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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의 벽 -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 박신양과 철학자 김동훈의 그림 이야기
박신양.김동훈 지음 / 민음사 / 2023년 12월
평점 :

<제4의 벽>은 화가로 변신한 한국 대표 배우 박신양과 예술에서 철학적 가치를 읽어내는 인문학자 김동훈의 그림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이 책은 다양한 작품에서 철저한 캐릭터 분석으로 유명한 배우 박신양이 러시아 유학 시절부터 화가가 되기까지의 고통스럽고 솔직한 고백을 만나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10여 년 동안 그려 온 박신양의 그림 가운데 131점이 수록됐고, 박신양의 그림에 대한 인문학자 김동훈의 해설로 더욱 풍성하게 박신양의 그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연극에서 무대와 관객석을 구분하는 가상의 벽을 '제4의 벽'이라고 한다. 벽이라는 '실재'가 '현실'에는 없고 '상상' 속에만 있는데도 배우와 관객 모두가 마치 현실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벽이다. 그런데 박신양 화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제4의 벽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넘나들 대 또 다른 창조성이 나온다고 여긴다. 책 <제4의 벽>은 박신양 화가 개인의 예술철학에서 예술 일반을 이해할 수 있는 가이드까지 독특한 독서 경험을 체험하게 해준다.
박신양은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의 진심에 가닿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연기에 몰두했듯이, 사람들의 눈에 닿고 영혼에 닿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연결되기를 바라면서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창조의 근원과 뚝심, 그리고 고독과 고립 같은, 사람들이 별로 거들떠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며 평생의 노력과 뚝심을 바친 많은 예술가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예술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것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추구하는 사람이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바쁜 삶에 쫓기느라 살펴보지 못하는 문제들을 대신하여 애써 들여다보는 사람들이다. 그것의 대부분은 아마도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것들에 해당할 수도 있고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설명하지 못한 채로 부여잡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일이다."
박신양은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전혀 배운 바 없었고 연기를 시작했을 때처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박신양은 내 안에는 그리움만 가득했고 사람들을 그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그림도 연기도, 그리고 모든 표현은 표현자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문제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내가 연기에 접근했던 방식과 다르지 않게, 나와 타자, 나와 세상, 그리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 아름다움과 추함,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길에는 지난하게 힘들고 험난한 과정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결코 쉬운 지름길 같은 건 없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교과서도 없다. 누군가가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갈 수도 없다. 아무리 등불과 가이드가 있다 해도 본질적으로는 예술가가 스스로 길을 찾아내고 거기에 수반되는 짐을 기꺼이 짊어져야 한다. 당나귀가 짐을 지는 데 꾀를 부리지 않듯이."
박신양은 자신에게 생일을 생소하기도 하고 오히려 침착하며 엄숙하다고 말한다. 박신양은 어쩌면 매년 날짜를 정해 놓고 생일이라고 우기는 건 다분히 작위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태어남과 있음이 경이롭고 축복받을 일이라면 매일과 매 순간이 그러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혹시 어느 날 문득 생명의 기쁨이 나의 어딘가 깊숙한 곳으로부터 느껴진다면 그날을 생일로 하는 건 어떤가에 대해 말하는 박신양의 글이 눈길을 끈다.
"가령 무언가에 몰두하다가 잠깐 본 청명한 하늘과 시원하게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 축복을 느낄 때, 그리고 예상치도 않았던 감격스러운 사람과의 만남에 진정한 감사와 행운을 느낄 때, 엄청난 좌절 가운데 한 줄기 희망을 느낄 때, 어떤 의도 없이 진심으로 누군가를 도와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가 어디선가 배웠던 고독이 전혀 슬프거나 암울한 것이 아닌 매우 친근하며 심지어 흥미로운 것임을 느꼈을 때, 문득 아주 작은 것에서 커다란 의미를 발견했을 때처럼."
인문학자 김동훈은 박신양 작가가 생일을 맞아 뭔가 생소함을 느끼는 것은, 생소함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임'을 뜻한다고 말한다. 김동훈은 생소함은 작가에게 단순히 도전적인 과제일 뿐만 아니라 많은 유익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작가의 답답함과 고민을 언어화하는 데 도움을 주며,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나아가는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확장하고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다. 김동훈은 박신양 작가의 생일에 겪는 생소함은 작가의 탄생을 알리는 시작이며, 우리가 그의 작품과 작업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여기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문학자 김동훈은 박신영 작가가 행복이라는 강박에서 빠져나오게 된 계기는 10년 동안 네 번의 수술과 진통제 복용을 견뎌내었고 혼미한 정신을 오가며 다다른 막다른 길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김동훈은 박신양 작가가 마침내 늘 되뇌었던 행복이 틀렸다고 선언하고 진정한 행복을 찾고자 길을 나선 순간부터 그의 구도의 길이 시작되었고 화가로서의 작업에 불이 내렸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행복을 말하면서도 자신이 한 말에 책임감 없는 사람들이 참 많다. 특히 '아무말 잔치'를 하는 사람들은 과장된 언어로 돈만 벌면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런 과장된 언어는 언제나 거짓말로 판명된다. 효능이 없는데도 있다고 하고 아직 안 한 것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떤 결실도 없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면서 생색만 낸다. 하지도 않을 일에 대한 뻔뻔한 공치사는 자신의 무관심과 무책임, 무능력에 대한 가림막이며 기만적 태도의 증거일 뿐이다.
그래서 작가는 몰염치한 행복에 저항한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행복 리스트나 행복 십계명을 따르지 않는다. 수술의 상처나 정신적 고통 속에서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이런 행복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젠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며, 행복론자들의 리스트에 없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향유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한다."
인문학자 김동훈은 어떤 작품을 감상하고 1차적으로는 추하거나 두렵고 위태함을 느꼈는데 거기서 그 감정만으로 끝나지 않고 무너가 멋있고 아름답게 느껴져 매혹된다면, 이것이 숭고한 감동이라고 말한다. 김동훈은 박신양 작가는 아마 열등감에서 해방되는 자유로움의 감동과 함께 그림 자체에서 감정의 변화, 즉 숭고한 감동을 느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박신양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미술 공개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그리고 싶은 걸 그리라고 한 적이 있었고, 기분 좋게 빨간 사과를 그렸다고 이게 그림이냐고 된통 혼나기만 했다고 말한다. 그는 그 후로는 사과도 그림도 그리지 못했고, 지금 사과를 그리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그 후로 거의 40년이 지나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흔한 빛바랜 보라색 비닐봉투에 담긴 사과 두 알을 선물로 싸 주셨던 두봉 주교님을 통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사과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박신양은 그동안 수많은 사과를 보아 왔지만 모두 자신에게 필요한 사과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이게 그림이냐는 말은, 다시 말하면 그렇다면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어때야 하는가라는 말의 다른 의미이겠다. 어떻게 보면 그때 큰 화두를 얻은 것이다. 무엇을 그린다는 건 그게 무엇이건 그것과 비슷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 될 것이다.
두봉 주교님은 그렇게 내가 다시 오랜만에 사롸를 그릴 수 있게 해주신, 아니 처음으로 의미를 갖고 사과를 바라보게 해 주신 고마운 분이다."
박신양은 나와 우리는 여러 이유로 규정되고 한정지어지지만, 정해진 규정들을 넘어서 역할 이외에, 그리고 역할을 넘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그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는가가 그 사람이다. 그 노력을 왜 하는가에 대한 어떤 생각과 관심을 가지는가가 그 사람이다. 그 관심에 대한 애정의 지속과 근거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진심을 쏟고 있는가가 그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가 품은 열정이 그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박신양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필수적인 문제이지만 그 자체로는 틀린 질문이다. 그건 그냥 삶과 인생과 자신에 대해서 정해진 대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깊게 잘 생각해야 한다는 뜻을 일반적으로 총칭하는, 편의상 정해진 질문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니까 여러 방식으로 우상화되고 구태의연해지고 도식화된 질문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버리고 철저하게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누구나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해내야 한다. 그 역할만으로도 우리는 힘겹다. 한마디로 역할 이외의 시간을 만들어 내거나 사용하지 못한다. 역할에 충실하는 것은 삶의 임무와 책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역할을 나 자신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만든 캐릭터들은 절대로 나 자신일 수 없으며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것은 또 다른 나이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나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건 내가 선택하고 나에게 주어진 역할의 수행일 뿐이다."
"나는 나를 포함한 모두가 역할을 넘어서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캐릭터라는 말은 뭔가 독특한 면을 가진 극 중 등장인물을 말하기도 하지만 본래는 사람 자체를 말한다. 그러니까 극에 등장하는 무언가 특징적인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그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를 포함한 모두가 진정한 사람, 진정한 캐릭터가 되는 기대와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희망이다."
박신양은 2020년에 갑상선 기능을 제거하는 치료를 받았고, 그전에는 서 있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상태가 10년 가까지 지속됐었다고 말한다. 몸이 거의 말을 듣질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박신양은 자신의 몸에 비타민 같은 것조차 주지 않고 가혹하게 혹사해 오기만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해야 할 일과 감당하수 있는 몸 사이의 균형을 항상 잘 몰랐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해야 할 일들에 비중을 뒀으며, 지금부터라고 해야 할 일들을 해내기 위해서라도 몸을 조금은 아껴야겠다고 고백한다.
"나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총체적으로 다시 해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나를 이루는 근본이 무엇이었으며 이제까지 부여잡고 있던 것들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라고 엄청나게 의미 있는 시간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박신양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봐야 한다고 말한다. '본다는 것'은 대상을 깊이 파악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대상을 대하는 '나 자신을 파악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지속적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건 내가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과 더불어 그리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나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림에서 감정을 다루는 시선은 1인칭이다. 그것은 다른 방법 없이 정면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 내 감정과 마주한다는 것은, 제3자의 시선과 입장에서 묘사될 수 없다. 그래서 1인칭이다. 그랬을 때라야만 그 표현이 누군가에게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박신양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생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그리는 행위 자체가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로 비생산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효용성 관점에서 그림 그리기는 매우 쓸데없는 짓에 해당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필요와 효율에 해당하는 쪽의 반대편에 서기로 결정하고 나면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이고 밑바닥 어딘가로부터 기쁨이 올라온다고 말하는 박신양의 글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체계적이고 효율적이기 위해 태어났는가? 생각해 보면 그래야 한다는 강요를 참 많이도 받아왔다. 오랫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그런데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효율적이어야 하는가?"
박신양은 우리는 제4의 벽뿐만 아니라 모든 상상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이미 어떤 선택을 의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선택의 근거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잘 들여다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분명한 감각인 감정은 공들여 들여다볼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고 보며, 그것은 인생의 다른 것들을 알아가기에 참으로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는 박신양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우리가 이미 공고하게 결정되어 있는 제4의 벽의 위치를 조금이라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방식대로 이동시킨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한다면 상상을 포함한 주어진 근거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이다. 그것은 시점이 강제로 고정당하는 것에 순응하기보다는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다. 결국 누가 나와 나의 상상의 근거를 결정하고 그것이 무엇 때문에 결정지어지는가에 대한 의문이며, 운명 같은 거대한 것을 포함하지 않더라도 구조와 마주선 자신을 끊임없이 바라봐야 하는 실존이기도 하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무한 가능성이며, 동시에 손에 진땀이 흐를 정도로 가능성의 흥미로운 저주이기도 하며,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강력하고 원초적이고 파토스적인 움직임의 시작이 들어 있고, 또한 그 순간 그 지점에 서 있는 자신을 지켜보기 위한 단초의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