루지 않았을까. 그 이유가 미술 작품이 지켜야 할 사회적, 종교적 지점 때문이라면, 그 한계를 교모히 넘나들며 포르노에 가까운 에로티시즘을 구현한 작품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화가들이 출산이라는 사건을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의 화가가 남성이었으며, 출산은 그들이 직접 겪는 사건이 아니었다. 또한 출산은 비명과 유혈이 난무하는 고통의 현장이었으므로 그 사건을 굳이 그림으로까지 그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 화가들은 출산을 자신의 일생 가운데 중요한 사건으로 경험하거나 다른 여성의 경험을 나누며, 출산의 신체적, 심리적 고통의 장면들을 미술 작품 안으로 불러왔다."
"벌거벗은 채 공장 대지에 홀로 누어 있는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아기의 죽음을 애도하고, 피를 흘리며 자신의 신체가 겪은 일을 여러 사물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칼로는 간절하게 생명을 탄생시키고자 했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이 죽을 뻔했고 아기를 살리지 못했다. 많은 여성이 경험했을 법한 이러한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미술 작품 속에 표현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 장면을 해석하기 위한 또 하나의 단서로 침대 머리에 걸린 그림을 보자. 그림 속에는 성모 마리아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마리아는 입을 벌리고 고통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으며 목에는 두 개의 단검이 들이밀어져 있다. 프리다 칼로는 <나의 탄생>에서 출산이 죽음을 무릎쓰는 경험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성모 마리아라는 신적 존재를 출산하는 어머니와 함께 고통받는 여성으로 그리고 어머니를 자신을 낳고자 죽음에 가까이 갔던 여성으로 그려냈다.
이 작품은 출산이란 이렇게 고통스러운 경험이니 아이를 낳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의 이 그림들은 실제 출산의 경험을 여성의 시각으로 매우 직설적으로 표현했다는 의미가 있다. 임신과 출산은 인간이 가진 본능이겠으나, 이를 단순하게 행복이라는 이념으로 포장하지 않고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 바라보고자 한 것이다. '출산의 신비'가 아니라 생과 사를 넘나드는 여성의 실존적 경험인 출산을 그림으로써 말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