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차가운희망보다뜨거운욕망이고싶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었던 시간에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이 많이 있었다. 회사에서 새로운 업무를 시작했었고, 여기저기에서 문제점도 많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조직은 무엇보다 업무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누구 하나 잘하고 잘났다고 해서 움직이지는 않는다. 사람을 다루는 것부터 생각지도 않는 일, 엄밀히 말하면 그동안 있었던 일이지만 나에게는 생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쉬운일이 없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모든 게 귀찮았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끊임없이 안주하려 하고 생각은 계속해서 자기합리화에 변명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몸과 마음에 신선한 자극을 줄기차게 부여한다. 책은 그 하나인데, 김원형씨의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를 읽으며 정신적으로 나약한 나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그는 고민하다 수없이. 지체장애 1급이라는 불공정한 게임의 룰에서 자본주의 냉혹한 현실을 부딪혀간다. 그에게 맨처음 장벽은 특수학교을 마치고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특수학교에서 아무리 공부를 잘했어도 일반학교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 학교시설물을 많이 개선해야한다는 이유를 들지만, 현실적으로는 일이 복잡하고 챙겨야 할 점이 많고, 한마디로 변화에 대한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김원형씨는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렸고,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하며 서울대에 진학하게 된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 서울대에 가서도 그 앞에는 또다른 커다란 장애가 존재한다. 넓은 캠퍼스를 수업일정에 맞쳐 다니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는 항상 특유의 오기와 집념으로 정면 돌파한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에 비관적인 현실에 정면대응하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이유를 마음속에 새긴다.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장애를 이해하는 것이 지식을 몸에 익히거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헌신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 한다. 오히려 자원봉사자라고 방문해서 앞에서만 잘해주다가 가버리면 남아있는 장애인들에게는 커다란 상처만 생길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선거때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행사성 방문하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열등한 인간을 만나면서 우월성을 확인하는 것을 은연중 좋아한다. 저 사람들도 살아가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가, 부끄러워 해야한다는 사고도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좁은 시야일 수도 있다. 사회는 그 속에 살아가는 모든 구성원을 통해 움직인다. 편가르지 말고, 협동의 가능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기회와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지면 훌륭하게 움직일 수 있다. 연대의식이 새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대목이다. 

장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될 무렵, 텔레비젼에 팔없이 다리로 생활하는 유태호(11세)군이 나왔다. 일반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태호 얼굴은 누구보다도 밝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반장선거에 떨어지자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고, 승가원 동생 누나들이 떠나면 안아주고 석별의 노래도 불러준다. 장애를 의식하지 않고 생활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언제 자신이 장애를 가질 줄 모르기 때문에, 단순히 배려하고 도움을 주는 차원을 떠나 같은 구성원으로 받아주는 것이 중요함을 알 게 되었다. 미국의 Goodwill 회사는 중증 장애인를 회사원으로 뽑아 그들의 경제적 여건을 돕는다. 그들은 일을 통해 자신감을 갖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장애인만을 위한 일터가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제는 올바른 시각과 실천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력사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폭력사회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볼프강 조프스키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인간의 본성에 관한 학설은 동양에서는 성악설과 성선설로 대표된다. 서양에서는 이성과 의지로 표현된다. 인간의 자연상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역시 폭력과 혼돈상태라는 입장과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상태라는 입장으로 대변한다. 이러한 입장들은 근대의 철학자 로크와 홉스의 사회계약설에서 기본적인 전제의 차이로 나타난다. 물론 이전 고대철학에서도 인간의 이성과 의지에 대한 견해는 끊임없이 대두되었고,  중세에서는 하나님의 이성과 의지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주류는 역시 이성에 비중을 두고, 평화상태에 기반을 둔다.  

계보를 살펴보면, 인간의 이성이냐 인간의 의지냐에 따라 주지주의와 유의주의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주지주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그로티우스, 라이프니쯔, 근대 자연법, 독일 관념론으로 이어가고, 유의주의는 사도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둔 스코투스, 오컴, 홉스, 국가지상주의, 마르크스로 계보가 이어진다.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큰 흐름은 역시 의지나 힘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폭력사회]의 저자 역시 설득력이나 논리적 측면에서 유의주의쪽에 관심이 더 있는 듯하다.  

폭력과 사회 라는 말은 언듯 불합치하는 면이 있다. 구성원이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사회속에 폭력은 이질적인 요소가 틀림없기 때문이다. 폭력은 부정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 질서와 규범을 무시하는 힘이 폭력이고, 폭력은 현대 사회에서 불법화 되어 있다. 그래서 폭력의 내재 요소인 힘이나 의지 역시 무시당한다. 아니 이를 억제하고 억압할 수 있는 더 큰 힘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질서의 강요로 인해 폭력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치를 위해 질서를 요구해서는 안되고, 의미있는 질서를 구현하고자 한다면 통치를 잘해야한다. 그래서 카뮈가 불의보다 무질서를 택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정의를 강화하는 것이 질서가 아니라, 질서에 확신을 주는 것이 정의인 것이다. 어찌보면 사회적 질서는 정부와 국민간의 균형과 일치하는 소통의 문제인데, 질서를 내세워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위정자들은 다시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폭력사회]에는 폭력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다룬다. 폭력의 대상인 인간의 육체, 고통..폭력의 유형으로 고문, 사형집행.. 폭력의 도구인 무기, 전투, 학살 그리고 문화적 측면까지 세부화시키고,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폭력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밀접해 있다. 정신적 고통과 불안 심리역시 폭력을 통해 확보할 수 있다. 인간의 육체에 대한 공격과 방어 사이에 무기의 발전은 계속되었다. 또한 무기는 인간 지위의 상징으로, 신속성과 공간 극복을 위해 개발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이 책은 사형에 관한 내용이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지만, 최근 출간된 '능지처참'처럼 독립된 분량으로 다룰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저자가 지식적으로 압축하고 깊이있게 설명하는 능력은 높이 살 만 하다. 

폭력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고 은밀하게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 주변을 다시한번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우리 현대사를 되돌아봐도 폭력에 대한 아픈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역사를 아름답게만 포장하는 것 보다 큰 전환기마다 힘이라는 원동력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우리와 역사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코지능 - 미래 경제를 지배할 녹색 마인드
대니얼 골먼 지음, 이수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번 도서를 읽으며, 우리 모두가 과연 지구 환경의 심각성에 대해 피부 깊숙이 느끼는 가는 회의감이 든다. 우리 주변을 봐도 바로 알 수 있다. 아직도 제대로 분리 수거도 하지않거나, 쓰레기 봉투에 넣지 않고 아무데나 슬쩍 버리는 행위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거리는 담배꽁초가 넘치고, 온실가스는 도시 가득하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희망은 없는 것일까. 저자는 전 세대부터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고 행동한 우리의 잘못된 습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예를들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분리 수거해도 저자의 말대로 지구에 그대로 몇십년 남아있다.  오히려 재활용만 하면 지구 환경에 나쁜 악영향을 미치는 제품이라도 마구 써댄다. 이런 습관을 당연시 여기고, 단순히 재활용했다만으로 책임을 전가시키는 우리 자신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한다.
 
책을 읽다보면 생태지능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뇌를 다시한번 점검해본다. 우리의 뇌는 눈앞에 보이는 위험이 아니면 지각하지도 않는다. 특히 서서히 변화되고 발생하는 위험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그래서 천천히 진행하는 지구온난화에 대해서는 그냥 넘겨 버린다. 인간두뇌의 인식상 딜레마로 막연해 보이고, 보이지 않는 위험에 대해서는 무감각 무대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감정이 포함된 인지작용은 유별나게 민감하다. 어린 아이를 둔 엄마들은 분유 성분이나 기저귀 성분에 민감하다. 그만큼 피부에 와닿고 직접적 위험만 걱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지구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저자는 산업생태학이라는 학문을 끌어와 자신의 논지를 강화한다. 이제는 제품의 생산 전과정을 공개하고 소비자에게 투명하게 알려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우리 법에서도 소비자보호법등을 통해 소비자주권이 꾸준히 증가되어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업과 소비자는 강자와 약자 관계다. 이는 특히 정보의 불균형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완전투명성이 필요하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공정한 시장을 전제하고 완전 경쟁을 추구하지만, 현실은 그렇지않다. 불균형 불평등 시장과 불완전 경쟁을 하고 있다. 소비자는 울며겨자먹자식으로 소비를 하고 있다.
 
딜레마도 있다. 시장이 세계화되는 마당에 환경을 보호하자고 개발을 멈출 수도 없고 과거 시대로 돌아갈 수도 없다. 환경의 중요성만큼 산업선진화도 무시못 할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산업 세계의 결과물보다 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변화의 속도가 더 빨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경제가 생물이고 어디가 선후가 되냐, 경제변수들간의 속도문제에 따라 경제의 선순환, 악순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국민총생산 개념을 환경 국민순생산 개념으로 대체하고 적극 활용성을 제시한다. 여기서 환경을 생각하며 성장하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소비자의 잘못된 습관을 고치고 깨어있는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지구 환경은 인류의 공동자신인 만큼, 환경문제는 한국가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적 , 전 인류에 관한 문제다. 또한 현세대의 문제만이 아니고, 선택이나 결정권도 갖지 못한 미래세대 문제이기도 하다. 지구 공동 재산을 부자 국가라고 해서 더이상 악용해서는 안될 이유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도 양보할 수도 없는 중요한 시기이며, 무엇보다 에코지능이 절실하다. 자기 혼자만이 아닌 사회구성원 모두가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인 것이다. 여담으로 저자의 탁월할 글솜씨가 돋보인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 100년 전 그들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이승원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한 나라의 역사만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번 책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내가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보지 못한 곳, 생각지도 않은 곳에도 여전히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고 있었다. 조선 민중이 외세 침입으로 국권을 잃고 실의에 차 있을 때도 세계 역사는 묵묵히 흘러가고 있었다. 만약 일본의 침입이나 서양의 팽창정책이 없었다면, 은둔의 나라 조선은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그렇다고 일본이나 서양 제국주의를 옹호하자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안일하게 자신의 울타리만 고수했다면 세계역사의 흐름속에 발전된 한국이라는 이름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세기 초,중반은 사상의 혼돈과 세계전쟁의 휘오리, 그리고 경제적 대공황속에 허덕이고 있었다.
 
나라 잃은 조선의 지식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의였던, 타의였던, 세계를 향해 여행을 떠난다. 크게는 사신단, 전권대사, 사절단으로, 사적으로는 학문,견문을 넓히고자 가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착잡한 마음은 말 할것도 없다. 본디 여행은 공적이던 사적이던 자신의 국가를 통해 여행자의 정체성이 확인되는데, 그당시 조선은 일본의 속국으로 간주되어 사적으로는 망명자의 입장이었다. 조선지식인들 앞에 펼쳐진 서양 문물을 바라보는 마음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받아들일 것인지, 말것인지. 받아들이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그런데 개인이나 국가나 환골탈태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갖고있는 기존의 틀을 무너뜨리려 하지 않는다. 일단은 가장 손쉽게 남을 모방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모방을 통해 현재의 난관을 극복하려하지만, 갈수록 더 큰 시련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이 그당시 조선의 상황이고 지식인들의 모습이었다.
 
책에는 일본,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으로 떠나는 조선지식인들을 고찰한다. 일본에 대한 시각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일본이 앞서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저자 견해대로 부정적 타자로만 남아 있다. 왜 그럴까, 예나 지금이나 일본은 조선이 주변국과 긴밀해지려는 것을 싫어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크게는 일본속으로 내선일체 시키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 중일전쟁의 앞서 만주에서 중국농민과 조선농민의 수로다툼인 만보산사건을 과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영국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적 시선보다 신사의 나라로 더 인식된다. 그러나 신사도라는 것도 그 나라 국민정신의 통합을 위한 구심점이다. 엘리트 의식, 우월주의는 개인이나 사회 국가간 이질감을 갖게하는 요소는 아닌지.. 1936년 우리나라의 손기정선수가 독일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할 때 히틀러에게 손을 올리며 하이 히틀러를 했다는 내용도 흥미롭다. 시시때때 변해가는 세계정세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한마디로 갈팡질팡이었다. 내면을 깊이 읽고 넓게 바라보는 시각없이 그때마다 풍조했던 사상에 몰입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맑스주의사이에서 또는 자유주의와 나치즘 파시즘의 전체주의속에서 흔들렸던 것이다.
 
여행은 시, 공간의 이동이다. 조선 지식인들이 서양여행을 하면서 가장 크게 적응하기 힘든 것은 시간관념이었다. 특히 시간 개념을 파악하는 것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분석하는 작업이고, 역법은 그 사회의 집단심성과 정체성, 세계관을 의미한다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무엇보다 이번 책을 통해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세계속에 조선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좌절, 그리고 희망을 위한 열정을 느낀다. 남의 문화는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다. 남의 문화가 우리 문화가 될 수도 없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서양으로 유학을 떠난다. 어떠한 마음으로 떠나는 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당시 조선지식인들보다 여건이 나아졌다는 점이다. 그들의 고민과 좌절을 통해 지금의 여행속에 희망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열정만은 조선의 지식인들을 통해 배웠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인보우>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레인보우
김인희 지음 / 아이디어하우스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였는지, 양쪽 어깨가 심하게 뭉쳐버렸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도록 몸이 많이 상해버렸다. 할수없이 가까운 한의원에 가서 침맞고 물리치료 받았지만, 마음의 분은 풀리지 않는다. 직장생활, 세상사가 다 그렇다고 하지만, 서운한 감정과 아쉬운 마음이 나를 괴롭게 한다.  

그러다 무심코 들고 읽었던 [레인보우]..종교서적, 기독교서적이라고 하지만, 전반부는 우리네 소소한 삶의 모습들이고, 후반부는 기독교 성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솔직히 나는 불교에 가깝지만, 불교신자라고 할 수 없다. 일년에 사월 초팔일, 부처님 오신날에 한번 절에 다녀오니, 감히 불교신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나의 종교와 관계없이 [레인보우]는 이웃집 아주머니처럼 다정다감하게 내 마음을 다스려준다.  

특히 사람이 경계할 두가지, 교만과 태만에 대한 이야기는 마음에 와닿는다.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수에 넘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교만이요, 마땅히 바르게 생각해야 할 바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것이 태만이라. 그 얼마나 적절한 개념 정의인가. 사람들은 제대로 중심을 잡고 살지 못한다. 힘들다 싶으면 포기하고 게을러진다. 조금 잘 나간다 싶으면 이것저것 간섭하면 교만해진다. 진중하게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지 되새겨 볼 만하다. 

 또한 권위는 인격이나 직위에 대한 존경이 있어야 지켜지는 것이고 강제나 설득을 통해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 권위를 훼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비)웃음..권위를 보증받으려면 복종받는자들의 무조건적인 승인이 필요하다는 지적 역시 지금껏 불편했던 마음을 풀어주는 것 같다. 직장을 비롯한 사회생활에서 존경받는 사람에 대해서는 마음적으로 순순히 응해지고 따르게 마련이다. 단지 직위만으로 감정적으로 강하게 누르면 오히려 그에 대한 반감과 비웃음만 나온다는 점을 깨달게 된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슬픔 처방으로 추천한 브람스의 '클라리넷 5중주'나 바흐의 '무반주첼로조곡'을 들어볼까 한다. 그리고 내일부터 다시 홀가분하게 직장생활을 해야겠다. 비가 온뒤 땅은 굳어지고, 하늘에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가 내마음에 다가온다면 행복이 성큼 다가오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