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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정진C의 아무런 하루 - 일상, 영감의 트리거
정진 지음 / 디페랑스 / 2023년 7월
평점 :
<미술가 정진C의 아무런 하루>은 작가 정진의 일상의 고민의 흔적들, 예술가로서 미술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는 에세이다. 그리고 이 책의 목차를 구성하는 '마음 풍경', '영역 인간', '남겨진 감정들'은 작가 정진의 미술작품 제목과 동일하며, 작업하며 적은 노트들을 바탕으로 하였다.
정진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지만, 자신의 일이 운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운명론자가 아니라 그것을 결정이었다는 정진의 글이 눈길을 끈다. 정진은 어려서부터 미술작가, 글작가가 되겠다 희망한 적은 없으며, 점점 그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고, 순간순간 결정했다고 이야기한다. 미술과 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그것들을 현실에 옮겼고, 결국 우리는 운명보다 매일의 힘을 믿는다는 정진의 글에 공감한다.
정진은 '와장창' 하고 깨어져야만 화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진은 '파사삭' 하는 순간, 주변이 균열한다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그것을 꽤 오랫동안, 누군가를 누군가를 참아 왔다는 것이며, 무너짐은, 짜증 섞인 찌푸림, 거슬리는 한마디, 별것 아닌 거북함에서 시작한다는 정진의 글이 인상적이다.
정진은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미술가, 그 촉발제, 작가에게 생각의 트리거는 영감이라 불리지만, 그리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정진은 영감은 하나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생각이 어느 순간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순간적으로 대입되는 것에서, 다른 하나는, 순간 튀어나오는 생각의 파편, 그것들이 빛이 날 때까지 다음어야만 무엇이 되는 두 가지 길로 찾아온다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결국 영감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앞뒤의 지속적인 시간들, 준비왼 사람에게만 보이며, 그것을 가꾸는 사람만이, 그것을 현실로 만든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 시간들보다 영감의 순간에 더욱 관심 있어 보이지만, 천부적 재능이나 행운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영감을 실제로 만드는 것은 성실력이라는 정진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정진은 자신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우리는, 타인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정진은 존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으로 그들을 정의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얼굴과 이름만 그 사람인, 그와는 다른 누군가를 만든다. 정진은 자신 안에서 상대는, 마치 소설의 등장인물들처럼 살아가며,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정진은 가족조차 만들어진 타인일 수 있고, 나의 생각이, 그가 되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철들다는 것은 포기의 영역으로 본인의 의지로 조절 가능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것은 조금 혹은 많이 강요와 강제를 가진다는 정진의 글이 눈길을 끈다. 정진은 내 것을 양보하면 철들었다 하고, 눈치 보기 시작하면 철들었다 하고, 기댈 곳 없으면 철들었다 하고, 그렇다면 그것은 포기의 영역이 맞다고 이야기한다.
"나의 의지를 꺾어 너를, 상황을, 자신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의지.
그래서 어떤 경우 포기는 배려이지만,
어떤 경우 그것은 죽임이다.
내 안의 꿈틀대는 어떤 것을 죽이고 나면, 철들었다 한다.
한동안 착한 어른이고 싶었던 나는, 곧잘 학살자였다."
정진은 예술가가 감정만을 전달하는 사람이라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말한다. 정진은 물론, 그런 예술은 잘못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그런 미술가가 아닐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자신의 작품이 방아쇠가 되기를 소망한다는 정진의 글에서 예술가란 무엇인가를 깨닫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미술가나 그들의 작업을 보며, 무언가를 느껴야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감정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생각하기를 바란다.
나의 작품이 방아쇠가 되기를 소망한다.
당신의 어떤 생각을 죽이는,
당신의 어떤 생각을 깨우는."
정진은 예술이 어머니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한다. 항상 주변에 있어 소중함을 모르지만, 신의 대리인이라 불리는 거대한 존재. 정진은 그녀를 매일 보는 것은 생활의 일부이지만, 사실 그녀는 자신에게 세상을 있게 한, 그 처음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모든 이들에게 어머니가 함께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어머니란 존재가 그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는 것도 아니라는 것조차, 예술과 닮았다고 말한다.
"인간이 만든 것들이 모두 그렇듯,
그녀는 위대한 동시에 나약하다.
그러니 신의 프레임을 씌워 그 어깨를 무겁게 하지 말자.
그녀를 도우라.
어머니도, 예술도."
정진은 SNS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 주는 장터 같다고 말한다. 정진은 SNS에는 온갖 종류의 욕망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마치 기원전 4세기 그리스, 프락시텔레스의 조각상들을 닮았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SNS 안에는 더 멋진 내가 있고, 좋고 나쁨을 떠나 인간 본능의 영역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진실된 픽션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최첨단의 즐거움은 항상 본능에 충실하다는 정진의 글이 인상적이다.
"놀랍도록 아름답고 선망하게 하는 그 모습 이면에, 대상의 단점을 모조리 빼버리고, 그 안을 완벽으로 채워 넣은 인간의 모습이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바랐다는, '예술에서의 영혼의 활동'은 기대할 수 없다.
어차피 예술의 영역이 아니기도 하지만, 이곳은 개인의 개성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성향이, 아름다움 안에 갇힌다.
이곳의 개성과 아름다움은 현실세계와 다른 정의를 가진다.
정확히는, 보여지고 싶은 곳만을 선별적으로 발췌한 아름다움.
마치 샤랄라하게 각색된 자전적 소설처럼, 드러낼 단점까지도 섬세하게 각색된다."
정진은 스스로의 좌표를 찍는다는 것은, 넓은 세상 속에 나를 작은 점으로 표현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알겠다는 의지라고 말한다. 정진은 나의 정서적 물리적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도, 즐거운 일도 아니겠지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면,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비로소 시작할 수 있고, 시작은 한번이 아니라 수시로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작가가 생각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전에 영역 동물이라고 말한다. 정진은 인간 삶의 형태는 야생동물처럼 일정한 패턴을 가진다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산에는 호랑이가 다니는 길, 토끼가 다니는 길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인간 또한 물리적 영역 뿐만 아니라 정서적 영역에서조차 정해진 길만을 다니는 듯 하다고 말한다. 정진은 내 것이 소중할수록 다른 것들을 배척하고 조롱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우리 대부분은 일반적인 사람들, 이렇게 우리는 영역 동물들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지키려 평생을 바친다. 새로운 생명체가 발을 들여놓는 순간, 위태롭고 날카롭다.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온 생명체에 민감하다. 필요하다면 잔인할 수 있다. 그것에는 예외가 없다. 그 안에서는 가족도 친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역 안에서 안락함을 느끼고, 그것을 침범당하면 날선 불편함을 느끼니까.
동물들은 그 불편함을 눈에 보이게 표출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아마도 문명인이라는 타이틀을 포기할 수 없나 보다. 그러니, 인간의 민감함은 동물들의 것과는 다르게 발현된다. 자라며 각자의 사회적 영역을 확보하지만, 다시금 그들만의 숲에 발을 들이는 순간 뱀처럼 똬리를 튼다."
정진은 잃어버렸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상태의 없음이고, 버렸다는 것은 의지를 가진 상태의 없음이라고 말한다. 둘의 공통점은 현재 내게는 없다는 것이다. 정진은 우리는 꿈, 삶, 물건, 사람, 감정 등의 일부를 시간과 함께 하얗게 잊곤 한다고 말한다. 정진은 그것은 마치 마법 같아서 갑자기 없는 것이 되고, 그렇게 없는 것, 잊혀진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고뇌한다.
"인형은 49개로 하얗게 복제되었다.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흼은, 그 대상의 경중과 상관없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을 뜼한다. 숫자 49는 사람이 죽은 지 49일 째 되는 날 지내는 재를 뜻한다. 사십구재는 윤회를 믿는 이들이, 죽은 이가 후생에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복을 비는 행위이다.
이 작품은, 종교 없는 작가가 지금 곁에 없는 것들의 명복을 비는 일종의 의식이겠다."
정진은 누군가의 질문이 내 안의 생각이나 감각을 일깨우는 경우가 있는데, 상대의 질문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그것이, 처음 듣는 것도 아닌 그것이, 어느 날의 나에게 특별히 다가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진은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거나, 이미 내 안에 있었지만 꺼내어 본 적 없던 것들을 끄집어내는 계기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만약 그 질문에 가르치거나 일깨우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소심하고 예민한 반항아인 나는 단번에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리도 생각도 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질문도 어떤 날에는 다르게 온다. 그러면 그날 저녁 그리고 그 후로 몇 날 동안, 그것은 내 글과 미술의 시작이 된다."
정진은 미술가가 직업인 자산에게 미술을 감상하는 방법을 묻는다면,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를 권한다고 말한다. 정진은 작가의 노트를 꼼꼼히 읽고, 작품을 천천히 보는 것, 이 두 행위가 함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정진은 미술이 어려운 것을 못 견디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보고, 미순을 쉬워야 한다고도 말하지만, 미술은 열린 예술이라고 말한다. 공부하지 않은 것을, 보는 순간 모두 이해하고 싶은 것은 욕심이며, 그것은 좀 염치없다고 이야기하는 정진의 글이 인상적이다. 미술을 감상하는데 공부까지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어디까지 감상하고 싶으신데요?"라고 답하는 정진의 글이 여운을 남긴다.
정진은 예술과 문학 좋아하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이 없다고 질문하는 것에 대해 나쁜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한다.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것과 좋은 사람인 것은 비례하지 않는다. 인간성은 예술과 문학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진은 예술과 문학은 항상 변화의 기회를 주고, 기회 속에 살며 변화하지 않는 것은 기회 없는 사람들의 불변보다 더 큰 슬픔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자연은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사랑스러우며, 본질적으로 무섭고 그 속을 알 수 없는 것이며, 무엇보다 그것에는 감정이 없다고 말한다. 정진은 자연은 의지 없이 이치를 따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그것이 우리의 환경이라고 이야기한다. 산과 바다, 숲 만의 일이 아니고, 우주도 입자도 자연스러우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를 위해 서로를 돕고, 그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움이라는 정진의 글이 눈길을 끈다. 뿐만 아니라 정진은 공존은 다양한 모습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각자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진은 작은 것과 큰 것, 연결된 것과 단절된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새 것과 헌 것 등 언뜻 반대되어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이 모여 하나를 이루고, 이것이 작가가 생각하는 공존의 모습이며, 자연스러운 만물의 생존방식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미술의 존재 이유 한 가지는 화두를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정진은 그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게 느끼게 하고 가치관이나 행동이 변화할 기회를 주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이 좋은 미술이라고 이야기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를 주는,
더 나은 사회가 될 기회를 주는, 그런 일.
그래서,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런 이들이 더 많은 기회를 가졌다는 믿음이 굳다.
미술의 힘을 믿으니까."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