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지나간다, 느낌도 흐느낌도 없이
류헝.츠리 지음, 김영철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츠리는 우한(武漢)을 무대로 작품 활동을 하는 중국의 대표적인 여류소설가이다.

 

 

 

그녀의 단편 <번뇌인생>은 창장(長江)강-한국인들에게는 양쯔강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우한시를 배경으로 한다. 압출 작업장에서 조작공으로 일하는 인자호우는 아내와 네살배기 아들을 둔 가장이다. 그의 일상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버스와 연락선을 갈아 타고 출근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침은 길거리 음식인 냉국수로 대충 때운다. 더운 국수보다 냉국수를 더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먹는데 시간이 덜 걸리기 때문이다. 한편, 말썽꾸러기 어린 아들은 피곤에 절어 사는 그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귀찮을때가 훨씬 더 많다.

 

 

인자호우가 얼른 아이를 껴안으려 했지만, 아들이 그 아가씨에게 마침 상처 부위를 차였다. 레이레이가 아파서 신음소리를 내자 그의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귀가 움찔거렸다. 아들은 그의 어깨에 매달리면서 찰싹 하고 그 아가씨의 빰을 한 대 때렸다. 많은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그 아가씨는 잠시 멍해 있다가 갑자기 엉엉 울어버렸다.

두 부자는 완전히 승리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아들은 가슴을 쑥 내밀고 배를 집어넣으며 아주 흡족해하면서, 작은 엉덩이를 불룩 내밀고 깡충깡충 뛰었다. 인자호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었다. 그는 왠지 아들처럼 기뻐할 수가 없었다.

-츠리, 번뇌인생 中-

 

 

단위(單位: 직장) 역시 인자호우에게는 자아실현의 장(場)이라기보다는 약육강식의 원칙이 철저히 지배하는 정나미 떨어지는 곳일 뿐이다. 직장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집도 아직 배정받지 못했고 순번제로 돌아가는 장려금마저 인자호우가 탈 차례가 되자 평가제로 바뀌어 3등으로 밀려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이 그에게 쥐꼬리만한 월급말고 부여하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면 그건 바로 직속 여자 부하인 야리와의 로맨스일 것이다.

 

 

야리가 깔깔거리며 예쁘게 웃었다. 얼굴이 태양처럼 밝게 빛났다. 그녀가 말했다.

"인생에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한 명만 얻어도 족하느니라."

인자호우는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야리는 종종걸음을 치다가 훌쩍 뛰어 분홍색의 협죽복숭아꽃 한 송이를 따서 공중으로 후 불어 날렸다. 마치 한 마리 새끼사슴같이 천진하고 발랄한 모습이었다. 실룩거리는 엉덩이와 솟아오른 가슴이 아주 섹시해 보였다.

(......)

야리는 여인이 자주 사용하는 고통스럽고 쉰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이미 결심했는걸요. 아무것도 원하는 건 없어요. 영원히 원하지 않아요. 선생님도 절 원하지 않으세요?"

인자호우는 말했다.

"야리, 너는 아직 너무 어려......"

"그런 얘기는 하지 말아요!"

"너 아직 모르겠니?"

네, 몰라요! 선생님 솔직히 말해 보세요. 사실은 절 좋아하지 않는 거죠?"

"아니야! 내가 왜 널 좋아하지 않겠니"

"그럼, 왜요?"

"야리, 이해 못하겠니? 넌 우리 집에도 온 적이 있잖니?"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나는 다른 곳에서 생활하는데. 전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아요. 선생님도 그렇게 살아서는 안 돼요. 그건 너무 재미없고, 힘들고 사람을 매몰시키는 거예요."

인자호우의 머릿속에서 웅웅하는 소리가 났다.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츠리, 번뇌인생 中-

 

 

의식주 문제도 아직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랑은 사치일 뿐이다. 인자호우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매몰차게 그 사랑을 거절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사람을 질식시키기에 충분한 늪과 같은 삶 속에서 피어난 한송이 연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인자호우의 정신적 외도는 분명 부부간의 순결 서약에는 위배되지만 기껏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작가는 어쩌면 인자호우라는 인물을 통해 삶의 조건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범인의 초상을 그리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성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발현되는 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인간성을 발휘하고 도덕성을 논한다는 것은 오히려 더 비현실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성인 군자도 상황이 허락되어야지 마음 먹는다고 누구나 성인 군자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츠리의 <번뇌인생> 속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최선을 다하지만 형편은 좋아질 기미가 없는 인자호우, 생활의 무게에 찌들대로 찌들어 버린 그의 안내, 어린 아이다운 동심보다는 제 몫을 먼저 챙기는 걸 배워버린 아들 레이레이......

 

인간이 이처럼 연약한 존재라면 우린 자기 자신을 최대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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