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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3년 12월
평점 :
3년 전 서울을 떠나 하동군 평사리에 정착한 소서가 공지영. 그 무렵 작가로서의 번아웃에 시달리며 더 이상 글을 쓸 수 있을까, 심각한 회의에 빠진다. 고독 속에 스스로를 유폐하고, 그것에서 평화와 행복을 되찾아가던 어느 날, 작가는 문득 순례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목적지는 예루살렘, 예수의 탄생과 성장,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진 곳, 평온한 일상을 살면서 잊고 있던 그곳으로.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는 2022년 가을에 떠난 순례의 여정 속에서 만난 깨달음의 기록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3년 만에 발표하는 공지영 작가의 신작 산문이다. 그의 대표 에세이 중 하나인 <수도원 기행 1,2>를 잇는 영성 고백과 삶에 대한 절절한 통찰이 담겨 있다. 각 순례지가 작가에게 던져준 삶의 메시지를 묵상하고, 치열하게 현재와 과거, 하동과 예루살렘을 교차하며 진한 감동을 전한다.
"사랑하는 나의 벗들, 그분께서는 나를 산과 바다로 인도하시고 고통의 낚싯바늘에 걸리게도 하셨다. 나는 배고픈 물고기처럼 미끼들을 물고 아슬아슬 죽음을 비켜 여기까지 왔다. 우울하고 눈물 흐르던 시간도 있었고 불면으로 쭉 이어진 새벽도 있었다. 가장 큰 후회는 더 사랑하지 못했던 것, 사랑함을 소유로 굳혀버리려던 것. 이제 나는 마지막으로 찬란한 가을볕 아래 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받았고 사랑했던 시간이 더 많았음을 깨닫는 것은 가을이기 때문이리라. 여름을 떨구는 리넨 이불처럼 나는 지난날의 나를 조용히 떨구며 생각한다. 삶을 지중해풍 샐러드 같다.
죽음을 거쳐온 사람들, 사랑에 상처 입은 사람들, 주린 이들과 배고픈 이들, 그리고 샘물을 갈망하는 사람들, 밤새 광야를 헤맨 사람들에게 내 책을 전하고 싶다. 그들은, 아니 어쩌면 그들만이 이 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나의 벗이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섬진강가에 정착했던 공지영 작가는 3년 넘게 남들에게 글을 내비치지 않고 살았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공지영 작가는 다시 글을 쓴다면 정말 쓰고 싶어서, 생계가 아니라 정말 그러고 싶어서 쓰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공지영 작가는 "나는 좀 고요하고 싶어"라는 질문과 대답은 화두처럼 자신에게 남았고, 고통과 외로움 결핍 대신 혼자란 것이 자유라고 서서히 각인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생각을 끝까지, 아주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론은 늘 단순하다. 이것은 신비롭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질문의 끝이 삶의 암반에 도달하고 나면 기초를 쌓아 올리는 일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서울 집을 처분하고 완전히 이곳으로 이주했다. 섬진강가 열다섯평짜리 농가를 떠나 악양 벌이 내려다보이는 옆 동네에 터를 봐두고 집을 짓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때 또 몇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는데, 하나는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를 그만두게 된 것이고, 또하나는 글쓰기를 완전히 그만둘까 하는 고민을 시작한 것이다. 평생 처음 있는 격변이었다."
공지영 작가는 주인에게 학대받던 강아지 동백이를 위하여 자신의 잠과 안락을 내어주고 뒤척임으로써 아주 잠시이지만 이 세상의 이기심을 떠나 우주의 커다란 법칙 속으로 들어갔고, 어쩌면 잠시 우주와 한 맥박으로 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공지영 작가는 지난날 자신이 남에게 해를 끼치고 자신의 이익을 고집하면서 살았을 때, 어쩌면 작은 이익 같은 것을 분명 얻고는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홀로 있는 순간 한없이 외로웠고 초라하며 무력해졌다는 것도 기억났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남에게 나 자신을 내어주는 일은 결코 약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거대하고 힘이 센 우주 혹은 신과 하나가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자 프란치스코는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습니다"라고 했던 거였다. 그래서 우리가 조건 없이 무엇을 남에게 주기로 하는 순간 우리는 마치 거센 대양의 조유를 올라타는 조각배처럼 우주의 힘을 얻게 되는 것이리라."
공지영 작가는 지구상의 많은 곳을 구경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정작 성경의 중심지이며 그리스도교 공인 성지인 예루살렘에 갈 기회는 없었다고 말한다. 공지영 작가는 오래전부터 신께서 자신을 예루살렘에 불러주시기를 기다렸고, 가장 큰 원칙이 떠남이라고 정해졌으면 나머지 것들은 포기하거나 저절로 큰 원칙에 맞춰지기를 기다려야 했다고 이야기한다.
"왜 예루살렘이야?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도 정확히 스스로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천천히 깨닫게 되겠지. 이건 나이가 나에게 준 선물이었다. 서두르지 않는 것. 답이 언제나 그 순간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답은 없어도 좋을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떠나는 것을 선택해야 했으므로, 버릴 것들이 많았다. 금목서, 은목서 핀 정원의 화사함, 늦가을 하동 하늘의 맑음, 운전을 하고 가다 멈추게 만드는 서러운 황금빛 들녘, 그리고 동백이와의 다정함 같은 것들. 어쩌면 나는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고 스스로를 느낀 타향의 나그네 같았는지도 모른다. 떠나야 했고 나는 떠났다. 그저 떠나보았던 것이다."
공지영 작가는 혼자인 것은 싫다고, 광야에 홀로 서 있는 일 같은 것은 자신에게 왜 시키는 거냐고 세 번이나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이 멀고 우습고 낯설었고, 결국 신의 바람대로 광야에 혼자 서 있을 뿐 아니라, 서 있어보니 좋았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저기압이나 고기압 혹은 기압골과 같이 우리 눈에 절대 보이지 않지만 필연코 존재해서 눈이나 비 혹은 햇빛이나 바람으로 닥쳐오는 어떤 놀라운 힘이 내 곁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한 번 더 깨달았다.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 하면서 내키는 대로 날고 움직이고 있는 줄 알았으나 실은 제트 기류를 타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뛰어도 이 지구보다 빠른 속도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야 하나, 부처님 손바닥에 있는 손오공, 아니 이 모든 것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경외와 전율이 나를 엄습했다. 심지어 나는 지금 말하고 있지 않나 말이다. 저 광야가 매혹적이라고."
공지영 작가는 나이를 먹고 가만히 있으면 그저 퇴보할 뿐이라고 말한다. 더 딱딱해지고 더 완고해지고 더 편협해지고, 자기가 바로바 될 줄도 모르는 바보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지영 작가는 자신이 예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면이 있다면 그건 성숙해지고자, 더 나아지고자 흘린 피눈물이 자신에게 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미사가 끝나고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뒤쪽 언덕으로 돌아가니 안개 바다 속으로 커다란 해가 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을 가득 채운 뿌연 안개는 정확히는 사해 쪽에서 끝없이 올라오는 수중기였다. 말하자면 사해는 끓고 있는 커다란 물이었다. 어느 먼 옛날 이곳을 지나는 지진대가 난데없이 이 땅을 쩍쩍 라그로 그 나머지는 가라앉아 모든 물들이 그리고 흘러들었다. 사해. '죽은 바다'라는 뜻의 사해는 받아들이기만 할 뿐 아무에게도 제 물을 나누어주지 않아, 결국 생명 없는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저 가지려고만 하고 움켜쥐려고만 할 뿐 내어주고 흘려보내고 놓아버리지 않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죽음으로 변한다는 것을 사해가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선가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너는 또다시 소수의 편에 서게 될 것이다......' 하는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너는 택해야 한다. 그 고독을, 그것이 참된 것이라면...... 아득하고 슬픔 바람이 미지근하게 불어왔고 계속해서 불어왔다."
공지영 작가는 수많은 성인들, 수많은 현자들이 인간 세상을 떠나 사막으로 간 것은 우리 감각을 미혹시키는 배경들이 가장 최소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지영 작가는 불교에서 '미혹'이라고 말하는 그 모든 감각을 지워버리고 나면 인간은 하는 수 없이 자기 자신을 만나고, 통곡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끝도 없는 광야. 풀 한 포기 나지 않고 물 한 방울 없는 광야. 유백색의 메마른 광야는 나를 매혹했다. 이곳에 머무르면 어둠까지 내린다면 그때는 신과 내가 대면하는 그런 순간이 오는 것은 아닐까."
공지영 작가는 고통이 오면 우리는 이 고통이 내게 원하는 바를 묻고, 반드시 변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가졌던 틀이 이제 작가지고 맞지 않음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공지영 작가의 글이 눈길을 끈다.
"약간 깨달은 것 가지고는 삶은 바뀌지 않는다. 대개는 약간 더 괴로워질 뿐이다. 삶은 존재를 쪼개는 듯한 고통 끝에서야 바뀐다. 결국 이렇게, 이러다 죽는구나 하는 고통 말이다. 변화는 그렇게나 어렵다. 가끔은 존재를 찢는 듯한 고통을 겪고도 바뀌지않는 사람이 있는데, 대신 고통을 거부하려고 헛되이 싸우던 그가 망가지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공지영 작가는 성 프란치스코를 향해 인간은 대체 어디까지 위대해질 수 있으며,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지고 타락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자 신기하게도 기도의 응답처럼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이야기한다.
"너의 자세는 무엇이냐? 이 삶을 바라보는 너의 방향은. 그가 성자가 된 것은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신을 만나 황홀한 접선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통은 성자가 아니라도 온다. 상처도 온다. 가난도 오고 멸시와 따돌림도 온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선택하는 것이다. 성자가 될 것인지, 희생된 비참한 늙은이가 될 것인지."
공지영 작가는 성모는 하느님의 하늘을 낳아서가 아니라 그 아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놔두고, 내버려두고, 그리고 떠나보냈기에 거룩한 어머니가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지영 작가는 인생에서 얻는 것보다 내려놓는 것이 백배는 더 어렵고, 그중에 제일 어려움 것이 아마도 자식일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한때 나도 아이들에게 집착한 적이 있었다. 내가 불행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바리사이 같은 엄마가 되었다. 아이의 성적을 위해 밤늦도록 매를 때려가며 가르치려고 한 일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버릇없이 굴면 가차 없이 벌을 주었다. 나중에는 엄격함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방식을 바꾸었다. 방황하는 사춘기 아이를 위해서 그 애 학교 운동장 담벼락을 돌며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그 유명한 집착이라는 것이구나, 이게 그 유명한, 남을 내 마음대로 하고, 아이에게 내가 몸소 하느님이 되어 그 애의 고유한 생김새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교만의 죄구나, 싶었다. 내 긴긴 기도도 실은 집착의 다른 포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공지영 작가는 고통은 몇 가지 특별한 해악을 우리에게 끼친다고 말한다. 그래서 공지영 작가는 어느 날부터 고통이 유혹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공지영 작가는 고통은 우선 첫째로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악심을 불러일으키고, 두 번째로 우리로 하여금 남을 판단하게 만들고, 세 번째로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들며 사랑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고통은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고,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공지영 작가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공지영 작가는 해가 있어야 싹이 튼다고 생각하지만 어둠 속에서야말로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난다는 것, 이것은 정말 위해단 일이며, 그러니까 우리는 밤에 자랐고, 고통 중에 성숙했고, 아프고 나서야 키가 반 뼘쯤 자란 것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공지영 작가는 자신에게 은둔, 인간에 대한 혐오와 절망, 사회에 대한 공포심 어린 경멸, 모든 만남에의 거절과 취소는 밤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엄마가 말하곤 했었다.
"자라. 자고 나면 나아 있을 거야."
자고 일어나면 신기하게도 많은 것이 달라져 있기도 했다. 자고 일어나면 내 바지가 껑충해지고 옷소매가 짧아져 있기도 했다. 비단 인간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어서, 하동에 와서 살다 보니 자고 일어나면 아랫집 감나무가 초록초록 했고, 자고 일어나면 길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기도 했다."
공지영 작가는 성지순례를 다녀온 다음날 반려견 동백이의 전 주인과의 소동이 벌어졌던 일을 생각했고, 밤에 잠이 깨어 문득 올려다보았는데 별빛에 눈이 시렸다고 말한다. 공지영 작가는 달도 없는 밤에 별빛이 홀로 저렇게 맑고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는 것이 신비로웠고, 몸이 뻐근하고 아프고 놀랐지만 엄청난 핵복감이 자신에게 밀려들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크신 어떤 분이 공지영 작가 자신에게 보내는 사랑의 눈빛 같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크고 밝은 눈으로 널 바라보고 있단다. 괜찮다, 다 괜찮다' 하고.
"천사가 일어준 대로 그분은 거기 계시지 않았다. 그분은 살아나셨고 우리보다 먼저 갈릴래야로 가셨다. 예수가 거룩하게 변모해서 초막을 지어서라도 머물고 싶은 타보르산이 아니고 갈릴래아, 권력층이 사는 예루살렘이 아니고 갈릴래아, 어부들이 그물을 손질하고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허탕을 치고 목동들이 양을 모는 그곳, 그러니까 이곳, 걸어가는 강아지를 낚아채고, 욕설을 하고 싸움이 일어나고 시비를 걸고 이 시골에서 뒷담화해서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리고 폭력을 당해 간 경찰서에서 "폭력을 당한 건 아니지요?"라고 묻는 이곳, 여기 갈릴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