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자란다 - 아라이 연작 소설
아라이 지음, 양춘희 외 옮김 / 아우라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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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에는 '一方水土一方人'이란 표현이 있다. 사람은 나고 자란 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인인 아라이의 작품은 전혀 중국적이지 않다. 중국 소설 특유의 익살이나 허풍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흔적조차 없고 서사적 구조 또한 단순하기 그지없다. 중국인에 의해 중국어로 쓰여진 소설이 '중국'답지 않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작가가 그만큼 중국인의 색채를 띄고 있지 않거나 중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1959년 쓰촨성 서북부 티베트 자치구인 마얼캉현에서 태어난 작가는 티베트인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이 '중국적'이지 않다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티베트인은 중국 한족과는 전혀 다른 생활풍습과 종교와 사유세계를 갖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 당대 작가의 작품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아라이의 목소리는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마음을 비우고 오롯히 티베트적인 분위기에 젖어 보려 노력했으나 몇 몇 작품을 제외하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티베트와 티베트인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적고 얕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라이의 작품은 신,구 시대의 변화와 위협받는 민족 정체성을 담담하게 그려냄으로써 아려한 아픔을 자아낸다.

 

 

거라는 빈총을 내던지면서 소리쳤다.

"왕! 왕왕!"

"왕왕! 왕!"

그가 흉내낸 사냥개 소리는 경쾌하면서도 낭랑하게 숲 전체를 가득 채웠으며, 그 누구도 자신을 침범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이 동물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거라가 오늘 총을 쏜 것이 처음이라면 개 짖는 소리는 마을 전체에서 제일 잘 냈다. 그는 여러 곳에서 개짖는 소리를 배웠다. 사람들이 말했다. "거라, 한번 짖어봐."그러면 거라는 왕왕 짖어댔다.

(.....)

 

"거라는 자신이 엄마와 똑같이 피를 흘렸고 엄마와 똑같은 신체적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밖에선 눈 내린 뒤의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방 안에선 화로 속의 불꽃이 타닥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따스한 공기 속에서는 아들과 엄마의 피냄새가 떠다녔다.

(.....)

 

엄마가 말했다.

"그 곰 정말 크더라."

"엄마의 비명소리를 들었어요. 많이 아팠어요?"

"많이 아팠지. 듣기 괴로웠나 보구나?"

"아니에요. 엄마"

엄마가 눈물을 반짝이면서 머리를 숙여 거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엄마의 몸에서 젖냄새와 피냄새가 물씬 났다. 거라의 몸에서도 한약냄새와 피냄새가 물씬 났다.

아라이, <소년은 자란다> 中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소년 거라와 역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동생을 출산하는 엄마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다름 아닌 '피'이다. 소녀가 출산의 고통을 겪은 후 여자로 거듭나듯, 소년 역시 사냥을 통해 남자로 거듭난다. 소년은 엄마가 동생을 출산하는 사이, 동네 아이들의 사냥을 따라갔다가 무섭게 자신을 추격하는 곰을 쓰러뜨린다. 진정한 남자의 길로 자신을 이끌어줄 아버지가 없는 소년은 이렇게 스스로 성장한 것이다. 마치 엄마 쌍단이 떠돌이 몸으로 지촌 마을에 정착하여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아들 거라를 낳고 또 다시 거라에게 예쁜 여동생을 낳아주었듯이...

 

 

아라이의 <소년은 자란다>는 마치 한편의 영화와도 같다. 짧은 단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주제의식과 함께 시각과 청각 뿐만 아니라 후각까지 효과적으로 자극한다.

 

 

작품은 새하얀 눈(雪)이 내리기 시작하는 어느 날. 출산을 앞둔 엄마와 아들이 흘리는 붉은 피(血)가 선명한 시각적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총소리와 개짖는 소리 그리고 비명 소리가 간간히 귓전을 울린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의 젖비린내와 엄마의 젖냄새 및 피비린내 그리고 거라의 상처에서 나는 한약냄새와 피냄새 등이 콧속을 파고 든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려 있던 기승전결에 따른 스토리 라인이 선명한 명작 한편을 접한 기분이다.

 

훌륭한 작가는 '경험을 재현하지 않고 주제를 구현한다'고 했던가.

이 점에서 볼 때, 아라이는 자신이 성장한 티베트 마을 지촌에서 겪은 경험을 배경으로 '인간과 삶'이라는 주제를 아주 잘 구현해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중, <소년은 자란다>이외에도 마차가 마을에 들어온지 채 십년도 안 되 트렉터에게 자리를 내주고 마는 마부의 이야기인 <마지막 마부>와 도량형 통일이 된 줄도 모르고 여전히 800g을 한근으로 표시하는 구식 저울에 일편단심 목매달며 살던 늙은 촌부를 그린 <옛 저울추> 그리고 사원에서 보물을 훔친 도둑을 잡아 가둔 후 훔친 보물을 빼돌리려는 경찰과의 추격전 끝에 고작 맥주 한병 훔친 죄밖에 없는 '쌍지'의 헛된 죽음을 묘사한 <막다른 길>등이 인상적이었다.

 

 

끝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한국 작가 채만식이 1940년대에 쓴 <소년은 자란다('없어진 아버지')>란 중편소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라이의 작품과 동명소설로, 간도 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다룬 이 작품은 <탁류>와 함께 채만식의 대표작이라 하니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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