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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스토리 - 박혜진 비평집
박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평점 :
<언더스토리>는 2011년부터 현재까지 출판사 민음사에서 일해 온 문학 편집자이자, 2015년 '조선일보' 신출문예에 당선되며 비평 활동을 시작한 문학 평론가 박혜진의 첫 비평집니다. 박혜진은 누적 130만부가량 팔린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펴낸 편집자이자 월간 <릿터>의 편집장이며, 동시에 문학을 읽고 그 속으로 포착되는 의미들을 건져내는 비평가이다. 많은 비평가가 치열하게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을 정체성으로 삼아 살고 있지만, 더욱이 그에게 문학은 생업니다. 하나의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편집자로서, 두 달에 한 번 나오는 문학잡지를 기획하는 편집장으로서 그의 선택은 모두 생생한 문학비평의 연속이다. 시대를 비추는 소설을 펴내고, 순간의 화두를 담아내는 잡지를 만들며 문학과 삶을 떼지 않는 그가 작가와 작품에 대해 쓴 비평들을 모아 묶는다. 때문에 <언더스토리>에는 그가 편집자로서 감응했던 한 권의 책, 혹은 한 사람의 작가에 대한 비평가로서의 지지가 담겼다. 김혜진, 조남주, 배삼식, 서유미, 정용준 등 미더운 작가와 작품에 대해 박혜진은 예리한 독해와 더불어 다정한 믿음을 건넨다.
이 책에서 박혜진은 문학은 '언더스토리'라고 말한다. 박혜진은 인간사회도 식물들의 방식을 닮아서,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지만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 공동체를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그 절실하고 애틋한 심층의 연결에서 이야기가 탄생하고, 이야기는 우리에게 영향과 영양을 준다는 박혜진의 글에 공감한다. 박혜진은 이 책은 그늘진 중간층에서 생성되는 심층의 이야기에서 오늘의 문학을 찾는다고 말한다. 키워드는 모두 네 개로, 모두 인간, 자아, 사랑과 우울, 그리고 윤리이다.
"문학은 언더스토리다. 언더스토리는 하층식생 혹은 하목층을 가리키는 말로 숲 지붕과 숲 바닥 사이에 사는 생물을 뜻하는 산림학 용어다. 곰팡이나 이끼를 비롯해 어린 나무인 묘목이나 높이가 2미터 이내로 땅속에서부터 줄기가 갈라져 나오는 관목 같은 내음성 식물(그물에서 견디는 능력이 큰 식물)들이 언더스토리에 속한다. 태양빛의 상당 부분은 숲의 지붕에 해당하는 임관충 식물들이 받아먹기 때문에 중간층, 즉 언더스토리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은 늘 빛이 부족하다. 내게 있어 문학은 적은 빛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을 환대하는 집이다."
박혜진은 올가 토카르추크의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라는 소설에 관한 비평 제목으로 '다시 만난 인간: 스키어, 운전자, 알레스기 환자'라는 글을 썼다. 박혜진은 이 소설은 자연을 즐기거나 극복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자연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자연으로부터 영향 받는 존재를 만들어 냈다고 말한다. 동물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처럼 느끼는 우울하고 미친 노파이자 '예언자'로 읽어야 할 것 같은 한 사람의 탄생이다.
"소설이 우울의 정조를 짙게 깔고 있다면 이때의 우울은 두셰이코의 멜랑콜리한 성정에서 기인한다. 부인은 고통과 함께 살아가기에,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진실을 훨씬 예민하게 감각한다. 그러니까 토카르추크의 생태주의적 소설은 일단 두셰이코라는 희한한 인물을 구축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인다. 살인 사건은 그다음 문제다. 그 결과 두셰이코는 간혹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에겐 세상을 느끼는 관점이 있지만 동물들에게는 세상을 느끼는 감각"이 있다는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는 관점과 감각이 총동원된 초인적인 캐릭터다. 스키어와 운전자, 그리고 알레르기 환자로 인간을 구분하는 이 소설은 자연을 즐기거나 극복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자연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자연으로부터 영향 받는 존재를 만들어 냈다."
"토카르추크의 소설을 읽는 내내 "인식의 문이 깨끗이 닦이면 모든 것이 무한히 드러난다."라는 블레이크의 시구절을 생각했다. 인식의 문이 닦이면 모든 것이, 그러니까 인간이 동물에게 행하는 가학적인 폭력들이 무한히 드러난다. 이 소설이 바로 그 인식의 문이다. 인간보다 약한 존재들과 연대하기 위해 점성학의 시점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시적 언어로 인간을 노래하는 어느 고독하고 우울한 노인의 예언서. 혹은 미래가 궁금한 '오늘'을 위해 펼쳐진 점괘. 믿을지 말지 고민할 시간이 없다. 신념이 능력을 대체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박혜진은 진은영의 <가족>과 유계영의 <가족사진>은 절묘한 지점에서 상반된 방식으로 가족에 대한 감각을 제시한다고 말한다. <가족>이 비교적 익숙한 가족 서사 위에서 시상을 전개한다면 <가족사진>은 익숙한 가족 서사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진은영의 <가족>에서 가족은 나를 포함하는 동시에 나를 배제하는 모순적인 구조물이므로, 나를 소유하면서, 그 소유로 인해 내가 소유되는 것을 보여준다. 박혜진은 가족은 변화하는 내 생장의 조건들을 따라오지 못하고, 그로 인해 '나'와 가족의 불일치는 점점 더 커지고, <가족>은 이 불일치를 통해 가족과 가부장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구조에 대한 개인의 저항을 두드러지게 하는 시라고 이야기한다. 박혜진은 이에 반해 <가족사진>은 정물화된 가족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생명의 공간인 밖과 죽음의 공간인 안을 구분하고 안에서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개별 주체의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는 <가족>과 구분되는 정적 이미지로 가득하다고 이야기한다.
"<가족>은 화분을 키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법한 감정에 빗대어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의 본질을 그러낸다. 시는 밖과 안을 대비하는 구조로 전개된다. 바깥은 꽃과 화분이 빛나고 아름답게 존재할 수 있는 생명의 공간인 데 반해 집은 아무리 환하고 예쁘던 꽃과 화분도 결국 시들어 버리는 죽음의 공간이다. 밖에서 좋아 보이던 것들이 우리 집에 오면 밖에서 밖을 때만큼 좋아 보이지 않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절대적인 조건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던 상태에서 나만의 소유가 되었다는 상태 변화에 있다.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누구의 것도 될 수 있는 열린 존재를 앞에 두고 있을 때 존재와 나 사이에는 거리가 생긴다. 거리는 타자를 바라볼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거리가 있어야 나 아닌 존재의 다양한 측면을 가능한 한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생긴다. 그러나 누군가의 소유가 되었을 때 거리는 위협받는다. 소유란 다름 아닌 포함 관계이기 때문이다. 소유와 거리는 공존할 수 없다. 거리가 존재할 때조차 소유 안에서 발생하는 거리라는 점에서, 그때 발생하는 거리와 이전의 거리는 같은 것일 수 없다. 거리가 존재하지 않을 때 서로 다른 두 개체는 불편하고 불안한 관계에 이르고, 서로 다른 두 개의 개체는 공존하기 위해 어느 한쪽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 예컨대 꽃과 화분이라면, 그들 각각의 존재 방식은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의 방식으로 변화한다. 서로 다른 개체가 하나의 방식으로 정의될 때 발생하는 파괴, 화분의 죽음은 단지 물리적인 죽음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소유 관계와 그로 인한 거리의 소멸은 가족이라는 관계에 내재된 갈등의 본질을 관통한다."
박혜진은 임선우의 <유령의 마음으로>에서 유령은 '나'보다 '나'의 감정에 훨씬 더 충실하게 반응한다고 말한다. 주인공이 슬픔에 잠길 때면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고 기쁠 때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화가 날 일이 있으면 주인공은 내지 못하는 대신 화를 대신 냈다. 유령은 '나'와 분리된 '나'의 감정이라는 박혜진의 글이 인상적이다.
"타인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타인이라는 짐을 짊어져야 한다. 타인으로 인해 무거워져야 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정우에 대한 사랑이 소멸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픈 정우를 두고 변심했다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모든 것에 결별을 고하고 그를 떠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변심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변심했다는 사실일 주는 죄책감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 이전의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가벼웠을 것이다. 정우에게 묶여 있는 자신이 무겁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사실은 정우와 결별하고 그런 선택을 한 자신을 견디는 것이 무거운 일이다. '나'는 자신의 감정이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오자 비로소 자신과 만난다. 나와 정우의 결합이 해제되기 위해 '나'로부터 '나'의 감정의 분리되어야 했다. 유령의 존재를 통해 '나' 스스로는 꺼내지 못했던 마음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유령이라는 매개를 통해 '나'와 정우의 결별이 이루어진다. '나'는 이제 조금 더 살아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정우의 상태에 동일시하고 있던 자신과도 결별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혜진은 고립과 불안정에서 비롯되는 비이성적인 공포와 입증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연쇄하는 가운데 지속되는 예감은 손보미 소설에서 마주하는 인간들의 모습이자 이따금 고개 드는 우리 내면의 모습이며 무엇보다 하얀색의 우울, 죽음에서 시작된 페가수스의 불안한 삶을 닮았다고 말한다.
"손보미가 그의 소설을 통해 누적하고 있는 특수한 감정들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그러나 아직은 명명되지 못한 감정들의 양태들이지만 여러 인물들에게 공통으로 발견되는 감정 상태는 있다. 바로 우울이다. 요컨대 손보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를 읽는 일은 손보미 소설의 핵심을 지나는 일인 동시에 손보미 소설의 변화를 따라가는 일이기도 하다. 일시적인 기분 상태를 의미하는 슬픔과 구분되는 이들의 우울감은 미래에 대한 기분 나쁜 불안감으로 가장 먼저 드러난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은 생각이라기보다 비이성적 공포에 가깝다. 불행이라는 침입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할 때, 불행이 한 사람에게 비치는 영향을 궁금해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손보미의 소설은 불행에 맞선 인생들의 조용한 방어전이다.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발생하는 감정들을 사후 해석의 손길이 닿지 않은 상태에서 들여다보려고 한다."
박혜진은 양안다의 시집 <숲의 소실점을 향해>는 언어화할 수 없는 우울한 감정들이 시차를 두고 도착하는 절망의 돌림도래라고 말한다. 박혜진은 끝났는가 하면 다시 시작되고 시작되기 무섭게 끝나는 이 나날의 돌림노래는 우리 감정의 그림자를 반복적으로 보여 준다고 이야기한다. 박혜진은 양안다의 시는 고통의 기원을 탐색하거나 원인을 찾으려고 골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양안다의 시에 등장하는 병증의 주체들은 그 병증을 인식하고 병의 끝까지 상상한다. 박혜진은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을 때까지 밀고 나가므로 우리는 종종 더할 수 없이 자기 파괴적인 구절을 만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상상하는 소실점은 소실점 너머에 닿기 위한 시선이다라는 박혜진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소실점은 멀리서 바라볼 때 평행한 두 직선이 한 점에서 만나는 것같이 보이는 점이다. 두 직선의 끝과 끝을 연장했을 때 만나면서 너머로 사라지는 지점이기도 하고 볼 수 있는 공간 중에서 가장 먼 공간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만나지 않는 두 선이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실제로는 평행하지만 우리 눈에는 모든 선이 한 점에서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 눈이 원근법의 원리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원근법에 따라 바라볼 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라짐의 공간이 생겨난다. 소실점이 만들어내는 끝의 공간, 사라짐의 공간, 이곳과 저곳을 연상시키는 환상의 공간은 양안다가 구축해내는 유일무이한 시적 공간이자 형용할 수 없는 재난 상태에 직면한 훼손된 마음의 공간이기도 한 바, <숲의 소실점을 향해>는 나날의 소실점에 대한 기록이라 하겠다."
박혜진은 박민정의 <미스 플라이트>는 한 여성의 죽음을 스캔들의 프레임으로 소비하려 드는 태도에 강력히 반하는 구조를 취한다고 말한다. <미스 플라이트>는 오명을 뒤집어쓴 여인의 미스터리한 죽음의 배후를 그녀가 살았던 삶의 이야기로 전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을 추구한다는 박혜진의 글에 공감한다. 박혜진은 박민정 작가는 우리에게 죽음의 소비자가 될 것인지 물으며, 이 질문을 우리는 무겁게 받아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현대의 폭력은 죽이지 않고 죽게 만든다는 박혜진의 글이 눈길을 끈다.
"죽은 사람은 쉽게 오해된다.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삶을 살아온 한 인간의 삶이 죽음의 시점을 기준으로 단일하고 평면적인 그것으로 납작해진다. 왜 죽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 놓치는 것들 중에는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누가 죽었는가. 그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유는 그의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그것이 누구의 죽음이든 간에 소비되지 않아야 한다. 죽음을 소비한다는 건 피해자를 지우는 가장 전형적이고 비열한 가해의 논리가 되기 때문인데, 그것은 피해자를 한 번 더 죽이는 폭력이다."
문학비평이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소설가나 시인 못지 않게 자기만의 혜안으로 작품과 작가를 들여다보고 세상을 이해하고 성찰하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 책에서 박혜진은 이와 같은 문학비평가로서의 삶의 길을 날카로운 눈과 따스한 마음으로 걸어간 흔적의 글을 보여주어 인상적이다. 좋은 비평이란 작품의 뼛속까지 들여다보고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진실한 이야기와 세계를 독자에게 연결해주는 일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박혜진은 분명 좋은 비평가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