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 개정판
셔윈 B. 뉴랜드 지음, 명희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상당히 오랫동안 외면받고 금기시되어 왔다.

산 자에게 죽음이란 미루고 피할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미루고 피하다가 급작스럽게 맞부닥치는 '어떤 사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웰빙(Well-being)'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과 성찰 또한 확대되고 있다.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는 40여년간 의사로 근무하면서 마주한 다양한 죽음에 대한 생생한 임상보고서이자, 의학적 관점을 뛰어넘어 한 인간으로서 '죽음'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한 자기고백서라 하겠다.


언젠가는 죽고 말 우리, 마지막 순간을 향해 한 걸음씩 서서히 나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자신의 생이 남들에게 흉한 모습을 보이지않고 마감될 수 있다는 것은 진정 축복이다. 완전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심장남이 멈춰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신체 조직은 그 나름대로의 속도에 따라 죽음의 과정에 돌입하게 된다. 죽음이란 영혼이 빠져 나갈 때처럼, '일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과거에는 심장이 박동을 멈추는 순간을 완전한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심장의 침묵 뒤에도 완전한 죽음을 향해 진행되는 소리 없는 과정들이 있다.


-셔윈 뉴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74~74 中-


갑 작스러운 죽음은 주로 심장마비와 같은 심혈관 질환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심혈관 질환은 혈관 속을 돌아다니던 찌꺼기들이 혈관을 막으면서 발생한다. 이 밖에 교통사고 등에 의한 사망은 외상에 따른 과다출혈이나 상처 부위에 염증이 일어나 발생하는 패혈증 등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서서히 한걸음 한걸음씩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 본 인생이란 결국 죽음으로 향해가는 일련의 지난한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노화'로 더 한층 구체화된다. 


저자는 할머니의 노화가 어떻게 죽음과 맞닿아 있는지에 대해서 전 과정을 간략하고도 애잔하게 묘사하면서 노화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고 있다.


나이가 많아도 얼마든지 진취적이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가 인간답기 위해서는 생물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 있다. 문제는 그러한 구성 요소들을 부정하고 물리치려는 헛된 시도이다. 죽음에 대한 불필요한 저항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가슴을 해쳐선 안된다.

생 에 정해진 한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때 비로서 인생은 군형 있는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모든 즐거움과 성취감 그리고 고통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인생의 틀이 완성되는 것이다. 자연이 내린 한계를 억지로 뛰어넘으려는 사람은 자기 인생의 틀을 잃어버리게 된다.


-셔윈 뉴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133~134 中-


이 밖에도 저자는 노화의 불청객 중 하나인 '치매'에 대해서 구체적인 임상 사례를 빌려 자세히 소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살인과 자살 그리고 안락사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특히, 날카로운 흉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경우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죽음의 고통이 그다지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해서 인간은 스스로를 방어하는 쪽으로 부지런히 진화를 거듭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극단적인 고통이 수반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에 실제로 직접 직면하게 되면 평소 생각했던 것보다 고통의 강도가 덜 하다는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극심한 고통이나 두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인체에서는 고통을 잊게해주는 혹은 그 강도를 낮추어주는 호르몬 분비나 기타 자기방어 기제가 작동되기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죽음에 이른 사람들의 마지막 표정이 고통으로 이그러져있기보다는 허탈함과 안도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고요하다는 점을 저자 역시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에이즈 환자들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의학적으로 서술하는 한편, 사회적 비난과 가족의 외면 속에서도 에이즈 환자의 죽음이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과 동성애자들이 보여주는 연대의식으로 얼마나 거룩하고 숭고할 수 있는지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암에 의한 죽음을 논하면서 저자는 의사의 '욕심'이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고통으로 몰아가는지에 대해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즉,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 그리고 암전문의들의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인해 '자기 결정권'과 '심리적 자율권'을 행사하기를 포기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의 이와 같은 지적은 어째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과 마지막 작별을 해야 할 그 시간에 환자는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철저하게 고립된 채 각종 의료장비를 주렁주렁 매단 채 낯선 의료진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도 솔직한 답변이 되리라. 물론, 의료진들의 도전정신이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의료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의료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인간의 헛된 희망과 오만함 또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의사인 저자는 바로 이 점을 '내부 고발자'와 같은 심정으로 밝힌 것이다.


의사들이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이유는 실패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본능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본래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의학은 이들을 현대 장비와 새로운 약품 등으로 유혹하고 있다. 의사들은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을, 의학의 치료 능력으로써 누를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에 의사가 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상징하는 환자, 그 환자들로부터 죽음의 마수를 떼어놓기 위해서 말이다. 의사들은 승리를 해야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승리하기 위해 우리 의사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학위를 따고, 힘든 수련 과정을 거쳐 자신의 입지를 다진다.

(......)

대부분의 의사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 특질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합당하고 합리적인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어느 선을 넘어 버릴 때, 다시 말해 통제력이 사라지게 될 때, 의사들은 자신의 무능력이 양산해낸 결과를 두려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의사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환자들보다 돌아가는상황을 더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강요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일단 결정내리고 그 결정을 환자들이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셔윈 뉴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366~367 中-


인생은 '멋진 죽음'으로 완성된다. 물론, 멋진 죽음이란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어 한마디로 정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극심한 고통속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건 결코 아닐 것이다. 완치 가능성이 낮은 각종 화학 요법을 과감하게 거부하고 집에서 생애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벗들과 훌륭하게 보내고 죽음을 맞이한 것도 멋진 죽음일 수 있을 것이다. 차가운 병원이 아닌 온화하고 따듯한 가족의 품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또한 숭고하고 멋진 죽음이 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의사의 역할을 질병의 치료에만 두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환자가 고통없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도와주는 것 또한 의사의 숭고한 사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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