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들여다보는 마음수업 -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은 마음치유의 시작입니다
이선이 지음 / 보아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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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들여다보는 마음수업>은 정신과 전문의 이선이 원장이 28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들려주는 내 감정들을 치유하고 내 자존감을 지키며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마음수업을 담은 심리 도서이다. 우리의 마음이 아픈 원일을 크게 나누어보면 우울감, 외로움, 집착, 분노, 거절감, 사랑에서 비롯된다. 이 여섯 가지의 감정을 담고 있는 이 책에 실린 28개의 에피소드는 거울이 되어 당신의 마음을 비추어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침잠해 있지만 잘 알지 못했던 감정들을 들여다보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저자는 사랑에 대한 고전으로 꼽히는 정신분석가 에리히 프롬의 저서 <사랑의 기술>을 보면, 그는 사랑의 '능동성'에 대해 말한다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참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며 "사랑의 능동적 속성에는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이 따른다"고 말했다. '보호'는 어린아이에 대한 모성애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고, '책임'은 상대방에 대한 정신적인 욕구를 배려하는 것이다. '존경'은 사랑하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를 보며 개성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더 깊은 내면을 알려고 하는 것, 즉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나라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에리히 프롬의 관점에서 이해해보면 '보호'와 '책임'은 있지만 '존경'과 '지식'이 부족한 듯하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미 균형이 깨져버린 사랑은 일방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을 받는 대상은 자신이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하는 서글픈 상황이 펼쳐진다고 말한다.

"능동적인 사랑은 곧 치유다. 당신이 상처받고 외롭다면 당장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주자. 능동적인 사랑을 하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람의 기쁨을 느끼는 순간 당신은 스스로 치유받음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시도 때도 없이 햇빛을 외치는 50대 다운증후군 딸의 사연을 소개하며, 아이의 마음을 자라게 하는 태양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생명의 근원이자 만물이 성장하게 하는 태양,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태양의 상징적인 의미는 강력한 힘, 생명의 원천, 어머니를 의미한다. 정신분석치료를 할 때 치료자는 환자의 무의식을 다뤄야 한다. 하지만 환자의 무의식은 쉽게 의식화되지 않고, 환자 스스로 깨닫기도 어렵다. 무의식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는 단서는 꿈속의 이미지, 연상되는 단어, 그림, 반복되는 말실수, 갑작스런 감정의 폭발 등이다. 그녀가 밤마다 소리쳤던 '햇빛'은 바로 '엄마'를 의미하고, 그녀는 밤마다 엄마의 사랑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해는 낮에 뜨고 밤에 진다'는 당연한 진실이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해는 낮에도 있고, 밤에도 있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비합리적이고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그녀의 외침 속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너무나도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다."

저자는 정신분석 용어 중에 '전이'란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에 대한 반응에 영향을 주는 무의식적 요소를 말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어린 시절 부모나 다른 중요한 인물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자기도 모르게 상대에게 옮겨서 체험하는 현상을 말한다. 저자는 전이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행동과 판단에 많은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의식과 무의식의 크기를 제한한 프로이트와 달리 카를 융은 무의식의 크기에 어떠한 제약을 두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모르고 있는 우리 정신의 모든 것이다. 무의식은 샘물과 같은 것으로 거기에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향하는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으며, 생명의 원천이며 창조적 가능성을 지닌 것이다. 융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작업을 통해 무의식이 지닌 지향적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첫눈에 반하는 감정도 '전이'로 설명할 수 있다. 첫눈에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도 긍정적 전이의 영향일 수 있다. 즉, 어린 시절 누군가와 소중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은 그 대상과 유사한 느낌이 들거나 유사한 조건의 대상을 만나면 무의식적으로 긍정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 사랑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반면,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유난히 그 사람이 거슬리고 대면하기 싫어지고 피하고 싶어진다면 이는 부정적 전이의 영향이다. 즉, 이전에 맺었던 부정적 대상으로부터 받았던 감정들 때문에 그와 유사한 대상이 나타나기만 해도 왠지 불편하고 싫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던 여성이 지금은 중년이 됐음에도 중년 남성들에게 이유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면 이는 부정적 전이의 결과이다."

"만약 현재까지도 당신을 지배하고 괴롭히는 부정적 기억이 많이 있다면, 그 기억들은 사진이 아니고 변형된 사진이다. 하지만 반대로 당신을 지배하고 지탱해주는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이 있다면 그것도 변형된 사진이다. 긍정적 기억이든, 부정적 기억이든 그 기억 속에서는 무의식을 통해 매직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매직은 살아가는 동안 평생 일어날 것이다."

저자는 소극적이든, 직접적이든 왕따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왕따를 당하는 사람을 향한 비난이 자신들의 편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상대의 본질과 진짜 모습을 무시한 채 징그러운 벌레 취급을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자존감은 내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도 없으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양한 모습이 나를 이루고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당신을 구성하는 것들, 보이는 것들 그 이상의 것, 이미 가지고 있었지만 그동안 보이지 않아 무시하고 존중해 주지 않았던 것들을 찾아내어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자존감이라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왕따라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집단의식에 사로잡힌 집단이 한 개인에게 보이는 집단 폭력행동이다. 건강하지 못한 집단의식의 이면에는 나와 너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같은 무리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공통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믿으며, 우리와 같은 생각은 선한 것, 우리와 다른 생각은 악한 것이라고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깔여 있다. 구성원 각자 나름의 가치관과 의식을 포용하지 못하는 집단은 미성숙하고 독선적이며,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갈등이 존재한다. 왕따는 결국 다수가 소수에게 행하는 폭력이다."

저자는 성인이 된 후에 우리가 적응하며 살아갈 곳은 자신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 직장, 친교 모임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만약 당신의 삶 속에 부정적 대상과의 경험이 존재한다면, 잠시 그들에 대한 분노를 접어두고 현재 당신을 둘러싼 새로운 대상들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한다. 그 순간부터 마음속에 쌓인 부정적인 감정들을 긍정적인 감정들이 조금씩 대체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나는 우울감을 앓는 사람들에게 부모와의 관계가 우울감의 원인 중 하나임을 설명한다. 하지만 생물학적인 요인, 환경적인 요인, 자기 자신의 왜곡된 인지패턴 등등도 우울감의 원인이 된다는 점을 반드시 알려준다. 우울증의 치료는 우울감의 원인에 노출되는 것을 막거나 제거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그 원인을 방어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또 불가능할 때가 많다.

우선 한평생 자기만의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부모를 바꾸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폐쇄적이고 고정적이며,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서로를 많은 편견과 오해로 바라보고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도 힘들다. 그래서 가족 구성원이 아닌 정신과 전문의나 심리상담사가 나서서 도와줄 때에야 서로를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만, 사실 그것도 쉽지 않다.

그럴 때 나는 환자의 시각을 'here and now(지금 그리고 여기'에 초점을 두도록 한다. 어릴 때에는 가족이 안전지대이자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성인이 되면 현재 당신을 둘러싼 세상을 보아야 한다. 과연 현재 가족의 영향이 얼마나 미치고 있는가? 내 몸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지만 시선은 항상 과거 그리고 가족 관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또는 원초적이고 가장 강렬했던 부모와의 부정적인 기억에만 매달리고 있지는 않은가?"

저자는 반복해서 자해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타자의 몸을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타자화해서 생각하도록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고 누군가에게는 그런 대상이기에 당신이 함부로 할 수 없다고 알려준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자해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참기 어려운 부정적인 정서에 휩싸일 때 그런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자해를 한다. 예를 들어 극단적으로 화가 난다거나 우울하거나 외로울 때, 자기혐오에 휩싸일 때, 미쳐버릴 것만 같은 감정에 휩싸일 때 스스로 자해를 함으로써 신체적인 고통에 초점을 두게 되면서 정서적인 고통을 일시적으로 중단되도록 한다. 둘때, 2003년 Galley, M의 <Student sdle-harm> 연구논문에서는 청소년들이 자해를 해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생동감을 느끼고, 자해 후 경험하는 감각의 안정화 과정이 신체적 부상 후 진통 작용을 하는 엔도르핀이 분비되는 괒어과 비슷해서 자해사 고통을 완화하고 감정을 가라앉게 한다고 분석했다. 셋째 <Psychoanalysis, 반복적 자해의 정신역동적 이해> 자료에 따르면, 취약한 자아는 정서적인 고통으로 인해 멍하고 해리되어 자기가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위협이 있을 때 스스로 실제적인 고통을 가함으로써 자아와 현실과의 경계가 재정립되고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확인한다고 한다. 자해의 원인으로는 가까운 대상의 상실, 가정 폭력의 목격, 가족 중 자해했던 사람이 있었던 경험, 불안정한 애착 경험 등이 있고, 정신분석학의 대상관계이론에서는 대상 항상성 획득의 실패와 불안정한 내적 자기-대상 표상으로 인해 자신과 외부 사시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으로 자해를 설명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울증은 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그것이 좌절되거나 실패했을 때 다가온다고 말한다. 또한 우울증이 만성화되면 하고 싶은 게 사라지고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게 된다. 저자는 그렇게 우울감이 스스로를 잠식해 버리기 전에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리스트를 적어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한 번의 좌절이나 실패로 너무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고, 하루가 생의 마지막이라면 간절하게 원하는 것, 그것을 당장히라고 해보라고 말한다.

"죽음의 의미는 우리 삶에서 단지 슬프고 우울한 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지금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며 내게 소중한 존재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의미가 있다.

우리 삶의 시간이 정해져 있는 이유는 어쩌면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보람 있고 열정적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저자는 최근에는 중독환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즉각적인 욕구 충족을 참는 것을 힘들어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인터넷을 포함한 SNS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스마트폰과 같은 첨단기기의 휴대성과 대중화는 사람들에게 소통과 정보의 즉각적인 만족을 줌으로써 편리함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적절한 욕구의 좌절을 경험하고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갔다. 저자는 당신도 무언가에 집착하고 잇다면, 그것이 물질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행위이든 그것은 곧 나의 자율성과 조절감을 다른 존재에게 맡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저자는 다른 존재에 중독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섬세하게 읽어보기, 다른 사람들과의 건강한 애착관계를 통해 자신의 공허함을 메워보기, 평상시에 적절한 욕구 지연 또는 좌절을 통해서 인내하고 자신을 조절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의 마음은 물처럼 에너지가 있고 운동성이 있다고 말한다. 흘러야 할 물이 고이게 되면 썩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들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면서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감정의 순환이 쉴 새 없이 이루어져야만 더 건강한 정신을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마음속에 분노, 미움, 증오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 안에 부정적이고 나약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성숙한 태도를 갖기 위한 첫걸음라는 저자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저자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이라는 양면성을 극단적으로 대비해 보여준 소설이지만, 정신분석적 관점으로 보면 프로이트가 말한 자아와 무의식과의 갈등에 대해 묘사한 소설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무의식을 들여다보게 되는 계기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통해 시작되었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카를 융은 자아가 지나치게 외부 사회에 순응하고 내적 인격을 무시하고 살아가면 우울증이 나타날 수 있으며, 의식에서 이용할만한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어 결국 의식이 한계에 다다르면 절망감, 허무감, 자살 욕구가 생겨나게 된다고 보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카를 융은 자살 충동은 낡은 자아의 태도가 죽고 새로운 인격으로 재생하려는 무의식적 충동이라고 봄으로써 자살 충동의 목적성에 대해 더 주목했다. 사회나 부모, 혹은 남들의 요구에 맞춰 가짜 자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자아를 찾아 자신의 행복을 찾는 시간을 갖아보라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내용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주인공 헨리 지킬 박사가 왜 이중인격으로 변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젊고 능력 있는 의사였던 헨리 지킬에게는 가슴 아픈 '가시' 하나가 있었다. 바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였다.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아버지가 정신병을 앓게 되면서 점차 인격이 황폐화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난폭하게 만드는 어두운 부분들을 제거하고 고결하고 선했던 아버지로 되돌아오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인간의 선과 악을 분리하는 연구에 몰입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임상실험을 해야 했던 그는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게 되고, 헨리 지킬과 에드워드 하이드라는 두 존재로 분리되어 선과 악의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악의 힘을 이길 수 없었던 그는 자살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

저자는 '분노의 이동'을 막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분노든, 개인적인 분노든 일단 개개인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림자를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분노의 원인이 과연 자신이 분노를 쏟고 있는 대상에게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분노를 생기게 하는 대상에게서 느껴지는 마음, 거부감, 짜증, 화를 내는 정도와 감정적 시작이 적절한지 살펴봐야 한다. 저자는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겠지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내면의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귀 기울려 듣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자면 공황장애는 개인의 욕구와 환상이 억압될 때 나타나는 불안이 통제되지 않는 병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집단의식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지배하며, 우울증이나 불안장애와 같은 신경증을 앓는 사람들 대부분이 집단의식에 휘둘리고 억압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억압과 개인의 욕구가 충동할 때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되면 표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자신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진정한 개성화 과정이 필요하다.

카를 융은 개성화의 개념에 대해 먼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성품, 본성, 그 사람의 전체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개성화란 자기실현과 같은 의미로 그 사람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무의식 속에 담겨 있는 자신의 숨겨진 욕구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여 현실의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내고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소리, 즉 자신의 욕구를 듣는 연습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위에서 설명한 집단의식에 눌려 억압되어 있는 내면의 자신의 모습을 살려야 한다. 하지만 내면의 자기 목소리를 듣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여러 가지 상업주의 문화, 매스컴을 통한 집단 암시 등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삶에서 누구나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저자는 강박증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이 있지는 않은지, 혹시 내가 놓친 것으로 말미암아 큰일이 벌어지면 어떡하지와 같은 걱정을 끊임없이 하기 때문에 자신이 안심이 될 때까지 강박행동을 하거나 결정을 미룬다고 말한다. 특히 저자는 강박증에서 나타나는 결정의 곤란은 어쩌면 기회비용을 최소화하고 싶은 환자의 욕구로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선택 중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하고 싶지만, 최선이 아닌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불안으로 인해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가정들을 연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결정장애로 나타나는 것이다.

저자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인생의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기쁘기만 한 삶은 거짓이고, 고통이나 고난에 대해 정직하게 마주하고 슬픔을 통과한 후에 또 다른 차원의 깊어진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최적의 좌절을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를 자발적으로 표현할 수 있긴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거절되거나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이뤄지기도 하고 포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것이며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성찰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생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어쩌면 피터팬 증후군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나약함을 부정한 채 자연스럽게 나아가야 할 인생에서 그 한가운데에 멈춰 있는 것인지 모른다.

최적의 좌절은 우리를 건강하게 어른이 되도록 이끌어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주는 대상이 내 삶에 있는지 생각해보자. 그런 대상이 한 명이라고 있다면 당신의 삶은 멈춤이 아니라 좌절을 겪으며 새롭게 성장하며 끊임없이 나아가게 될 것이다."

저자는 페르소나를 벗어버리고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봄으로써 내적인 욕망과 갈등을 인지하고 구별하면서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소망을 실현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작업은 쉽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않으며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존감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완성된 그림이나 목표가 아닌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가는 과정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평생 지속해야만 한다는 저자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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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ONE - 이 시대를 대표하는 22명의 작가가 쓴 외로움에 관한 고백
줌파 라히리 외 21명 지음, 나탈리 이브 개럿 엮음, 정윤희 옮김 / 혜다 / 2023년 6월
평점 :
절판


22인의 작가가 쓴 외로움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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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ONE - 이 시대를 대표하는 22명의 작가가 쓴 외로움에 관한 고백
줌파 라히리 외 21명 지음, 나탈리 이브 개럿 엮음, 정윤희 옮김 / 혜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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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ONE>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22명의 작가가 쓴 외로움에 관한 고백을 담은 책이다. 이 책에 소개된 작가들은 때로는 고독 속에 깊이 몸을 담그기도 하고, 때로는 소외감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 과정을 통해 각자 자아를 발견해 갔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외로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그 누구도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지 못한다. 외로움으로 인해 상처받았던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고독의 순간을 통해 내면이 다시 차오르는 경험도 한다.

이 책에 실린 22편의 가슴 시린 이야기를 읽으며 혼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길 바란다. 혼자라는 것과 외로움, 고독, 쓸쓸함은 비슷한 말들이나 그 결은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부디 분별해 내길 바란다. <ALONE>은 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투명 인간이 된 것 같은 사람, 고독 앞에 담대해지고 싶은 사람 혹은 은밀하게 고독을 갈구하는 사람 모두를 환영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작가 줌파 라히리는 인도와 미국, 둘 중 어느 곳도 완전히 버리거나 속하기를 거부했던 부모님의 태도야말로 자신이 글쓰기를 통해 성취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가치라고 말한다. 줌파 라히리는 비록 어느 곳에서 소속감을 느낄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지만, 이 조건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쓴다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 중 하나다. 소설을 쓴다는 건 실재와 거의 다름없는 것을 새롭게 구성해 내고, 다시 배열하고, 재조직해 내는, 지극히 의도적인 행위다. 심지어 실력이 형편없고 신뢰가 가지 않는 작가들에게서도 이런 의지는 발견되기 마련이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내 말을 들어봐."라고 말하는 것, 이렇게 듣기에서 말하기로 한 단계 도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제 아버지가 자신이 지녔던 현실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벼랑을 향해 자연스럽게 이끌렸다는 것을, 그래서 어딘가 속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안정감을 과감하게 던져 버리고 자신의 가족과 조국을 떠났다는 것을 안다. 이 때문인지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했다. 부모님이 떠나온 고향이든, 우리 눈앞에 펼쳐진 미국이든 말이다. 작가가 되고 책상이 비로소 나의 집이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내가 속할 곳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영토이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점령당했다 버려진다. 나는 나의 작품과 내가 창조한 인물들에게 속해 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선 낡은 것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작가 마야 샨바그 랭은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를 고집스럽게도 놓아주려 하지 않고 함께 지내다가 엄마가 요양병원에서 다채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마야 샨바그 랭은 온갖 걱정에 사로잡힌 채 불확실항 상황의 이면에도 좋은 결과가 존재할 수 있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많은 이들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기애를 통해 유익함을 얻는다는 마야 샨바그 랭의 글에 공감한다.

"주방에 서서 냄비를 휘젓고 있는 내 모습이 왜 그렇게 절망스럽게 느껴졌는지 이제야 할 것 같다. 스스로를 위해 더 많은 것들을 상상하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서둘러 나 자신을 불행한 운명과 동일시했던 것이다.

내 생각에, 이것이야말로 외로움이 지닌 가장 억압적인 특징이다. 상상력을 제한하고, 삶은 결코 더 나아지지 않을 거라 속삭이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꿈꾸지 못하게 스스로를 얽매이는 것. 외로움은 그렇게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날, 하늘은 반짝이는 푸른빛을 뿜어낸다. 밝은 빛 아래 우뚝 서는 것, 이것이야말로 엄마가 내게 원했던 모습이다. 이제 나는 놓아 보낸다고 해서 잃는 건 아니란 걸, 놓아 보내는 행위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안다. 이렇게 다시 자신과 재회하는 일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는, 실로 엄청난 기쁨이다."

작가 헬레나 피츠제럴드는 여성은 지나치게 빨리 유년기에서 쫓겨나 성인으로서 막중한 사회적 책무를 짊어져야 하는 상황 속으로 억지로 떠밀려 들어간다고 말한다. 헬레나 피츠제럴드는 혼자 사는 삶은 내 몸을 사회적 요구에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이기심과 침묵을 차곡차곡 쌓아 두어도 상관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헬레나 피츠제럴드는 남편과 함께 살기로 한 선택에는 만족하지만, 그 선택이 나 자신보다 더 강력하고 덜 자비로운 힘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는 식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며, 한편으론 자신이 그런 통념을 영속시키는 것 같아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고 말한다. 헬레나 피츠제럴드는 사랑을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가정을 선택하는 행위는 나와 많은 이들을 위한 가치 있는 희생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희생이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혼자 지낸다는 것은 벗어나야 할 공포가 아니라, 희생하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얻기 위해 포기할 수 있는 상과 같다. 내게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상태가 아니라 일종의 타협이었다. 남편과 함께할 때, 세상이 덜 냉혹하고, 더 관대하며, 덜 위험하고, 덜 팍팍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난관을 헤쳐 나가며 일종의 뾰족한 모서리를 조금씩 완만하게 다듬어 갔다. 하지만 이런 관계에서 비롯되는 따스함과 지지가 일상생활 속에서 일관성 있게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것을 포기한 대가로 얻어 낸 결과였다. 바로 '혼자인 삶' 말이다."

"여성으로서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가족이나 사랑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의미가 있다. 우리 여성들은 종종 완벽하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 내린 판단이 거부당하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일단 그렇게 살 수 있는 길을 찾고 나면 포기하기가 어렵다. 내가 성숙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자연스러베 넘어가지 못하고 이 소중하고 얻기 힘든 것을 조금씩 떠나보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혼자 사는 삶을 놓아 주는 과정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삶에 나 자신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나의 일부는 여전히 혼자 지내는 삶이 지닌 강렬한 즐거움을 향해 끊임없이 되돌아간다."

작가 에이자 게이블은 유산과 임신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몸에 대한 상태를 비밀로 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에이가 게이블은 중요한 건 슬픔이 찾아왔을 때 숨기는 것이 아니라 괜찮은지 물어봐 주는 것이었고 말한다. 그리고 에이가 게이블은 슬픔으로 인한 외로움은 누구라도 혼자 견디기 힘든 법이므로 동지가 생긴다는 건 든든한 일이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에이가 게이블은 우리 몸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비밀을 담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유산이 놀랄 만큼 흔한 일이라는 사실이 애도의 과정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이런 힘든 과정을 견뎌 냈는데, 그 과정이 어땠는지 솔직히 털어놓는 사람은 고작 몇 명뿐이라고?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마음속에 비통함을 품고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놀랍지만,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도 하필 여성의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외로움이다."

"삶은 고통이고, 고통은 집착에서 오며,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 배우자와 자식들, 말 못하는 반려동물들과,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행성들, 때로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태아에게까지 집착한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모두는 이런 대상들을 향한 집착의 끈을 풀고 보내 주어야 할 때를 맞이한다. 우리는 모두 불가사의한 효소와 호르몬, 분노와 욕망이 한데 뭉쳐 만들어 낸 비밀 그 자체다. 배 속에서 서서히 자라나고 있는 아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말 그대로 나는 아이에게 집착하고 있다. 하나의 비밀스러운 육체가 또 다른 비밀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서 너에게로, 나의 낯선 육체로부터 너에게로, 나의 외로움으로부터 너에게로 다가가려 노력하는 것이다. 내 배 속에서 느껴지는 통즈은 바로 그 노력의 과정이다."

작가 앤서니 도어는 인터넷 중독과 맞서 싸웠던 경험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여 흥미롭다. 앤서니 도어는 인터넷의 세상이 아닌 지금 내가 속해 있는 현실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의 전부는 옆에서 걷고 있는 아이의 눈동자를 저녁 내내 들여다보는 것뿐이다."라는 앤서니 도어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내 속에는 사악한 제2의 자아가 숨어 있다. 햇빛에 굶주린 이 천박한 자식은 내 심장의 북쪽 어딘가에 살고 있다. 높은 매일 조금씩 더 강해지고 있다. 이 녀석은 잡초이고, 넝쿨이다. 굵은 철사처럼 내 두개골을 칭칭 감고 있다.

편의상 이 녀석을 'Z'라고 부르자. 나는 일기예보를 즐겨 보지만 Z는 어떤 날씨에도 꿋꿋이 살아남는다. 나는 스키를 좋아하지만 Z는 뉴스 읽는 걸 좋아한다. 내가 정원에서 잡초를 뽑고 있으면 Z가 나타나 내 귀에 대고 기후 변화와 핵 확산, 불어나는 건강 보험료에 대해 속삭인다."

"Z는 시골이라면 질색을 한다. Z는 링크드인, 트위터, 구글을 워한다. Z는 내가 당장 휴대전화를 들고 이메일을 확인하길 바란다. 그 대신 나는 아들과 함께 산책을 나간다. 크고 어둡고 묵직하게 자리 잡은 계곡 위로 구름들이 떠가고, 황금빛 햇살이 낮게 내리비춘다. 우리 집 아래에 있는 협곡에는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세이지가 자욱하게 피어 반짝이고 있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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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없는 사진가
이용순 지음 / 파람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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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수감생활을 하면서 사진 대신에 선택한 글들을 통해 삶을 성찰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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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없는 사진가
이용순 지음 / 파람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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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용순은 사진가이다. 미국 시카고의 콜롬비아 칼리지와 뉴욕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한 정통 포토그래퍼이며, 미국과 서울에서 8회의 개인전을 가진 바 있는 중견 작가이다. 이 책의 출간에 즈음해 열리는 아홉 번째 개인전에선 특유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내면의 풍경과 문학적 서정의 순간들을 포착해내고 있다.

어느 날 카메라가 들려있어야 마땅할 사진가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알고 지내던 어떤 이의 부탁을 받고 심부름을 해준 것이 빌미가 되었다. 범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파놓은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 일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이 어리숙한 예술가는 2년여의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책 <카메라 없는 사진가>는 그 낯선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록이며, 영상에 대한 감각을 문자의 형식으로 풀어낸 또 다른 창작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시와 산문으로 옮겨진 그 결과물이 예사롭지 않다. 무엇보다 탄탄한 문장력과 문학적 안목이 눈길을 잡아끈다. 책에는 짙은 서정성을 바탕으로 내면의 심층에 다가가는 깊은 시선이 돋보이는 저자의 아름다운 사진 작품 20여 점을 수록하고 있다. 책의 전반에 흐르는 일상과 주변,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섬세한 관찰, 따뜻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예리한 감수성이 빛을 발하는 매우 독특하고도 매혹적인 책이다.

이 책은 '1장 슬픔을 공부하는 시간, 2장 카메라가 없는 사진가, 3장 세상의 바닥이라는 교실'이라는 3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사진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록이며 이는 시가 가지는 기본 형태와 일치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시가 언젠가는 사진으로 환원되어 보이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요즘의 나는 종종 시를 쓴다. 나는 결단코 나의 시가 언젠가는, 누구에게는 사진으로 환원되어 보이기를 바란다. 나는 사진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진가라는 이유로 나는 추상의 단어를 시로 쓰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시로 환원시키는 것에 애를 먹는다. 예컨대 사랑, 행복, 슬픔을 바로 시로 쓰지 못하고 대신에 사진이 그러하듯이 다른 대상을 선택하여 그것을 표현해낸다. 예를 들어서 여름 장마철에 드러난 햇살을 통해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며 이 표현의 양식은 사진과 시가 동일하다. 그래서 시는 사진이다. 그러므로 카메라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나는 사진가다."

타인의 범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온 저자는 징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가슴에 붙은 번호로만 살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다가도 저자는 누군가에게 따스함이 전달되어 오면 자신의 한쪽을 내어주는 것이 감옥에서의 생활방식이라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감옥 안에서 순박하고 어수룩했던 사람의 장점을 많이 보았고, 끝까지 자신을 모른채로 출소하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감옥에서의 수감 생활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나오지 못하게 가두어놓고 구멍을 통해 먹이를 밀어 넣어주는 배식구의 시스템은 언제부터였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저자는 감옥에서 배식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자신이 예전에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잔임함을 이제는 알 것도 같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에게는 밥상이라는 게 있다. 밥상은 이제 구별의 도구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소중한 표식이다. 오늘도 배식구를 통해서 우리들의 먹이가 들어온다. 그러니 배식구는 생명이기도 하다. 벽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밥을 먹고 하루를 보냈다. 이제 밤이 오기에 그 배식구를 닫는다. 오늘의 용도를 다한 것이다."

저자는 감옥 안의 중앙통로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문이 나타나고, 초록색 바닥 중앙에 노락새 선이 나 있어 좌우를 가른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에게 이 노란 선은 사색하는 길이며, 짧은 길을 오가며 좁은 공간에서 드넓은 세상과 우주의 깊이를 걷는 공간이라고 이야기한다.

"노동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지친 몸을 끌고 그 선을 따라 방으로 들어온다. 같은 선이지만 나갈 때와 들어올 때의 의미는 또 다르다. 들어올 때는 달력에 곱표를 하나 추가할 수 있다는 소소한 즐거움이 덤으로 주어진다. 인간이 죽는 것은 정해져 있지만, 그 날짜가 정해진 것은 아니어서 두려움 없이 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이곳에선 나가는 날짜가 정해져 있으므로 두려움 없이 버틸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생활을 삶의 범주에서 제외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해 위안을 얻는다. 사실 그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리도 하다."

저자는 종종 감옥 안에 있는 자신의 상황이 더럽다는 생각을 하지만 자신에게 선택은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자신이 얼마나 자유로운 시간을 누렸는지 반추해 본다고 이야기한다. 진정 예술가가 되고 싶었으나 어딘가에 멈춰 서게 된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써내려가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예술은 다분이 위선적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하다. 내게도 예술은 온전히 머물지 않았으며, 백지에 남긴 타인의 낙서와도 같았다. 사물과 인식의 대상에서 나는 가슴을 다 열어젖힌 것은 아니었다. 이제라도 나의 행로다 내가 꿈꾸던 방향이었으면 좋겠다. 내 예술의 세계가 가슴을 열어젖힌 것이라면 더욱 좋겠다."

저자는 교도소 수감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만나고 얻어지는 것들은 교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고, 도서관에서도, 책을 읽어서도 가질 수 없는 그런 귀중한 습득물이었다고 말한다. 교도소의 노역을 선택하면서 살아있는 생명체에서만 뿜어져 나오는 그런 지식들을 하나둘씩 가지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이 여운을 남긴다.

"교도소의 노역은 강제규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도 강제인 곳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선택에 의함에는 틀림이 없다. 나는 노역을 선택한 곳이고 삶을 선택한 것이며 그로 인해 얻어지는 참지식을 선택했다고 믿는다. 나는 얼마나 이 생활이 남아있는지 모르지만, 나의 완성에 보탬이 되는 시간이라고 빋으며 다시 공장으로 향한다."

저자는 감옥 안에서 버려지는 쓰레기들과 함께 나의 슬픔과 고통의 기억을 버리려 한다고 말한다. 정말로 세상의 이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고 나를 알아버렸으며 나의 비워짐이 다시 무언가로 채워져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들의 버려짐으로 내 영혼이 좀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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