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테라피 - 마음을 치유하는 영화
모경자 지음 / 하움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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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시네마 테라피>의 저자 모경자는 '시네마 테라피'는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 문화까지 영화에서 보며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존 이념과 개념들을 현실의 내 문제와 결부해서 새로운 해석으로 나올 때만 확장될 수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닌 마음 작용의 원리와 이해라는 것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함께하는 친구들과 스토리텔링으로 쉽게 나누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이 책은 가족, 사랑, 만남, 독립, 중독이라는 소재들의 영화를 챕터별로 나누어 마음을 치유하는 영화들에 관한 이야기를 건넨다.



저자는 영화 <일요일의 병>을 소개하며 인간은 살면서 외면하고 싶고 가리고 싶은 부분들, 어쩌면 버렸을 수도 있는 부분들이 있으며, 상처로 얼룩진 자존감, 열등감, 수치심, 상실, 실연 등을 동굴에 숨긴 채 열심히 살지만 가슴은 늘 허전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영화 <일요일의 병>에서 엄마 아나벨이 동굴 앞에서 "거기 누구 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동굴 안에 숨어 있는 자신을 부르는 듯하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딸과 함께하는 10일 동안 자신이 버리고 떠난 삶과 화해하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되는 깊은 여운의 장면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일요일은 주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지만, 영화 제목에 등장하는 일요일은 딸 키아라에게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고 미워하기도 한 엄마와 화해하고 이별하는 날이라고 이야기하여 눈길을 끈다.

"43세인 주인공 키아라는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집을 떠날 때 바라봤던 창문에 오늘도 걸터앉아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8살짜리였던 키아라에게 엄마가 집을 떠나기 전 화장을 했던 그 화장품들이 어디에 어떻게 널브러져 있었는지 그날, 그 시간의 장면은 정지되어 있었다. 자신의 지병으로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게 된 키아라는 마지막 시간을 엄마와 함께 10일 동안 있기를 원해 엄마를 찾아간다."

저자는 영화 <어느 날 인생이 엉켰다>를 통해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 진심인지를 진지하게 물으며 나아갈 때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를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 <어느 날 인생이 엉켰다>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흑인 여성의 머리는 곱슬머리가 아닌 긴 머리로 잘 관리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란 바이올렛이 약혼자가 떠나게 되면서 홧김에 머리를 확 밀어 버리고 자신의 삶이 뭔가 엉켰다는 것을 발견하고 풀어 나가는 통쾌한 이야기다. 특히, 영화 <어느 날 인생이 엉켰다>의 주인공 바이올렛의 열등감과 수치심이 그녀의 엄마로부터 이어 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10살이 되는 해 아빠 회사 야유회에 갔던 날, 내 머리가 쭈글쭈글하다고 애들이 비웃어서 부끄러워 풀에 들어갔을 때, 그때 엄마가 날 끌어내서 차에 밀어 넣고 집으로 갔어요. 엄마가 그냥 날 안아 주며 그래도 예쁘다고 했다면 난 지금 어떤 사람일까요?"라고 엄마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말한 바이올렛의 진심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세월이 조금 지나면 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그저 '나'이다. 서로 관계하며 도우며 사는 것이지, 상대는 내가 원하는 만큼 나의 필요와 상처를 다 해결해 주지 못한다. 상대들에게 이것을 많이 요구하고 바랄수록 나는 감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고 그때부터 상대를 미워하며 내가 만든 고통의 우주 속에서 헤맨다."

저자는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소개하며 수학적 사고에 입각한 '사실'을 보고 그 바탕 위에 내 생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사람들은 사실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으려 하고 남들과 비교하며 살면 상대적 박탈감과 기대치에 시달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타고난 성향과 재능과 기질이 다 다른 우리는 다 의미가 있고 소중한 인생이며, 경쟁 사회라는 거대한 물살 속에서 수학적 사고인 '사실과 생각'의 구별을 꾸준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하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삶은 남들이 제시하는 길을 가거나 쉽게 가는 길을 조금도 의심 없이 결과만 보고 따라가기 쉽다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의 등장 인물인 학성의 말처럼 몸으로 직접 부대끼며 이해해야만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경험이 자신의 숭고함을 증명할 수 있고, 이때만 정직한 힘이 살아난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수학은 정해진 답이 있다.

이 세상 온 우주 만물도 정확한 법칙과 순리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다.

별과 달, 밤과 낮, 남과 여, 죽음과 탄생 등...... 사계절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계의 질서는 수학의 공식처럼 정확하고 명확하다. 인간의 생각과 욕심만 복잡하고 답이 없을 뿐이다."

저자는 괴팍한 할아버지 세인트 빈센트, 우리 안의 빛과 그림자를 만나게 하는 영화 <세인트 빈센트>를 소개하며 스위스의 정신 분석학자 칼 융이 페르소나와 그림자로 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이 인상적이다. 칼 융은 "인간의 영혼 안에는 사회와 타인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만들어진 모습을 페르소나라 하고 자아가 의식적으로 거절한 감춰진 부분을 그림자"라고 말하며, 이 두 개의 행동이 만날 때 비로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시네마 테라피는 우리 안에 있는 페르소나, 빛과 그림자들을 유머로 수용하며 만나 주며, 고백하며 웃을 때 공감하며 떨어져 나가는 것을 경험한다고 이야기한다.

"사람은 한 가지 면만 있지 않다. 누구나 내면에 빛과 그림자의 모습이 다 있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인가 하면 또 누군가에게는 안 좋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다 좋은 면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 나쁜 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 자신들만의 모습 속에서 들키지만 않을 뿐, 이상한 부분들이 다 있다. 개인의 기질, 습관, 기호, 취미, 성향 등 타인들에게 다 보이지 않은 특정한 어떤 부분들이 다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나 자신만 해도 그렇고 상대들도 그렇다.

어느 날 상대들의 그 이상한 행동들을 알게 되면 당황스럽다며 "의외네~"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인간이다."

저자는 전쟁으로 인생을 다 통제받고 그 환경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 내며 목숨 걸고 무엇을 했던 것이 아닌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온 힘을 다해 살아남은 슈필만(슈만)의 실화를 담은 영화 <피아니스트>를 소개한다. 저자는 영화 <피아니스트>를 통해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고 이야기하며, 주인공 슈필만은 전쟁 전에 잘 나가던 피아니스트였고 폴란드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지적이고, 경제적인 부분으로도 남부럽지 않은 예술가였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의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어떤 가치와 이념, 철학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살아 내야만 하는 것이 삶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질 만능 시대에 타인들과 나를 비교하여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거나 이 세상 기준의 잣대로만 보는 의미가 아닌 진정한 의미로 보는 '나'는 나이고 나의 삶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의 삶이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삶'이다.

삶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꿈이 없어도 괜찮고 돈이 없어도 괜찮고 몸이 아파도, 실패와 좌절을 해도 괜찮다.

무엇을 해야만, 업적을 일궈야만 의미 있고 성공한 삶이 아니다. 그저 그 자체, 나의 삶이 목적이기에... 그래서 생명이 귀하고 사람이 귀한 것이다.

이렇게 목적을 갖고 이 땅에 온 우리는 어마어마한 별들이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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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서울을 걷는다 - 제10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
허남설 지음 / 글항아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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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재개발이라는 어두운 이면을 들여다보는 책으로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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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서울을 걷는다 - 제10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
허남설 지음 / 글항아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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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못생긴 서울을 걷는다>는 현직 일간지 기자인 저자 허남설이 서울이라는 도시의 못생긴 곳들을 직접 걷고 찍고 주민들을 만나서 깊숙이 들여다본 우리 시대 도시의 자화상을 담은 에세이다. 저자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중계동의 '백사마을' ,경사도가 60~70도에 이르는 가파른 골목길이 회오리치는 다산동 주택 밀집 지역, 정화조가 없는 집들이 많아 똥냄새가 진동하고, 불이 나도 골목이 좁아 소방차가 진입할 수 없는 창신동, 비행기 빼고는 다 만들어낸다는 기술 장인들이 몰려 있는 청계천 인근과 세운상가 등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못생긴' 서울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건넨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른바 '못생긴' 서울은 살기에 불편하고, 소음을 유발하며, 미관상 좋지 않은 삼박자를 갖춘 '재개발'의 이슈를 품고 있는 공간들이다. 말이 재개발이지 그것에 착수하는 순간 벽에 부딪히게 되고, 끝내 재개발 계획이 백지화되거나 유야무야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도시는 '못생긴' 부분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재개발이라는 경제논리로는 넘어설 수 없는 도시의 오래된 생태 논리를 저자는 직접 발품을 팔아 찾아다닌다.



저자는 백사마을 주거지보전사업은 오랜 승패의 역사를 한번 뒤집어보고자 했는데, 결국 패색이 완연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원주민 세입자의 재정착, 이웃 공동체를 담아냈던 공간의 재현 따위는 정책에서 우선적인 지위를 얻어내지 못했다. 저자는 앞서는 건 오로지 토지주의 비용을 더 절감하기 위한 분양주택 확대, 그리고 자산 가치를 더 높여줄 대단지 아파트로의 전환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아파트가 양적 논리뿐만 아니라 질적 논리까지 점유한 주거 유형으로, 모든 재개발이 대단지 아파트로 귀결되는 게 논리적으로 마땅해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서울 곳곳에서 이 논리적 귀결의 맹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곳에서는 동네를 완전히 허물고 아파트를 짓는 재개발이 세입자는 말할 것도 없고 토지주가 치러야 할 비용까지 막대하게 물린다. 그런 곳에서는 모두가 패자가 되고 만다. 또한 저자는 재개발하는 곳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사회와 이 사회를 지탱하는 제도 전반에도 패배의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재개발은 '덩치'를 키우는 방향으로 진화했고, 그 결과가 지금 1만 세대까지 불어난 대단지 아파트라고 말한다. 재개발의 진화를 이러한 방향으로 이끈 유전자는 '비용'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재개발의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려준다고 이야기한다. 당장 재개발해야 할 것 같은 허름하고 조그만 집들에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복작복작 모여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대부분 소유주가 아니라 세입자이다.

저자는 우리는 도시에서 산동네, 달동네가 흉물스럽다며 파괴한 결과, 도시 구석구석으로 침투한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을 걱정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산동네를 모두 밀어서 아파트로 만든다고 해도 3~4인 가족이 저렴한 가격에 집을 구할 수 없다. 저자는 재개발이라는 이유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살 만한 집을 자꾸 도시에서 내몬 것은 아닌지, 그래서 사람이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그들을 내몬 것은 아닌지, 한번 되짚어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낡고 불편한 동네는 낡고 불편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저렴하고, 그런 곳을 무분별하게 개발하는 건 어떤 사람들이 간절하게 찾는 집을 없애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과 이들의 노동력이 필요한 도시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한 동네에 모여 사는 사람들끼지 자원을 주고받으며 이뤘던 공동체 역시 무너진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현대에도 '최소한의 공동체'는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제도가 아무리 잘 갖춰져 있더라도 사람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그리고 잘 만든 제도에도 항상 빈틈은 있기 마련이다. 저자는 누군가에게는 불필요해보이는 '간섭'이 어느 순간에는 어느 누군가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관심'이 될 수 있으며, 그 관심이 체계적으로 잘 조직되면 공동체를 지키는 '사회안전망'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개발의 덩치를 한껏 키우면서도 속도는 재촉해 내재한 문제를 단기간에 폭발시켰다고 말한다. 저자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 같은 큰 땅덩어리를 단기간에 개조할 수 있다는 환상,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에는 실물경제를 구성하는 산업과 종사자들이 있습니다. 8000개의 사업체와 여기에 엮인 협력업체들, 2만 명의 종사자와 이들에게 의존하는 가족들을 고려하면 그 산업은 결코 작은 규모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서로 일감과 자원을 주고받는 산업 생태계의 특성을 고려하면, 10만 평 땅에 집적된 산업체를 다른 어딘가로 고스란히 옮기는 일도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산업을 불과 몇 년 만에 일소하는 개발 계획은 애초 성립할 수 없다고 보는 게 현실적인 판단입니다. 또 세운재정비촉진지구는 축구장 40개만 한 공간인데,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개발 속도전을 지향했고, 결과적으로 스스로 스텝이 꼬여 무참히 실패했습니다."

저자는 누군가 보기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못생긴 구도심과 산동네의 풍경, 거기에는 그 나름의 복잡한 맥락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공공의 책무는 그 맥락을 최대한 존중하며 문제를 풀어가는 법을 설계하는 것이지, 앞장서 무시하고 파괴하라고 선동하는 것이 아니며, 도지는 백지가 아니라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책 <못생긴 서울을 걷는다>의 저자는 이제는 거리에 서야 하며, 거리에서 조감도가 아닌 투시도의 시선으로 도시를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보기에 썩 만족스럽지 않은 못생긴 도시가 다양한 삶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모든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저자는 보존할 대상은 천막이나 지붕 같은 게 아니라 바로 그런 삶이며, 그 삶을 보존하는 일이 슬레이트 지붕이나 타이어 올린 천막을 지키는 일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며, 그것이 공공의 책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어떤 때는 못생긴 도시가 누군가의 삶을 지키는 집이 되어주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누구나 빛나고 아름다운 도시를 꿈꾸겠지만, 도시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그 안에는 아름답지 않은, 못생긴 부분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낡고, 긁히고, 부서지고, 심지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곳이 서울에는 아직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 못생김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고민할 때,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조감도의 시선에서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구경꾼밖에 될 수가 없습니다. 구경꾼은 이미 기울어진 쪽에 서서 기울기를 한층 더 가파르게 만드는 데 일조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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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에 갇힌 사람들 - 화면 중독의 시대, 나를 지키는 심리적 면역력 되찾기
니컬러스 카다라스 지음, 정미진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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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중독에 갇힌 현대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으로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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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에 갇힌 사람들 - 화면 중독의 시대, 나를 지키는 심리적 면역력 되찾기
니컬러스 카다라스 지음, 정미진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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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울증, 외로움, 불안, 약물 중독, 증오 범죄, 자살 등 나날이 최악을 경신하는 정신 건강 위기를 겪고 있다. '비대면'을 권장하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이러한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현실이 아닌 화면에 몰입하며 전에 없던 '틱톡 투레트 증후군'이 퍼지고, 가짜 경계선 성격 장애가 관찰된다. 알고리즘으로 인해 편견이 강화되며 여기저기서 극단적 대립과 폭력이 난무하고, 중독과 자살로 인한 '절망사'도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무엇이 우리의 정신 건강을 위협하는 것일까?

미국 최고의 중독 치료 전문가 니컬러스 카다라스 박사는 책 <손 안에 갇힌 사람들>에서 기술에 대한 집착과 소셜 미디어가 특히 청소년과 젊은 성인에게 끼치는 해로운 영향에 대해 설명한다. 우리가 디지털 기기에 미치게 되면서 기기는 우리를 점점 더 미치게 만들고 있다.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인스타그램, 틱톡, 구글의 검색 알고리즘 등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회사의 수익을 위해 극단적인 감정, 의존성, 우울감을 유발하여 사용자를 정적인 고립으로 이끌도록 설계되오 있다. 이러한 플랫폼한 또한 사용자의 사고방식과 정보 처리 방식을 흑백의 이분법적 구조로 단순화한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으로 인해 양극화된 사고는 정치와 우리 사회에 갈등과 분열을 일으킨다. 이 책은 이처럼 탐욕과 오만에 사로잡힌 빅테크의 '신테크노크라트'에 의해 조종당하여, 소셜 미디어에 집착하며 현실 속 진짜 관계와 단절되어 살아가는 화면 중독 시대에 대한 통렬한 진단과 해법을 이야기하여 인상적이다.

이 책은 '1장 매트릭스에 중독된 세상, 2장 몰입할수록, 단절된다, 3장 소셜 미디어 팬데믹, 4장 번져 가는 폭력, 5장 디지털 꾀병, 6장 전지전능한 기술의 시대, 6장 독잠 디스토피아, 8장 신이 되려는 자들이 꾸는 꿈, 9장 중독자의 고백, 10장 회복력 빈곤 시대의 진정한 치료, 11장 철학자 전사'라는 11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정신 건강을 해치는 기술 중독은 디지털 세뇌와 행동 수정으로도 이어진다.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감금하거나 두려움을 자극해 권력에 순응하도록 강제할 수 있었을 뿐인 이전의 독재 정권들과 달리, 이제는 소수의 사람들이 한때 자유 사회의 성역으로 여겨졌던 인간의 사고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구소련의 글라크에서 나치 강제 수용소에 이르기까지 전체주의적 탄압이 가장 심했던 때에도 독제자들은 죄수들의 몸은 망가뜨릴 수 있어도 마음까지 지배할 순 없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 마음은 전쟁터이고 거대 기술기업은 이 전쟁처를 완전히 지배하기를 원한다."



저자는 스마트폰 때문에 지구상의 어떤 사람과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손끝만 움직여 끝없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지만, 스마트폰의 중독적인 특성 때문에 우리는 진정으로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 있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전 세계적으로 연결된 대화형 소셜 미디어는 의제 중심의 이야기를 증폭시키며 끊임없이 우리를 추적하고 생활 속 데이터를 캐낸다. 그리고 저자는 소셜 미디어의 사소한 것들에 집착하고, 현실 도피를 위해 비디오 게임에 늪에 빠질 때, 우리는 매우 조작적이고 절망적이며 부자연스러운 곳, 기분을 좋게 만드는 도파민을 급증시켜 우리의 습관을 형성하는 디지털 기기에 갇히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자기중심성과 양극화된 이분법적 사고를 낳는 소셜 미디어의 임상적 악영향은 계속해서 확산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는 숙주의 몸 전체를 병들게 하는 이 침습성 디지털 바이러스로 인해 사회 전반과 시민들이 모두 병들어 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저자는 양극화된 소셜 미디어 반향실에서 우리 사회는 기술 중독적이고, 충돌적이고, 과민하고, 자기중심적이 되고, 순간적 만족만을 추구하게 되엇고, 여기서 분노하고, 너그럽지 못하며, 자기도취에 빠지고, 경계선에 선 불안한 사람들이 나왔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사회문화적 풍경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다. 기술 발전으로 우리는 할머니와 화상 통화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앞으로 보게 되듯 예상치 못한 수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숀 파커는 고급 행동 수정 기술로 사람들의 소셜 미디어 참여를 늘리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소셜 미디어라는 괴물은 단순한 기술 중독을 넘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우리의 정신 건강을 위태롭게 하며 기록적인 수준으로 자살을 늘리는 정신 이상 유발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저자는 우리는 공허함을 채워주는 디지털 습관을 필요로 하고 사랑하도록 속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디지털 새장과 사랑에 빠져 우리가 그 안에 갇혀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우리는 우리를 중독시키고 노예화할 뿐만 아니라, 감시하고 세뇌할 수 있으며 우리의 성장과 번영을 막을 수 있는, 세계적으로 연결된 작은 스크린 감독들에 갇혔다는 개념이 었다고 이야기한다. 기술 집착에 눈이 멀어 우리는 기술에 의존하는 지금의 무력한 상태가 바로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2014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의 사회심리학자 크리스티나 자기오글루와 토비아스 그라이트마이어가 수행한 흥미로운 연구는 우리 삶에서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를 이용한 후에 우울해지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자신들이 보낸 시간이 의미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의 삶에서 진짜, 진정한, 진실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는 저자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 모든 겉치레와 독설, 진정한 관계의 부재를 겪으며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만드는 소셜 미디어는 의미 있는 삶과는 정반대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오늘날의 가장 유명한 인플루언서들은 명성을 쌓는 일 외에는 별다른 재능이 없어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 인풀러언서 집단 사고 패러다임은 질이 아니라 인기를 주요 가치로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만약 숲에서 나무가 쓰러졌는데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면('좋아요'도 없고 소식이 공유도 안 됐다면), 나무 때문에 큰 소리가 난다 한들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소리가 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수백만 명의 사람이 나무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거나 소리를 들을 때에만 중요하거나 가치가 있다. 공허함은 공허함을 영속시킨다. 우리가 이 습관성의, 아무 알맹이 없는 내용을 밖으로 퍼뜨릴수록 우리는 더 많은 공허함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계속 반복된다."

저자는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을 기념하는 데 집착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려 모든 것을 기념한다. 저자는 예를 들면 우리의 저녁 식사, 창문에서 바라본 풍경,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들, 그리고 통근 열차에서의 강간 같은 것들이라고 이야기한다. 지나치게 디지털화된 지금, 어떤 것에 대한 전자적 기록이 없으면 마치 그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결국 우리가 무관심해진 이유는 아주 기본적이고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력적인 이미지에 너무 둔감해져서 이제 매일의 고통과 폭력을 그저 일종의 오락물로 본다. 또한 저자는 우리는 관음적 오락의 강도를 조금씩 높여 가면서 도덕적 나침반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유튜브 같은 플랫폼에서 AI의 일은 사용자가 영상을 연이어서 보도록 시청 욕구를 적절히 부추기는 영상을 추천하고 자동 재생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구글은 AI 연구팀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어 신경과학, 신경경제학, 인지 및 행동심리학, 도덕적 추론, 심층적 사고를 코드에 적용했고 이 과정에서 개발자들은 알고리즘에 극단화 루프를 끼어넣었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진정한 핵심 가치가 담긴 본질적 정체성 없이, 비본질적인 디지털 세계에서 형성된 빈 자아를 지닌 십 대는 진짜가 아닌 세상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거나, 더 나쁘게는 대개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디지털 세뇌의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사용자들은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콘텐츠에 끌리기 때문에, 알고리즘은 사용자를 점점 더 극단적인 콘텐츠로 몰고 가 사용자가 계속 참여하게 만든다. 결국은 모든 사용자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분열을 초래하는 정치 콘텐츠는 이에 아주 적합하다."

저자는 차갑고 계산적이며 도덕관념이 없는 유튜브 알고리즘은 끝없이 조회수와 사용자의 관심을 늘리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알고리즘은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저자는 알고리즘은 그저 사용자의 시선을 화면에 붙들어 매기 위해 점점 더 강도 높은 콘텐츠를 공급할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론 머스크는 "어떤 소수의 사람들이 마치 신과 같은 초지능을 개발하게 된다면 그들은 세계를 장악할 수 있다. ... 사악한 독재자는 어쨌든 언젠가 죽는다. 하지만 AI에겐 죽음이란 없다. AI는 영원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불멸의 독재자를 갖게 된다."라고 말했다. 저자는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제프 베이조스, 스티브 워즈니악, 마크 저커버그, 일론 머스크 ,세르게이 브린, 래리 페이지, 폴 앨런, 잭 도시 등 우리 세대의 기술 거물들은 '신테크노크라시' 지배 계급이 되어 우리 삶 전체에 전에 없던 통제력과 권력을 행사한다고 이야기한다.

"신테크노크라트는 상상도 안 되는 부를 축적하고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새로운 석유'라 불리는 정보를 통제하기도 한다. 그들은 정보뿐만 아니라 기술과 미디어를 통해 다른 모든 것을 통제한다. 그들은 우리가 보는 것을 통제하고, 우리의 생각을 형성하며, 우리가 투표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고, 우리의 행동을 예측하고 조작한다. 또한 우리가 그들의 제품이나 플랫폼을 지속해서 소비하도록 우리를 중독에 빠뜨리기도 한다."

저자는 데이터 유출, 감시 자본주의, 디지털 배기가스의 수익화로 마치 <1984>처럼 되어버린 세계에서 AI의 예측 알고리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는 새로운 신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아마도 그중 최악은 기술에 중독되고, 현실에 어려움을 겪고, 행동이 수정되는 동안, 대부분 사람이 더없이 행복한 상태가 되어 자신의 데이터가 채굴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사파리의 사자처럼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노예화와 착취를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거대 기술기업에 중독은 실제로 필수 요건이다. 우리의 데이터를 채굴하려면, 그들은 우리를 그들의 기기와 플랫폼으로 유인해 매트릭스에 연결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확할 디지털 배기가스는 없을 것이다.

거대 기술기업과 신테크노크라트는 최신의 행동수정 기술을 확보하고 가장 진화된 예측 알고리즘을 적용하여 우리의 작은 손가락을 계속 움직이게 한다. 기분을 좋게 해줄 다음 도파민을 기다리며 모이 배출 레버를 정신없이 쪼는 스키너 상자의 닭처럼 말이다."

저자는 노예와 같은 조건에서 고되게 일하는 가난한 중국 노동자와 콩코 광부들 덕분에 우리 또한 디지털 수갑을 차고 그들처럼 노예가 된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또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인도와 필리핀의 콘텐츠 모더레이터들 덕분에 우리는 계속 소셜 미디어에 빠져 살 수 있다. 저자는 우리는 모두 갇혀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며, 기술을 너무 좋아해서 자신이 디지털 새장 안에 갇혀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더 갇히기를 원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인류의 가장 야심 찬 발명과 기술 발전은 그것이 지닌 어두운 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이카로스부터 오펜하이머에 이르기까지 지식이라는 나무의 열매를 한 입 베어 물면 엄청난 대가가 따르게 되어 있다. 저자는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을 창조했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괴물을 창조했듯이, 우리는 원자의 신비를 발명했지만, 동시에 우리 종 전체를 파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폭탄을 만들기도 했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신 콤플렉스가 있는, 영광에 눈이 먼 과학자들이 새로운 바이러스부터 마이크로 블랙홀, 지각 있는 AI에 이르기까기 모든 것을 창조하고 있으며, 과학과 오만은 결코 잘 어우러진 적이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기술은 혁신적 발전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분별력을 앞지르고 있고, 우리는 대체로 과학자들을 신격화하지만, 그들은 윤리와 도덕적 의사 결정에 거의 숙련되어 있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과학자들의 의도는 선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흔히 야망에 눈이 멀거나 아니면 그저 새로운 혁신을좇느라 한 가지에만 몰두한다. 오펜하이머의 경우처럼, 일단 지니를 병 밖으로 나오게 하면 과학잔는 더 이상 자신의 창조물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창조물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거나(가령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나 인터넷처럼), 경이로운 새 발명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 다른 계획과 지침이 있을 수 있는 더 강력한 기관(가령 정부, 기업, CEO, 신테크노크라트)의 재산과 소유물이 된다."

저자는 디지털 시대는 한때 일반적이었지만 지금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중요한 힘, 본래의 바른 정신을 유지하는 힘을 없애버렸다고 강조한다. 우리에게는 인내심을 기를 수 있는 경험이 필요하지만, 경험 대신 트위터가 있다. 우리에게는 직접 경험이 필요하지만, 그 대신 게임이 있다. 우리에게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쌓는 사회적 경험이 필요하지만, 그 대신 소셜 미디어가 있다. 우리에게는 자연에 몰입하는 경험이 필요하지만, 그 대신 인스타그램으로 보는 자연 사진 몇 장이 있다. 저자는 진정으로 건강하고, 강하고, 행복해지고 싶다면 이러한 상황을 그냥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인내라는 삶의 기본적인 기술을 익히지 못하고 즉각적인 만족만을 찾는 우울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알렉사에게 명령하는 시대는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기도 했다. 말 몇 마디로 모든 일을 다 해주는 비서가 있으면 내가 무언가를 직접 해야 하는 것은 정말로 귀찮은 일이 된다. 우리는 게을러졌을 뿐만 아니라, 지나친 디지털 자극으로 지루함도 쉽게 느끼게 되었다. 전에 말한 세상에 무관심한 십 대들 처럼 말이다. '지루해, 이미 다 해봤고, 다 알아.' 물론 그것은 모든 허구의 메타버스 경험일테지만,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저자는 선구적인 심리학자 카를 융이 전에 말했듯이, 현대성은 새로울 정도로 우리 세계의 신비성을 없애버렸다고 말한다. 융은 우리에게 신비와 신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저자는 신비와 신화는 무감각한 것에 감각을 불어넣고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불어넣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진정으로 영혼을 만족시키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에서 진짜 도전은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유명한 말처럼 자신만의 천복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16세기 르네상스 작가이자 조각가인 벤베누토 첼리니가 다재다능한 사람은 철학자, 전사, 그리고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첼리니가 언급한 세 가지는 21세기 사회에서 자아실현을 하려는 이가 꼭 길러야 할 속성이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수백만 개의 유혹적인 디지털 콘텐츠가 바로 손끝에 닿아 있는 세상에서 유혹을 피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이 이야기한 이성과 명예를 통해 욕구를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성은 행동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성찰적, 비판적 분석의 형태이고, 명예는 우리의 행동을 자기중심적 충동의 렌즈로 바라보고 실행하는 것이 아닌 더 큰 사회 계약을 기준으로 바라보고 실행하게 한다.

"원형적 경험이 없으면, 즉 인간의 정신을 평가 절하하는 이 압도적이고 고도로 기계화된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없으면, 우리는 생각 없이 캔디 크러시나 하고 소셜 미디어에 빠지게 된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내면의 힘과 지혜를 찾는 것이다. 매혹적으로 깜박이고 트윗을 전하는 기기의 유혹에 정신을 팔거나 중독되는 것이 아니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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