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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청>은 첫 장편소설 <중앙역>을 비롯하여 <딸에 대하여>, <9번의 일>, <불과 나의 자서전> 등 모두 7편의 소설책을 펴내며 한국문학에 새로운 색깔을 더하는 김혜진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이다. 임해수는 삼십 대 후반의 심리 상담 전문가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자신할 뿐만 아니라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날 이후, 신뢰받는 상담사 임해수의 일상은 중단됐다. 내담자들에게 자신 있게 조언하던 임해수의 자리 역시 사라진다. 지금 해수가 있는 곳은 모욕의 한가운데. 세간의 구설에 오르며 대중의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 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차례로 이어진 퇴사 통보, 이별, 끝 모를 자기연민. 일과 삶의 세계로부터 모두 추방된 임해수의 삶은 캔슬컬처의 면면을 보여 준다. 그녀의 존재는 한순간 세상으로부터 '취소'당했기 때문이다.
<경청>은 세상과 담을 쌓은 채 혼란에 잠겨 있는 임해수가 매일 밤 완성되지 못한 편지를 쓰는 장면과 그녀가 10살 소녀 '세이'를 만나면서 길고양이 '순무'를 구조하기 위한 일상이 교차되는 과정들이 인상적이다. 임해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들이 아니라 그녀가 기꺼이 삶을 공유한 이들이 간직한 말들, 그들이 감추고 있는 의구심과 안타까움들로 괴롭다. 이전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법을 잊었고, 과거의 자신을 잃은 임해수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상실했고 자신이 처한 삶과 화해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임해수는 순무를 구조하기 위한 장소에서 단 한순간도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한다.
하지만 상담사였던 임해수는 완전한 침묵 안에서 언어가 생략된 순무와의 교감이 헤아림과 공감, 위로와 포용이라는 안도감을 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끝없는 의미 찾기.
그게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어요?
상담사였을 때 그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그것이었다. 그렇게 질문하면 정신없이 이야기를 쏟아 내던 내담자들은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런 후엔 다급하게 찾아낸 의미들을 더듬거렸다. 그녀가 보기엔 확실하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이유들이었다. 그녀는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대신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의미들이란 결국 스스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해. 진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러나 자신이 만들어 내지 않는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 그녀는 허상을 좇는 것과 다름없는 의미 찾기 놀이를 그만둔 지 오래다.
결국 그녀는 순무를 돕겠다고 결심한다. 거기엔 어떤 의미도, 이유도 없다. 그런 걸 찾고 싶은 생각도 없다. 마음을 정하고 나자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
"동정, 연민, 연약하고 가여운 동물에게 느끼는 흔해빠진 감정.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자신이 안타까워하는 것이 순무를 사로잡는 고통인지, 그런 고통에 노출된 삶인지, 고통을 견뎌 온 지금까지의 시간인지, 얼마가 될지 모르는 앞으로의 시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것이 순무에 대한 것인지, 자신에 대한 것인지, 그 둘이 뒤섞인 것인지도."
"말에 관해서라면 그녀는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녀는 말의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해석하고, 설명하고, 반박하고, 동의하고, 고백하면서 보이지 않는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은 그저 넘쳐 나는 말들에 둘러싸여, 불필요한 말들을 함부로 낭비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한 말이 언제 탄생하고 어떻게 살다가 어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이 책에서 임해수가 순수한 소녀 세이와 '순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불신과 두려움을 밀어내는 모습이 인간과 인간이 맞닿은 세계는 나이를 초월한 우정과 연대가 존재한다는 진실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대화에는 장애물이 없다. 대화는 앞으로 나아가고 부드럽게 방향을 틀고 서로의 마음속을 자유롭게 활보한다. 말들이 완강하게 닫힌 내면의 문을 열고, 서로의 내면 깊숙이 진입하고, 그 안에서 자신과 꼭 닮은 말을 길어 올린다.
꾸밈이 없는 말.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걸치지 않은 말. 의도도, 저의도, 악의도 없는 말. 한 번도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말. 아무런 빛깔도 모양도 부여받지 못한 채 지금껏 웅크리고 있던 말들."
임해수는 자살한 배우 박정기의 아내를 만나서 자신의 억울함과 해명을 선택하는 대신 침묵하고 경청한다. 임해수가 폐허같은 집에서 외부와 대적하며 쓰던 편지들이 폐기되고 진심을 담은 사과의 편지를 쓰는 행위로 변화하는 과정은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삶의 태도가 자기 연민과 분노에서 벗어나 올바른 인식을 통한 선의를 믿는 힘이라는 진실을 보여준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속 깊이 가라앉은 말들을 꺼내고 싶은 충동을 누른다. 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는 그 말들이 철저히 자신의 몫으로 남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들은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결코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정기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자신과 마주 앉은 저 여자가 그런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녀는 언어로만 이해하던 그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아프게 깨닫는다."
임해수는 세이 아버지에게 피구 경기 중 자신을 따돌리는 아이들을 향해 모래를 던지며 몸을 날린 세이가 사과하는 방법을 배워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임해수가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일은 세이가 먼저 사과해야 해요. 이번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사과해야 한다고 말해 주세요. 사과하는 법을 알려 주세요. 그래야 한다고 가르치세요. 이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이 책의 엔딩은 임해수가 세이를 집으로 초대하여 세이가 스스로 내면의 감춰둔 이야기를 시작하는 장면으로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그녀는 두 손으로 테이블 표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아이와 눈을 맞춘다. 언제, 어디서, 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이 보잘것없는 테이블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돌멩이와 나뭇가지. 그러니까 언제든 손가락을 갖다 대면 맥없이 무너져 버릴 것들을 다시 쌓아 올리기엔 더할 나위 없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이가 이야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