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영웅이 된 오로르 마음을 읽는 아이 오로르 3
더글라스 케네디.조안 스파르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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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영웅이 된 오로르>는 세계적인 작가 더글라스 케네디가 쓴 베스트셀러 '오로르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첫 책 <마음을 읽는 아이 오로르>는 오로르와 오로르의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고, 두 번째 책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은 오로르>는 처음으로 학교에 간 오로르의 친구 사귀기와 형사 사건 수사를 중점적으로 다췄다. 세 번째 책 <뉴욕의 영웅이 된 오로르>는 뉴욕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한층 더 긴박한 모험이 펼쳐진다. '오로르 시리즈'의 주요 주제인 다름과 두려움에 대한 유쾌한 통찰은 물론이고, 자폐인과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오로르 시리즈'는 흥미진진한 모험담과 깊은 울림을 주는 메시지로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한국과 프랑스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뉴욕의 영웅이 된 오로르>는 '오로르 시리즈' 전편에 흐르는 '다름'에 대한 다양한 울림을 전달하며 팬데믹으로 움츠러든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것에 더하여, 사회 곳곳에 만연한 차별과 편견에 일침을 가한다. '다르다'는 것은 '틀리다'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에 차별받아도 되는 사람은 없음을 강조한다.

사람들의 눈을 보고 마음을 읽는 신비한 힘을 가진 오로르는 소리 내어 말하는 대신 태블릿에 글을 써서 말한다. 오로르의 새로운 가정 교사로 온 다이안 선생님은 오로르처럼 자폐 스펙트럼 안에 있는 스물세 살의 여성으로 오로르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눈치채지만 그 비밀을 지켜 주려 한다. 어느 날 다이안 선생님이 오로르를 찾아와, 자폐 아동으로 자라면서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강연 요청을 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책에서 다이안 선생님과 함께 뉴욕으로 간 오로르가 바비라는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바비의 새엄마 저니나가 돈벌이에 눈이 멀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막으려고 고군분투하며 활약하는 과정을 만나볼 수 있어 인상적이다.

"그래, 루이는 토끼의 왕이야. 아주 똑똑해. 내가 아주 외롭고 사람들이 다 나를 이상하다고 말할 때, 루이는 남다른 거, 이상한 것도 멋지다고 나한테 말했어. 예술적인 사람이나 남다른 사람은 '이상하다'는 말을 들어, 그리고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이상하다'고 말해."

이 책에서 성소수자인 다이앤 선생님에 대해서 오로르의 부모님이 차별과 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오로르의 아빠는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고, 남자가 같은 남자를 사랑한다고 해서 범죄자 취급을 받는 건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말한다.

"오로르 어머님 아버님은 아주 멋진 분들이세요.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아시네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무도 차별받지 않고 모두가 평등해야 해요. 오로르, 오늘 새로운 단어를 배우네. '차별'과 '평등'."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오로르가 뉴욕에서 만난 기사 살 아저씨가 오로르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오로르가 말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더라도 오로르한테는 오로르만 낼 수 있는 목소리가 확실히 있어. 그리고 우리는 틀림없이 좋은 친구가 될 거야."

이 책에서 참깨 세상에 다녀온 오로르가 아주 차분해지고, 힘든 세상에서 겪는 온갖 문제에 맞설 기운이 생기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오로르는 참깨 세상에 가면 자신이 말도 할 수 있고 정말 좋은 친구도 있고 문제나 걱정을 짊어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른 사람한테 화내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오로르가 언니를 향해 "우리는 자신을 믿어야 해. 닥쳐오는 어려움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을 믿는 것뿐이야."는 작가 더글라스 케네디가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이 책의 핵심 메시지가 아닐까? <뉴욕의 영웅이 된 오로르>는 우리는 각자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모두가 특별하다는 것을 전하는 책으로 여운을 남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프랑스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시사만화가인 조안 스파르의 그림을 만나볼 수 있어 흥미롭다.

"내 태블릿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세상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내 태블릿 덕분에 나는 많은 사람과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내 태블릿 덕분에 나는 내일 연설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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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 모음 2023.봄 - 56호
자음과모음 편집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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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를 맞는 계간 <자음과모음>에서는 '목소리'를 키워드로 삼아 마지막 게스트 에디터로 돌기민 소설가를 모셨다. 이번 기획에서 돌기민 소설가는 '물리적인 현상으로서의 목고리, 타인의 목소리를 어떻게 감각하며 목소리와 관계 맺는지에 관해 묻는다. 목소리는 젠더(혹은 지정성별), 세대(나이), 출신지(사투리), 계급, 건강 상태, 장애 유무, 감정, 목소리를 전하는 대상과의 친밀도, 발성 연습 등 폭넓은 사회적 조건과 의미가 달라붙는 한편, 몸과 떼어놓을 수 없는 신체적인 현상이고 수많은 상호작용의 현장에서 함께하지만 말의 내용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번 게스트 에디터 지면은 각기 다른 목소리에 주목하여 일곱 명의 필자들과 함께하였다. 언젠가 팟캐스트를 하고 싶은 작가 김괜저, 여성, 엄마, 기획자라는 세 가지의 정체성을 지닌 김다은, 감정사회학 연구자 김신식, 하루 종일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듣는 이다울, 소설가 정용준,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활동가 최태규, 구술생애사 작가인 최현숙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책에서 소설가 정용준의 '내게 없는 내 목소리'라는 제목의 글이 눈길을 끈다. 정용준은 어린 시절 동생의 죽음 후 목소리가 없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건넨다. 정용준은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 자신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됐고 엄마는 사람들에게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됐다고 말한다. 정용준은 이제 거의 더듬지 않고 말도 잘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더는 아이가 아니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가 가져간 많은 기억과 생각과 언어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한편으론 고맙지만 한편으로 서운한 이제는 내 것이 아닌 내 목소리에 관한 쓸쓸함에 대해 말한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시간을 자주 생각해본다. 깊은 물속에 무엇이 살고 있나 싶어 오래도록 물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기어이 물그림자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사람처럼. 나는 내 기억의 동공과 말 없는 말과 내게서 떠나간 목소리를 자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이 떠오른다. 엄마는 그것이 허구라고 했고 아빠는 그것을 착각이라고 했고 죽은 동생은 그것을 부정했으며 목소리는 그것에 관해 끝까지 침묵했다. 나는 알면서 모르고, 보면서 볼 수 없다. 이제 나는 이 이유를 안다. 목소리. 그가 내게서 떠나갔을 때, 떠나기로 결심했을 대, 내 기억도, 기억에 붙어 무럭무럭 자라나야 했을 여러 감정과 감각도, 함께 데려간 것이다."

"어떤 이의 목소리를 들을 때 종종 복잡한 감정과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건 목소리에는 몸이 있고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듣기가 아닌 보기. 보기를 넘어선 만지기. 목소리를 들으면 그의 표정이 떠오른다. 목소리를 혼의 얼굴, 말은 백의 영역, 그러니까 어떤 노래를 들었을 때 혼이 실렸다는 하는 것은 비유가 아니다. 얼굴에서는 찾을 수 없는 얼굴, 표정에서는 볼 수 없는 표정, 목소리에서는 찾고 발견할 수 있다. 목소리에 실린 감정. 피의 온도. 어제의 일기. 오늘의 예감과 예상. 그가 걸어온 길의 풍경과 머리 위 하늘과 구름과 바람. 목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이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그가 말하지 않은 말을 들을 수 있다."

이 책에서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활동가 최태규의 '애써 들어야 설핏 들리는 목소리'라는 제목의 글이 흥미롭다. 최태규는 곰을 돌보는 작업은 조용한 동물들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이해하는 동시에, 우리의 목소리를 곰에게 이해시키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최태규는 인간처럼 체계화된 언어를 갖지 않는 동물들에게 목소리는 몸의 각 기관을 이용해 낼 수 있는 소리의 일부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전혀 다른 목소리를 가진 곰들이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다는 희망을 갖으며, 곰들이 의도하지 않은 목소리까지 들어야 할 책임도 있는 것 같다는 최태규의 말이 인상적이다.

"곰이 목소리를 낼 때의 감정을 '다급할 때'라고 묶는다면, 그 외의 일상에서는 목소리를 쓰지 않는다. 소리보다 냄새로 신호를 남기면 더 긴 시간 동안 많은 대상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 소리는 효율이 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곰이 조용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쉴 새 없이 떠드는 인간이나, 인간에게 호소하는 것이 생존에 중요한 개나 고양이, 소, 닭과 같은 동물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 같다. 혹은 인구밀도가 급격하게 높아진 한국에서 대부분의 포유동물이 몰살당하고, 새들만 가까스로 남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새는 일상적 의사소통에 목소리가 중요하다. 결국 우리 주변엔 목소리를 내는 동물들 위주로 남았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 동물들은 존재한다고 여기지도 않고 도시를 만들었다. 곰도 그렇게 사라졌던 동물이다."

이 책에서 황시운의 '엄마의 집'이라는 제목의 글이 깊은 여운을 전한다. 황시운은 산책을 하다가 난간이 없는 작은 다리에서 추락하여 평생 신경병증성 통증을 앓게 되었고, 만에 하나의 사고로라도 떨어지지 않을 곳으로 1층의 집을 얻어 이사를 했던 엄마의 집에 대해 이야기한다. 황시운은 난독으로 놓쳤던 글을 되찾아준 엄마의 집에서라면 다시 추락할 위험 없이 안전하다고 말한다. 느릴지언정 읽고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나 역시 언젠가는 하나의 세계를 갖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황시운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놀랍게도 글을 되찾고 싶다고 생각하자 살고 싶어졌다. 뜻하지 않게 치료 의지라는 게 생긴 셈이었다. 잃어버린 몸을 되찾는 것은 포기했지만, 글마저 영영 놓쳐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설령 죽더라도 글을 잃은 채 죽고 싶지는 않았다. 우선은 침대에서 벗어나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휠체어로 옮겨 앉는 시간을 조금씩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휠체어로 옮겨 앉는 게 가능한 시간 동안에는 책상 앞을 지켰다. 틈틈이 집 밖으로 나가 햇볕을 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래된 아파트는 온종일 고요에 잠겨 있었고 간혹 내려앉는 새들과 나른한 고양이들만이 그 시간 속의 나를 지켜봐 주었다."

"다시 글을 읽는 게 가능해졌던 순간을 기억한다. 고마운 선배가 보내준 <달팽이 안단테>라는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바로 어제까지도 파사삭 부서지며 흩어졌던 글자들이 어느 순간 머릿속에 들어와 의미를 품은 채 조금씩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물론 처음부터 매끄러웠던 것은 아니다. 나는 며칠에 걸쳐 간신히 그 책을 완독한 후 감격에 겨워 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처방해준 약을 꾸준히 먹은 덕일 수도, 가능하면 자주 햇볕 아래 있으려 했던 노력일 수도, 끝도 없이 반복했던 맥락 없는 단어들의 나열 덕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 동안 나는 나무가 우거져 빛이 잘 들지 않지만 결코 추락하지는 않을 엄마의 집에 있었다. 나는 사고 이후 모든 순간 나와 함께했던 엄마의 강박에 가까운 돌봄과 엄마와 내가 떠난 빈집에서 혼자 생활비와 병원비를 감당하며 조용히 병들어갔던 아빠의 희생이 어떤 순간에도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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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된 고통 - 현대 의학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고유하고 다양한 아픈 몸들의 인류학
이기병 지음 / 아몬드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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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전용노동자전용의원 환자들의 삶과 연결된 고통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책으로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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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된 고통 - 현대 의학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고유하고 다양한 아픈 몸들의 인류학
이기병 지음 / 아몬드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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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과 의사 이기병은 공중보건의 시절, 3년간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이하 외노의원)에서 근무했다. 전문의 수련을 막 마치고 나온 의사로서 그는 그곳에서 다양하고 고유한 아픈 몸들을 만나며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을 실감한다. 그때의 그 고단함과 좌충우돌했던 분투를 그저 '미숙'의 결과로만 생각하기엔 갑갑함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 더 나은 진료와 돌봄을 제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민을 안고 있던 그는 마침내, 인류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만난다.

<연결된 고통>은 현직 내과 전문의이자 의료인류학 연구자 이기병이 외노의원에서 만났던 환자들과 씨름하며 겪었던 희로애락을 담은 책이다. 건강과 불건강, 몸과 마음, 삶과 죽음, 나와 너로 구분되는 이분법의 시대에 이 책은 의학이라는 단일의 카테고리에 포섭될 수 없는 아픈 몸들을 인류학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복원한다. 외노의원이 이제 폐원(2004-2007)하여 역사로만 남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외노의원과 그곳에 다녀간 이국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최초의, 유일한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1장 갑상선 호르몽의 진실 : 재현의 목적은 본질의 장악에 있다, 2장 술과 심부전 : 돌아올 수 없는 강은 한 번에 건너는 것이 아니다, 3장 어느 HIV 청년과 약혼자 : 낙인이 치료에 미치는 영향, 4장 옴과 헤테로토피아 : 그들에게 쉼터는 장소 바깥에 있는 장소였다, 5장 요통, 변비 그리고 실신 : 좋은 의료란 무엇인가, 6장 질병이나 죽음은 형벌인까 :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유일한 진실, 고통에 관하여, 7장 고통의 이분법 : 몸과 마음 사이의 간극과 관계에 대하여'라는 7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외노의원에서 만났던 50대 초반의 몽골계 중국인 환자와의 기억을 소환하며, 자신이 진료실에서 간과했던 환자의 이야기에 대해 고백한다. 저자는 과거 어머니와 환자의 오랜 유대 속에서 형성된 질환 서사 중에서도 고되고 힘든 기억으로 점철된 그 몸의 감각이 결국 환자를 구했고, 이제 그것은 그 자신의 이야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의학이 환자의 질환 서사를 제외한 채 깔끔하게 통제되고 압축된 정보로 재단된 몸만을 다룬하면 그것은 인간의 삶 전체에서 상당한 부분을 스스로 소외시키는 것이며, 그것은 의학의 무능을 스스로 입증하는 셈이라고 이야기라고 강조한다. 이밖에도 저자는 환자가 몸의 증상이나 감정을 통해 무엇인가를 고통스럽게 재현해내고 있다면, 그것이 그 고통의 본질을 관통하고자 하는 몸의 의도가 아닌지를, 또 그 의도를 둘러싼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이 치료자가 제일 먼저 할 일이라고 말한다. 질환 서사는 현대 의학의 거대한 패러다임과 코드화된 카테고리 속에 갇혀버린 몸의 목소리를 환자에게 되돌려주는 '재현'과 같다는 저자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진단 및 치료의 알고리즘은 의학이 발전할수록 점점 더 세분화되고 복잡해졌다. 물론 알고리즘이 정교할수록 진단 및 치료의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확도나 속도, 효과와 효율이 강조될수록 인간의 삶이 '질병 코드'로 암호화되면서 고통이나 증상을 통해 아픈 몸이 말하고자 했던 목소리가 검열, 절삭되어 결국 일개 디지털 부호로 납작해진다는 사실은 은폐된다. 이렇게 현대 의학의 그릇에 다 담기지 않는 아픈 몸의 이야기, 즉 질환 서사 속에는 가난, 노동, 성차별,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적 고통 등의 문제가 거의 언제나 상존한다."

"질환을 가진 삶은 분명 고통스러운 면이 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는 가족도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는다. 환자는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누리던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며 결코 원하지 않던 무엇인가를 떠안는다. 그러나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그 교환의 관계가 지속되며 그는 질병이나 아픔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어쩌면 이런 방식이 삶에 주어진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또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외노의원에서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심부전이라는 질환을 앓고 있는 네팔인 남성의 이야기를 전한다. 저자는 '외국인노동자'인 네팔 남성에게 주어진 진단명인 '알코올중독'을 듣는 순간, 모종의 경계와 위협, 나태한 일상, 사회적 비용이나 잠재적 폭력 등을 상상했다면 의료화된 질병에 붙여진 은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것이 그를 집단 치료인 알코올 자조 모임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든 보이지 않은 배제의 힘이고, 동시에 그를 해고한 고용주가 느꼈을 불안의 명확치 않은 근원이며, 그가 의학적 위기의 순간에도 입원 치료를 선택하지 못하게 만드는 고용 불안의 동력이자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더더욱 고립된 그가 금단 증상과 불안, 고통 속에서 음주의 유혹에 다시 굴복하게 만드는 최후의 타격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힘든 인생 여정에서 벗어나 가까스로 안식의 길에 접더든 그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혼자서 한 번에 건넌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인간은 그 누구도 섬이 아니기 때문에 혼자서만 감당해야 하는 선택이란 사실상 허구이며, 다른 환경이었다면, 그 어떤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면, 조건이 달랐다면 당연히 결과는 달라졌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의료화는 일상을 건강과 불건강의 의료적 언어로 재편하는 사회, 문화적 제도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코드화된 질병과, 개별 사회의 고유한 문화 속에서 형성된 상징과 은유가 유착된다. '의료화' 시대에는 서로 밀착되어 있는 '은유'와 '질병'을 서로에게서 떼어내는 작업이 한층 더 어렵고 요원해진다. 예전에는 단순히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을 의미했을 '과체중'이 건강에 유의해야할 잠재적 지표 정도로써의 의미를 넘어 운동 부족, 게으름, 자기 관리 실패 등의 은유와 유착되며 운동이나 식단으로 치료해야 할 질병이 되어 버린 것이 비근한 예다."

"그의 알코올중독, 그리고 그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을 심부전을 일으킨 '선택'은 오롯이 그의 몫이었을가. 그가 외국인 이주 노동자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가족에게조차 힘들다는 말을 제대로 못하도록 만든 성장 배경은 그의 잘못이 아니지 않는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삶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네팔인 직장 동료들과의 민족적 알력과 수적 열세, 하급 카스트가 만드는 보이지 않는 차별과 구조적 고통은 과연 그에게 어떤 '책임'을 요구할 수 있을까."

저자는 외국인노동자 쉼터에서 옴이 퍼져나간 사건 후 쉼터에 남고자 하려는 조선족 동포들의 이야기를 건넨다. 저자는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가 그의 책 <비장소>에서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을 "비장소"라고 일컬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미셸 푸코가 장소에 관한 기존의 논의가 '안'의 장소성에만 집중해온 것과 다르게 '바깥'에도 장소성을 부여하면서 안과 밖을 아우르는 새롭고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관계'에 주목했고, 그 다양한 배치를 일으키는 안과 밖의 관계들 중 특수한 몇 가지 장소 유형 중 하나인 '헤테로토피'에 관해 이야기한 내용을 소개한다. '헤테로토피아'라고 호명한 공간은 "실제로 위치를 한정할 수 있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다. 저자는 그들에게 쉼터는 '다른 장소 밖에 존재하는 장소', 즉 헤테로포피아라고 말한다.

"나는 쉼터에 남고자 결정했던 일곱 명의 조선족 동포들이 쉼터에서 일종의 '헤테로토피아'를 경험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물리적으로 대한민국 서울의 가리봉동 이주 노동자 쉼터와 중국 연길의 서시상 노점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겪은 20분간의 이질감은 그것이 마법처럼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전통적인 시간은 대한민국 이주 노동자의 현실에서 흐른다. 그들은 이주 노동자로서 차가운 일터이자 때로는 적대적이고 이질적인 외부 환경인 대한민국에서 적응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쉼터에서는 시간이 바깥과는 전혀 다르게 작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기억을 공유하며 함께 울고 웃으며, 쉼터에 처음 입소할 때 교육받은 규율과 부자유의 초기 외압을 극복한 뒤에는 더 이상 적응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시공간은 외부와의 일시적 단절을 통해 기능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쉼터는 주변의 다른 '장소'들로부터 '비장소'로 고립되어 있기도 하고 옴이 유행하면서 감염 지역으로 한 번 더 고립되었다. 그러면서도 그 고강은 폐쇄의 위협 속에서도 입소하거나 체류하고자 하는 구성원들에 의해 열림의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쉼터는 다른 장소 안으로 포섭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장소로써 저 바깥에 있지 않다."

"나는 푸코가 말한 대로 헤테로토피아가 쉼터가 나머지 모든 장소들에 제기하는 '이의'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소는 안과 밖을, 성원권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나누는 개념이다. 쉼터는 기존의 장소 개념에 이렇게 도전한다.

곡 나눠야 하는 것이냐고. 같이 들어가 함께 둘러앉으면 안 되는 것이냐고.

우리는 장소로 나타나는 성원권을 통해 '환대'를 선택할 수도, 그 반대편을 선택할 수도 있다. 헤테로토피아로써 쉼터는 우리에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낯선 이들을 '낯설지 않게' 보고자 함께 둘러앉다 보면 우리에게 익숙했던 장소와 그 경계가 오히려 다소 '낯설게' 보이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개닫지 못했던 사이 우리의 공간에 침투해 있는 '헤테로토피아'를 불현듯 마주하게 되는 그런 신비한 경험의 순간들 말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40대 후반의 태국인 중년 남성이 요통과 변비, 그리고 실신을 경험했던 이야기를 독자에게 건네어 눈길을 끈다. 저자는 파편화된 질병의 단면이 아니라 다중적인 욕구와 고통을 지닌 환자 그 자체를 '돌보려고' 하는 의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좋은 의료란 결국 다름 아님 '돌봄'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오늘날 환자들이 자본과 결합한 의료 시장에서 선택의 폭이 넓어진 의료를 누리고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선택이 신중하게 조율된 전문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환자와의 교감이나 심층적인 이해 없이 파편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혜택이 아니라 재앙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심장병은 달리 바꿀 수 없는 생물학적인 요인이라고 해도 실신과 급사의 위험을 증가시킨 요소는 다분히 사회, 문화적인 것이다. 그의 변비는 타국으로 이주해 그동안 먹은 적 없던 그 나라의 음식을 먹어야만 하는 데서 기인했다. 그가 발살바 기법을 자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외국인노동자로서 무거운 이삿짐을 나르다 허리를 다쳤기 때문이었다. 소변을 참기 위한 탈수가 자주 일어나는 직업적 고초를 포함해서 그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하나하나 수집하듯 위험 요소를 자신의 삶에 배치하는 행위를 하게 되었던 셈이다."

"지속가능한 돌봄 의료를 진작시키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사이에 신뢰가 전제되어야 하고, 동시에 보건 의료 정책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 사회 전반에서 돌봄을 주제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하고 신체와 질병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

저자는 우리 삶과 질병을 재단해온 '이분법'이 고통을 줄이는지 아니면 되레 부추기는지는 끈질기게 응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고통은 겹겹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몸과 마음, 삶과 죽음, 자아와 타자, 개인과 사회의 고통이 모두 그러하다고 이야기한다. 누군가에 의해 함부로 재단되어 목소리를 잃은 고통이 언젠가 나와 당신의 것일 수 있다는 저자의 글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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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블레이크, 마음을 말하면 세상이 나에게 온다 - 윌리엄 블레이크 시와 아포리즘 마음으로 읽는 클래식 시리즈 1
윌리엄 블레이크 지음, 김천봉 편역 / 아이콤마(주)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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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블레이크의 다양한 시를 만나볼 수 있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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