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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 - 그 모든 우연이 모여 오늘이 탄생했다.
슈테판 클라인 지음, 유영미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2월
평점 :
세계적인 과학 저널리스트인 저자 슈테판 클라인의 책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의 모든 것의 원제는 우연한 모든 것(Alles zufall)이다. 태곳적부터 인류는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을 거부하며 어떻게는 세계의 규칙을 찾아가려고 했고, 이러한 시도는 세상이 이미 정해진 운명대로 굴러간다는 숙명론적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과는 별개로 세계는 여전히 갑작스러운 지진이나 코로나19로 수백만 명이 목슴을 잃는 등 더욱 예측할 수 없는 변수화 함께 흘러가고 있다. 우리는 그럼에도 운명을 믿을 수 있을까, 아니면 이처럼 불확실하고 우연한 세계에 몸을 맡겨야 할까?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의 저자인 슈테판 클라인은 인간의 삶은 우연이 만들어낸 사건들의 총합일 뿐이며, 이 세계가 어떤 규칙이나 운명에 맞춰 굴러갈 것이라는 믿음은 '사랑스러운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변덕스러운 삶에 무방비하게 내맡겨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실 우연은 운명보다 더욱 신비롭고 낭만적인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연은 우리에게 불안이 아닌 '자유'를 안겨주며, 강자뿐 아니라 약자와 다양한 종에게도 생존의 기회를 주었다.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운명적인 사랑 역시 '우연' 덕분에 가능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연으로 가득 찬 이 세계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뇌과학부터 생물학, 철학, 심리학을 넘나들며 운명과 우연에 겹겹이 쌓여 있던 착각과 오해를 한 꺼풀씩 벗겨내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이러한 질문과 만날 것이다. "운명을 운명처럼 만드는 것은 신인가 나 자신인가?" "나는 어쩌다 한번 내리는 비를 피하려, 스스로 운명이라는 틀에 갇혀 살고 있지 않은라?". 출간 이후 "일상적인 통념을 깨트리고 집단적 오류를 깨트린다"라는 호평을 얻으며 미국 라이브러리 저널이 선정한 '최고의 과학책'에 오른 이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폭넓은 시야를 제공하며, 불확실한 시대에서 끝없는 불안과 허무를 느끼는 이들에게 뜻밖의 선물 같은 위로를 전할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우리가 '우연'과 친해지는 것이다. 우연은 우리의 행동, 감정, 생각 등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포괄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평가할 수 있다. 우연은 예측할 수 없는 많은 연관들 속에 있따. 그래서 한 가지 측면만 살펴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커다란 틀 속에서, 전체적인 관계 속에서 볼 때 비로소 우연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는 우연이라는 말을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아무런 규칙을 인식할 수 없거나, 아무도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 우리에게 우연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첫 번째 의미는 간단하다. 우리가 다르게 설명할 수 없거나, 달게 설멸하고 싶지 않은 것은 우연한 것이다. 빗방울은 우연한 간격을 두고 창문으로 떨어진다. 우리는 그것에서 질서를 볼 수 없다. 두 번째 의미는 좀 더 복잡하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은 일이 맞물려 의미 있는 일로 다가올 때 우리는 "기막힌 우연이네!"라고 말한다.
저자는 규칙을 찾을 수 없는 사건이건 의도하지 않았던 연관이건 우연은 우리가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일이며, 바로 그 점이 우리를 매혹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는 우연에 상반된 감정을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일이 의도하지 않게 딱딱 맞아떨어져 좋은 일이 생기면 좋지만,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에, 불확실함을 스트레스다. 저자는 오늘날에는 제아무리 전문가라고 가까운 미래를 진단하는것 조차 힘들다고 말한다. 기술의 폭발적인 진보, 언론의 홍수, 전 지구적인 기업과 국가 간의 연계가 앞일에 대한 조망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보통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긍정적으로 보기보다 기회에 수반되는 위험에 더 노심초사한다. 두려움은 진화 과정에서 인간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한 신호기제였다. 그리하여 두려움 반, 희망 반일 경우 두려움에 더 무게가 실린다. 객관적으로 마음을 놓을 이유가 더 많을 때에도 걱정이 앞선다. 자연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저자는 우리는 너무 복잡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관찰한 것들을 규칙이라는 틀 속에 붓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규칙은 그것이 어떤 일을 더 간단한 분모로 통합할 수 있을 때, 전체의 이야기를 더 적은 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때 성립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고 규칙이 너무 복잡하면 일은 미궁속에 빠진다. 그럴 때는 규칙을 가늠할 수 없고 그 일을 우연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편하다. 이처럼 저자는 사건의 진행을 단순한 패턴으로 기술할 수 있을 때에만 우연의 작용을 배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지 않고 우연이 작용하는 경우에는 인과관계를 알 수 없게 되며 어떤 일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저자는 어떤 시스템이 법칙을 따르고 우리가 그 법칙을 정확히 안다고 해도 그 시스템의 행동을 아무 때나 정확히 예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시선은 그리 예리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지식이 언제나 인식에 이르는 것은 아니며, 뉴턴 이후의 낙천적인 지식인들에게 이런 통찰은 커다란 충격이었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우리는 놀랄 정도로 '적은' 카오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고 말한다. 우리의 신체는 몇식억 개의 분자의 투입하에 최고로 섬세한 생명 과정의 균형을 이룬다. 저자는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는 수만 명의 사람이 그런대로 질서있게 더불어 살아간다고 이야기한다. 에너지 투입이 중단되면 무질서가 세력을 떨치게 되고, 질서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에너지가 무한하지 않기에 질서도 영원할 수 없다. 자동차는 고물이 되며 인간은 죽고 태양도 빛을 잃는다. 하지만 저자는 무질서에 대한 질서의 승리가 아름답게 빛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일 뿐, 결국은 언제나 우연이 승리한다고 말한다.
"볼츠만에 따르면 자연은 커피잔에서 우유와 커피가 뒤죽박죽되는 것처럼 무질서를 향항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계는 40년 동안 카오스에 빠지지 않고 유지되어온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질서라는 아주 예외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상을 치운다. 그리고 자동차를 정기적으로 정비소에 맡긴다. 그러면 정비공은 비싼 돈을 받고 자동차가 망가지지 않게 조취를 취해준다. 우리의 몸속에서도 세포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면역체계가 청소를 함으로써 질서가 유지된다. 그런 작업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계속 영양을 섭취해 에너지를 공급해야 한다. 지구상의 생명이 약 20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존재할수 있는 것도 태양이 끊임없이 에너지를 방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유기체들은 계속 회복, 재생할 수 있다."
저자는 자연은 개연성이 없는 것에서 개연성이 많은 것, 즉 질서에서 무질서 쪽으로 옮겨간다고 말한다. 그래서 깨진 창문은 절대로 저절로 복구될 수 없다. 저자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옮겨가면서 비로소 과거와 미래가 생긴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는 우연 덕분에 시간의 흐름을 뒤쪽이 아닌 앞쪽에서부터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우리의 존재 역시 우연 덕분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앞날의 모든 것을 모두 알고 있다면 삶이 무슨 가치가 있으며, 모든 장면을 이미 알고 있는 영화는 볼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우연이 없는 삶은 죽도록 지루할 것이라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저자는 현실은 대부분 상호작용을 주고받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렇게 복잡한 체계에서는 카오스 물리학의 방정식이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체계에 내재된 무질서의 경향이 초기의 장애들을 쉽게 무마시켜버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나비의 날갯짓으로 유발된 폭풍은 우유가 커피에 확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희미해진다고 이야기한다. 기류의 변화가 눈에 띄지 않고 일반적인 뒤죽박죽 속에서 그냥 가라앉아버리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어떤 사건의 원인을 완벽하게 알 수 없을 때에 우연을 경험하지만 어떤 사건이 발생한 원인의 일부가 자신이라면 이 원인은 관찰되는 사건과 분리될 수 없고, 이런 상황에서는 피드백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피드백은 원자물리학에서와 같이 규명하고자 하는 현상이 그 연구에 투입되는 수단과 분리될 수 없는 경우 개입된다. 저자는 피드백은 우리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등장한다고 이야기한다.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면서 도리어 자녀의 영향을 받고, 주식 투자자들은 앞으로 어떤 주식이 오를까를 생각하며 매수를 결정하지만 주식의 등락은 바로 투자자들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내고, 우리의 결정으로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바로 그렇기에 미래에 대해 제한된 진술밖에 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일에 더 많이 관여하고 더 큰 영향을 끼칠수록 그 결과는 더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을 임의로 계획할수 없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대가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뇌는 미래를 내다보도록 만들어지지 않고, 프랑스 작가 폴 발레리의 말처럼 "미래를 만들어 나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가 인간의 행동을 예언할 수 없는 더 심오한 이유는 에피메니데스의 거짓말쟁이 패러독스와 같은 것, 즉 자기 연관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자유는 예측할 수 없음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스스로 정할 수도, 예언할 수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가 내린 많은 결정들은 우연한 것처럼 보인다. 자기 연관성이 초래하는 많은 결과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가 자신을 꿰뚫어볼 능력이 없다는 것이라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진화론에 따르면 자연은 우연의 결과라고 말한다. 찰스 다윈에 따르면 새로운 생명체는 유전자를 도구로 한 무작위적인 실험에서 탄생했다. 다양한 동물 및 식물종의 경쟁을 통해 비로소 어떤 생물이 살아남고 어떤 생물이 멸종할지 결정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연 역시 인간 사회처럼 불확실함과 복잡함, 자기 연관성의 문제를 진화라는 탁월한 전략을 사용해서 해결해왔다고 이야기한다.
"다윈은 자연의 다양성을 우연으로 설명한다. 어떤 생물도, 인간의 어떤 특성도, 계획에 따른 것은 없다. 진화가 무슨 일을 불러왔건 간에 목표도 의도도 없었으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겠다는 야망 같은 것은 더더욱 없었다. 중요한 건 그저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연사가 우리의 존재를 설명해줄 수 있다는 믿음은 착각이다. 어쩌다 우연히 생겨났고, 그것이 필요하거나 크게 장애가 되지 않아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밖에는 별다른 존재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특징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의 모습으로 사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파란 눈이 더 나을 것도 없고 갈색 눈이나 초록색 눈이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저자는 자연 발전과 문화 발전은 모두 결합의 작용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두 영역 모두 알려진 원료들이 놀라운 방식으로 다르게 조합되어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저자는 자연사와 문화는 한 걸음씩 전진하고, 둘 다 결과를 대부분 예측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자연과 문화 모두 목적 없이 흘러간다. 인간 개개인은 목표를 이루고자 노력하지만 전체 역사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저자는 모든 가능성과 미래의 결과가 확실하게 알려진 시대는 없었으며, 쓸모 없는 해결법이 나올 때까지 이쪽에서는 진화가, 저쪽에서는 인간이 실험한다고 말한다.
"자연이나 문화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일은 변화하는 환경과 발맞춰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충분히 실험하지 않는 자는 발전하지 못하고 민첩한 경쟁자들에게 내몰린다. 진화와 인간의 창조는 모두 엄청난 다양성으로 흘러들고 어느 곳에서도 선과 악을 찬가름하는 전능한 존재는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어떤 생물이, 어떤 아이디어가 승리할지는 경쟁만이 결정한다. 우연 없이는 진보도 없다."
저자는 우연의 제한 없는 지배를 허락하지 않는 두 가지 힘 중에서 첫 번째 힘은 새로운 것이 출현하면 그것은 경쟁 속에서 기존의 것에 대항하여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무의미한 고안품은 제거된다. 그리고 저자는 우연을 조절하는 두 번째 힘은 진화가 가진 것만으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연은 기존의 것을 다르게 조합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결코 아무 때나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으며, 우연은 그런 한계 내에서만 작용한다.
저자는 우연이 우리의 길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경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 불리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출세할 확률이 더 낮다. 하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그가 모든 장벽을 딛고 성공하는 경우에는 재능과 능력 외에 뜻밖에 동시적인 사건들이 성공에 기여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우연은 종종 약자의 편에서 싸운다는 진화와 관련한 이러한 법칙들에 관해 말한다. 그러므로 정의는 가능하면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저자는 한 인간이 성장할 때 부모의 의도보다는 우연이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며, 어른들이 잘 때닫지 못하는 아주 미미한 뉘앙스들이 아이들을 다양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 저자는 개성의 형성은 우리 의지로 조종되는 것이 아니며 학문적인 관찰로 추적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부모가 자녀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이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아이들을 보살피되 뭐든지 용납해주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밖에도 저자는 부모의 양육이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교육은 우연하게 작용한다는 뜻이다. 교육에서 우연의 비중을 인정하면서도 자녀가 잘 자라는 모습을 보는 사람은 아이의 삶의 능력을 신뢰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자녀에게 적절히 고무적인 환경을 만들어주고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를 되도록 많인 주는 것은 다이에게 단순한 재능 계발 이상의 도움이 된다. 그들을 세상에서 유일한 개성을 지닌 존재로 지켜주는 것이 바로 자녀를 존중하는 일이다."
저자는 특히 감정적으로 흥분 상태에 있을 때는 우연을 인정하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런 일에서 운명의 작용을 본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인생의 위기가 닥치면 이를 설명하려는 욕구가 강해져 자기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충격적인 일을 겪었을 때 이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더더욱 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거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목격하거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은 사람은 왜 자신은 살아남고 다른 사람은 떠났는지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불행한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답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대답은 없다. 하지만 뇌는 대답이 없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근거도 없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그 일을 되돌릴 수도, 그 일에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었음에도 말이다."
저자는 이야기의 실마리를 파악할 수 없을 때 정신적으로 반란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때로는 이성적인 설득도 소용이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일에 대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저자는 많은 사람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건을 만나면 그것을 운명이라고 믿는다고 이야기한다. 질서, 더 높은 의지가 주관한다고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 저자는 종요는 이렇듯 의미에 대한 동경이 낳은 열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수학자 존 앨런 파올로스는 불교를 제외한 세계의 모든 종교는 세계의 딱딱한 전개 과정을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번역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연법칙, 우연, 인간 행동의 복합성은 유일신 혹은 다수의 신을 위해 퇴장해버린다. 그리하여 인생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조차 더 높은 계획의 시각에서 그 의미를 획득한다."
저자는 뇌는 끊임없이 틀과 설명을 찾고, 이 과정 끝에 어떤 해석을 믿을지는 자유라고 말한다. 가까운 사람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을 경우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지만, 생명이 다한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도 있다. 전자의 시각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후자의 시각은 사람을 위로한다. 저자는 이처럼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가선에 대한 시각에 달려 있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모든 날은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우연에서가 아닌 나에게서 나온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표현처럼, 일상에서도 현실과 환상적인 해석 사이에서 선을 그을 수 있으며, 일상에서의 주인공은 우리 자신이라고 전한다.
"아이들에게는 동화가 필요하고 어른들에겐 신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삶에서 위기를 겪을 때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경험을 의미와 연관 지으려고 노력한다. 좋은 징조에 대해 기뻐하고, '운명의 눈짓'을 따르며 삶의 중요한 전환기마다 더 높은 계획이 작용했다고 믿는다.
이런 태도는 해석과 사실을 구분하고, 상상의 산물을 결정의 근거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려면 이중장부를 쓰듯이 하나의 경험을 두 가지 현실로 분류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점검 가능한 사실의 세계에 발을 딛고 사실만을 행동의 근거로 삼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해석과 환상의 영역으로 들어가 경험을 신비로운 시각으로 관찰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연이 일어나는 수많은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우연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위험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만 이에 대해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일이 매끄럽게 돌아가면 우리는 리스크를 더 이상 예상하지 않고, 주의 집중력은 거의 잠들게 되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우리는 더욱 비참한 현실을 목격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우연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려면 우리는 늘 파괴자인 우연의 존재를 염두해 두어야 하고, 약간 불안할 때가 가장 안전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때로 실수를 저지르고자 하는 용기가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복합적인 문제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무시하는 것이 종종 성공의 열쇠가 되어주기 때문에 단순한 사고만이 승산이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안이 최소한 어떤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다. 저자는 선택의 첫 번째 단계는 알맞은 기준을 정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우리가 이런 기준을 도구로 정말로 결정할 수 있을지 자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삶을 변화시키려고 하거나 변화시켜야 할 경우 작은 걸음으로 가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현대 사회처럼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회에서는 작은 걸음으로 걸으며 계속적으로 규칙을 조정해 나가는 것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예언을 통해, 신탁을 통해, 마법을 통해 더 높은 존재와 연결하여 지식의 진보를 이루려는 시도는 인간의 사고만큼 오래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성의 한계에 도전하는 이 모든 돌격 뒤에는 두 가지 모티브가 존재하며, 기분에 따라 그 중 하나가 우위를 차지한다고 이야기한다. 한 가지 모티브는 자신이 누구이며, 우리 앞에 무슨 일이 놓여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모티브는 자신의 삶을 좌지우지하려는 갓이다. 저자는 무지에 대한 반란은 우연에 대한 반항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인류는 모순적인 상황에 빠졌으며,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하고 있음에도 오늘날처럼 개개인이 그 지식에 동참하지 못하는 시대는 없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전체의 지식에서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저자는 이는 정보를 다루는 기술과 그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덕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문자의 발명으로 지식은 이야기하는 사람과는 상관없이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단순한 사회에서는 자신의 종족이 가진 모든 지식을 알 수 있었고 이런 공동체에서 우연은 인간관계에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오늘날에는 전체 지식의 상당한 부분을 인지하고 산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인생의 앞날 역시 더욱 예측할 수 없어졌다. 우리의 길을 결정하는 대부분의 일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은밀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 간의 연결이 매우 다양해지고 복잡해져서 우리에게 중요한 모든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연과 불확실함은 자유의 자식들이며, 우리가 일상의 편리함과 전염병과 기아로부터의 보호, 무엇보다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누리는 대가로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혜택은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만 누릴 수 있고, 그런 사회에서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조망 가능한 삶을 동경하는 이유는 우연이 불안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계를 이해하고 상황을 주관하고 싶은 욕구는 삶을 유쾌하게 만드는 많은 발명품을 탄생시켰으며, 예견할 수 없는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상인들이 속주머니에 성공을 부른다는 부적을 지니고 다니고, 정치인들이 점쟁이들을 찾아다니고, 심지어 아주 이성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조차 재수 없는 행동을 자제하는 등의 태도도 이런 맥락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최소한 삶의 놀라운 변화들이 사실은 하늘이 정한 운명을 따른 것이라고 믿는다. 질서는 우리를 안심시킨다. 우리 스스로는 영향을 끼칠 수 없을 때 어쨌든 하늘의 섭리가 우리를 이끈다는 생각에 안도하는 것이다."
저자는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연이 필요하고, 확신이 너무 강하면 아이디어가 배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불확실한 상태를 견뎌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우연을 영감의 원천으로 이용하는 데 복잡한 신탁을 필요하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은 자극들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우연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하고 아이디어를 풍부하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다빈치와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동시대인들보다 아는 게 더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성급한 답변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이 무심코 넘기는 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고정관념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부터 예술가들과 작가들은 긴 여행을 하면서 낯선 세계와의 만남을 추구했다. 괴테는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쇼팽은 마요르카를, 폴 클레는 튀니지를 여행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낯선 환경이 주는 자극들을 새로운 스타일을 개발하는 데 이용했다."
"우리가 우연과 자꾸만 거리를 두는 이유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뿐만 아니라 바로 눈에 보이는 이득을 붙잡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에게 불필요한 사람과 비전이 없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효율성을 추구하는 태도가 지나치면 많은 기회를 잃게 된다. 우리는 제한된 인식을 가진 존재다. 익히 아는 것에 대해서만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낯선 경험이나 낯선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순전히 선입관 때문에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우연에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은 생동감 있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저자의 글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우연은 우리에게 머릿속의 사상누각을 떠나 현실에 발을 딛도록 인도하므로 예기치 않을 일에 더 많은 여지를 허용하라는 것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모험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인식을 더 날카롭게 하고 시간에 대해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저자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