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럽인가 - 세계의 중심이 된 근대 유럽 1500~1850
잭 골드스톤 지음, 조지형.김서형 옮김 / 서해문집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케네스 포메란츠의 <대분기>와 엇비슷한 2000년대 초반에 나온 경제사 책이다. 둘 다 기존의 프로테스탄트나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1500~1850년 동서양 사회를 비교해서 서유럽 특히 영국 산업혁명의 원인을 밝혔다. 


1500년까지 유럽은 결코 동양보다 앞서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과 일본 및 인도 등 아시아 제국들이 훨씬 풍요로웠다. 유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발전된 도시와 장인 기술 및 인구성장 등은 양쯔강 하구로 대표되는 비옥한 토지와 땅에 부담을 덜 주는 비료 사용 및 안정된 중앙집권적 통치 제도와 활발한 역내외 교역 그리고 '근로혁명'(특히, 일본)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아시아인의 놀라운 성실함 덕분이었다. 




따라서 중국 농민은 토지를 경작하는 일에 많은 목축을 투입할 필요가 없었으며 어떤 토지도 휴경지로 묵혀 둘 필요가 없었다. 농업관개와 (일반적으로 돼지의) 거름은 가벼우면서도 비옥한 토양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중국 북부의 평원에서 재배한 곡식은 유럽의 것, 즉 밀, 기장, 콩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도 중국인은 토지면적당 그리고 농민 1인당 유럽인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곡식을 생산하고 더 많은 수공업자와 도시 노동자를 부양했으며 더 많고 더 큰 도시를 유지할 수 있었다. -35쪽

더욱이 이 시기에 전반적인 기술적 리더십을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다른 기술이 다른 장소와 다른 시기에 나타나 발전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외바퀴 손수레, 운하, 운하 갑문, 자성 나침반, 거대한 지역의 정확한 지도 제작, 선미재 방향키가 달린 선박, 대양 항해 선박, 화약, 주철(무쇠), 도자기, 비단, 인쇄, 종이를 발명하거나 발전시키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술에서 중국의 초기 선도적 역할, 즉 방수가 되는 선실 목재 가구와 강력한 삭구 그리고 돛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전문 기술에 요구되는 복합 기술을 도해로 이해하기 위해, 그림 22-3에서 아메리카로 항해할 때 콜럼버스가 사용한 선박과 정화 제독이 지휘한 중국 선박을 비교해 보자. 콜럼버스의 항해 80여 년 전, 정화의 함대는 북중국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해안까지 항해하고 귀국했는데, 이는 콜럼버스가 스페인에서 북아메리카까지 다녀온 항해보다 훨씬 더 먼 장거리 항해였다.

인도는 다양하고 뛰어난 질의 면직물 생산에서 전 세계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무슬림 세계는 향신료를 생산하고 황동과 목재 상감으로 물건을 제작하는 데 뛰어났으며, 질 좋은 융단과 카펫을 생산하는데 탁월했고 현재도 그러하다. 유럽에서 베네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질 좋고 순전한 유리를 생산했으며, 잉글랜드는 다양하고 뛰어난 질의 양모 직물을 생산했고 네덜란드는 어업, 인쇄, 양조에서 뛰어났다.  -65쪽



이때,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했을까? 

동서양이 이렇게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다. 전쟁은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일본을 다녀온 조신통신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들었던가?

당시 에도를 방문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에도는 인구 20만이 넘는 대도시로 밤에도 시가지에 불이 훤하게 밝혀져 있고 청결하면서도 화려하고, 사람들은 모두 잘 차려 입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서 마치 천국같다.라고 했다.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의 눈에도 분명 에도는 한양보다 더 크고 더 발전되고 더 풍요롭게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왜?" "어떻게?"라는 의문을 품는 대신 "유학도 모르는 미개인 주제에 감히!"라는 자만심만을 가졌을 뿐이다. 지도층의 권력 독점을 위해 새로운 사상이나 문물을 거부하고 기존 종교(조선의 경우엔 유교)나 과거의 전통으로 회귀하려는 사회는 혁신과 발전이 가로막혀 도태된다는 저작의 지적에 조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었다. 




요약하자면, 1800년까지 영국과 중국 모두는 경제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경험했고 식료품과 면직물 생산에서 더 중요한 증대를 과시했다. 그러나 어느 국가도 더 높은 생활수준으로 나아가는 어떤 진정한 의미의 전환기적 발전을 마련하지 못했다. 양국 사회는 생활수준과 관련해 이전 수세기 동안의 장기적 주기의 범주 안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기후, 인구 그리고 임금의 장기적인 상승과 하락은 생활수준의 상승과 하락을 재생산했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진정한 전환기적 발전은 여전히 미래에 있었다. 경제 발전의 가속 패턴은 1800년 이후가 돼서야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처음 영국에서 시작되어 서유럽, 동아시아 그리고 나머지 세계에 확산되었다. 따라서 1800년 유럽과 아시아의 선진 농업 문명들은 동일한 수준에서 영위되고 있었다. -75쪽



20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케네스 포메란츠와 잭 골드스톤의 책들은 각각 2000년, 2003년에 출간되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워낙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No"라고 말할 수 없었다. 물론, 막스 베버가 활동하던 20세기 초에는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 대한 역사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19세기의 제국주의 사조 속에서 베버의 주장은 '식민지배와 노예무역' 등 서구인의 흑역사를 건드리지 않고도 서구의 우월함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신선함을 너머 탁월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암튼, 그 뒤 반 세기 동안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해졌고 많은 사료들이 발굴되고 연구되면서 서구의 일방적인 '자화자찬'식 주장은 그 자체로 또다른(!) 역사가 되어버렸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주요 종교의 사원과 교회는 상당한 부를 축적했으며, 이들의 지도자들은 세속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이러한 상호 옹호의 합의에 대가를 지불한 사람은 일반 농민과 노동자, 귀족이 아닌 상인과 수공업자들이었다. 그들은 일반 성직자, 주교, 귀족, 왕을 부양하기 위해 세금, 십일조, 수수료, 부과금을 지불하는 성스러운 의무를 짊어져야 했다. -91쪽 



'종교는 권력의 편'이었다.

종교가 혁신과 인류 발전에 이바지했을 때는 다양한 종교와 분파들이 공존하면서 서로 경쟁하던 다원주의와 대관용의 시대 뿐이었다. 오히려 프로테스탄트(신교도)는 가톨릭 및 영국 국교회와의 경쟁에서 밀려 신대륙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후손들이 자본가로 성장한 건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였기 때문에 1700년 대의 산업혁명에 대한 원인이나 이유가 될 수 없다. 



사실, 1500년에서 1700년까지 가톨릭교회는 과학 발전에 개방적이고 지지하는 입장을 종종 견지했고, 대기 압력의 존재에 대한 전환기적 발견은 두 명의 가톨릭 신자인 이탈리아의 토리첼리와 프랑스의 파스칼이 성취한 것이다. 16세기와 17세기 과학혁명의 출현은 프로테스탄트적인 것이 아니라 범유럽적 창조물일 뿐 아니라 가톨릭 사람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간단히 말하면, 영국이 19세기 초 세계의 지배적인 기술적 산업적 군사적 강대국으로 등장했으며 그 후 100년간 나머지 유럽 국가들이 그 뒤를 따라간 것이 사실이지만, 이 발전이 단순히 일반적인 서양 종교 혹은 심지어는 프로테스탄티즘 혹은 각별히는 칼뱅주의의 특징과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 산업 강대국으로서 영국의 등장은 상대적으로 최근이며 많은 측면에서 독특하며 가톨릭교를 포함한 많은 기독교 국가에서의 더 폭넓은 추세와 매우 동떨어진다. 지난 1000년의 거의 모든 기간 동안 , 발명, 경제 발전 그리고 글로벌 무역의 추동력은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이슬람 국가 출신의 학자, 수공업자, 대양 항해자였다.- 99쪽

분명한 것은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사회에서 다양한 종교적 견해가 공존할 때 경제 발전이 가장 잘 번창하게 된다는 점이다. 반면에 국가가 종교 사상의 가혹한 통일성을 강제할 때 경제성장은 제한되고 점차 쇠퇴하게 된다. 관용이냐 아니면 엄격한 정통 신앙이냐 양자 사이의 선택은 모든 종교적 전통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세계 역사상 경제성장 패턴을 연구하는 데 어떤 특정 종교의 성격보다도 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106쪽



대다수 서구인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신봉하는 것 못지 않게 대다수 비서구인은 '식민 지배와 노예제'을 동서양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식민 지배와 노예제는 서유럽(스페인과 포르투갈)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로마제국이나 고대 이집트 및 아시아 제국도 오랫동안 여러 곳의 식민지를 다스렸고 노예제의 역사 또한 깊다. 그리고, 강한 편이 약한 편의 잉여생산물을 무력으로 약탈하거나 불평등한 물물교환을 강요한 것 또한 인류 역사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중국이 주장했던 조공무역 역시 형식만 다를 뿐 강대국과 약소국이라는 관계 설정을 기본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평등하거나 대등한 교역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왕친조와 삼궤구고두례를 강요함으로써 상대에서 굴욕감을 준다는 점에서 단순한 무력 시위나 공격보다 더한층 정교한 정치, 외교적 수단에 가깝다. 

교역과 약탈은 늘 동전의 양면과 같다.  




1860년대까지 증기력을 사용한 전함은 성조기나 유럽의 여러 국기를 휘날린 채 지구 곳곳을 항해했고, 철로의 네트워크는 대륙들을 가로 질러 전례 없는 속도로 상품과 사람들을 이동시켰다. 권총이나 소총이 대량생산되었으며, 새로운 디자인이 개발되면서 정확성이나 발사율 또한 증가했다. 이러한 변화는 19세기 동안 계속 나타났으며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통제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싼 가격에 원자재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대부분의 국가들은 어려움에 처했다. 중국의 경제와 행정은 인구 성장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반란과 13년(1851~1864년) 동안 지속된 내전(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했다. 수천만 명이 죽었고 제국의 중앙 권력은 붕괴되었다. 일본에서 쇼군은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에 직면했고, 오스만제국의 술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에서 수세기 동안 성행했던 노예화와 교역자들 및 식민지 개척자들의 탐욕스러운 욕구 때문에 한때 강력했던 아프리카 여러 왕국은 약화되었다. 
19세기 내내 이와 같은 정반대의 추세가 성행한 결과, 유럽 국가들 (그리고 미국)은 약화된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력을 행사하거나 보다 값싼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이 권위와  통제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새로 개발된 증기선이나 전함으로 중국이나 일본을 위협하거나 철도와 근대 무기로 아프리카를 지배하는 데 자신들의 장점을 활용한 것은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서양을 강대국으로 등장하게 한 것은 식민주의와 정복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서양의 등장과 다른 세계의 몰락이야말로 유럽 국가들이 전 지구상으로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던 요건이었다. -138~139쪽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대분기'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1700년까지는 동양이 서양보다 조금 나은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1800년까지도 둘의 차이는 그닥 뚜렷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1850년엔 확실히 둘의 차이는 명백하고도 분명했다. 

사실, 변화는 조금씩 천천히 일어났고 눈에 보이지 않게 쌓여가다가 1850년에 임계점에 다다르자 둘의 격차는 더욱더 벌어졌다. 양적 변화는 처음엔 산술급수적이지만 일정한 점을 통과하면 기하급수적으로 바뀌면서 질적 변화를 이끌게 된다. 20대엔 친구들과 연봉이 비슷하지만 30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기술습득이나 경력이 쌓이면서 소득 차이가 서서히 들어나기 시작하지만 아직 현격하진 않다. 40~50대에 이르면 투자(특히 집)나 승진 등에 따라 이젠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 격차가 두드러지며, 60대 이후에는 서로 다른 계층에 속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엄청난 차이를 만드는 그 시작은 단순하다. 그러나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17세기와 18세기에 유럽과 아시아를 통틀어 지배자들은 지방 엘리트로부터 거둔 조세를 토대로 더욱 강력해졌고, 전통 종교를 더욱 강화시킴으로써 정치적 위기에 대응했다. 이 가운데 예외적이던 곳은 바로 영국인데,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더 강력해진 의회, 독특한 관습법, 종교적 다원주의와 관용은 영국을 대단히 특이한 국가로 만들었다. -188쪽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전통을 강화하고, 청과 조선은 유교라는 학문을 빙자한 교리로 사회질서를 다듬기에 급급하는 동안, 서유럽 특히 영국에선 왕과 귀족층의 권리를 제한하고 종교 대신 관습법(흔히, 말다툼할 때 '그런 법이 세상에 어딨어?'에서의 그 '법')을 택하게 된다.  성문법은 법을 만든 자(권력자)와 집행하는 자(성직자나 관료)의 권한을 높이고 보호하는 한편, 관습법은 오랜 시간 동안 해당 지역 사람들이 따르고 지켜왔다는 점에서, 관습법을 중시한다는 건 소수가 다스리는 사회가 아닌 일반 대중의 의견을 중시하고 따른다는 의미다.  법률적으로 비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묻는 배심원 제도 역시 소수에 의한 법의 독점을 막고 다중의 판단을 중시하겠다는 영국 시민 사회의 관습법 중시가 구현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 편은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이익과 권한을 지키는 길을 선택했고, 또 다른 한 편(영국)은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이익과 권한을 제한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작은(?) 차이가 위대한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종교나 왕의 법에 얽매이지 않게 된 영국인들은 개개인이 단독자로서 신 앞에 평등하다는 의식과 함께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처음엔 주로 먹고 살 고민과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유한계급들이 심심풀이(?)로 실험과 연구를 시작했음은 당연하다. 



170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발생한 것은 틀림없다. 18세기 초부터 유럽의 선진 국가들은 더 발전한 아시아 국가들의 기술이나 생산성을 따라잡기 시작했고, 결국 경제적, 군사적 독점을 위한 행로를 시작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산업혁명"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유용한 것이라는 결과로 간주하지 않고, 기술혁신의 속도가 빨라지고 새로운 동력이나 기계, 발명과 기술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물질적 생활이 향상되기 시작하는 과정으로 간주한다면, 산업혁명은 170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유럽, 특히 영국에서 발생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231쪽



이제 유럽이 어떻게 앞서게 되었는가를 확인했으니,  중동과 동양은 어떻게 뒤처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한다. 아니, 어쩌면 승자의 승전보보다는 패자의 실패담으로부터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다. 

'그 많던 제국들은 어떻게 사라져갔는가?'



점차 과학은 종교적, 철학적 신념과 혼합되기 시작했고, 이는 기존 종교 속에 융해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과학이 정치적, 종교적 권위에 억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특히 정통 신앙을 토대로 하는 보수주의나 종교를 통해 국가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경우에는 더욱 심했다. 
둘째, 전근대 시대의 거의 모든 과학은 수학과 자연과학으로 분리되었다. 수학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세거나(산술학), 공간의 관계들(기하학)을 살펴보는데 유용했다. 또한 이는 관측과 같은 실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매우 유용했다. 그리고 항해를 위해 하늘에 나타난 행성의 위치 편집이나 달력, 점성술 그리고 통계에도 유용했다. 그러나 전근대 시대의 과학적 전통ㅡ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중세 유럽인들, 아랍인들, 중국인들ㅡ은 수학이 우주의 기본 구조를 연구하는 데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학이야말로 자연과학(자연 세계에 대한 연구)이나 신학(인간과 자연 세계, 창조주의 관계를 포함하는 종교적 문제에 대한 연구)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만약 누군가 신이나 영혼의 본질을 알고 싶어하거나 인간과 신의 관계, 또는 동물의 용도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ㅡ식물이나 바위, 불, 공기, 액체, 가스, 수정 등ㅡ의 본질을 알고자 한다면, 이는 수학 방정식이 아니라 경험과 논리를 토대로 하는 추론의 문제였다. 자연과학의 과업은 사물과 그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 측정은 실제적 문제였고, 주로 관측자나 장인, 금융업자 같은 사람들이 측정하는 것이 유용했다. -265쪽

중국과 인도에서 전통은 자연의 숨겨진 힘ㅡ중국에서는 기(氣), 인도에서는 프라나(prana)ㅡ를 믿었다. 이러한 힘이야말로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중국 과학자들에게 세계는 늘 변화하는 것이었고, 변화들은 복잡한 주기를 형성하고, 전체적인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작용하는 반대 세력의 복잡한 주기나 흐름을 형성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엄청난 기술과 수학의 활용 그리고 운하나 관개에서부터 천문학과 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의 관찰에도 불구하고, 중국 과학자들이 우주를 기계적인 시계 장치로 간주하거나 자연적인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수학 방정식을 적용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이들에겐 음과 양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상황 속에서 작용하는 기의 흐름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했다. 이는 지나침을 억제하고 전체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266쪽

요컨대, 17세기에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전통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지식이 더 이상 강화되지 않고, 대신 이성과 관찰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지식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매우 독특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1700년이 되면 서로 다른 두 가지 접근방법이 발생했다. 영국에서 본질에 관련된 연구는 정교한 기구나 도구 그리고 공개적 증명을 토대로 하는 실험과 측정을 통해 수행되었다. 대륙에서는 실험을 개인적인 연구 영역으로 국한시키거나 오락의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수학과 논리학이 과학 연구의 토대를 형성했다. 
우리는 데카르트주의가 논리적 그리고 수학적 사유를 토대로 새로운 지식 체계를 형성했고, 이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과 가톨릭교회의 종교적 가르침을 토대로 한 전반적인 지식 체계를 위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발견과 종교적 갈등의 결합은 지식에 대한 길잡이가 되면서 전통과 종교의 권위를 침해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데카르트적 체계의 확산은 불가피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에서 왕립 학회의 경험주의자들은 지식 습득에서 네 번째이자 가장 낮은 형태인 일상생활에서의 실험을 통해 지식을 획득했고, 이를 새로운 것으로 변화시켰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연역론에 회의적이었다. 도구와 과학 기구를 사용한 실험을 통해 과학 지식을 쌓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으로 이전에는 한 번도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던 지식의 다섯 번째 근원이 발전했다. 다시 말해,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망원경이나 현미경, 프리즘, 진공 펌프 그리고 다른 도구를 가지고 관찰한 결과가 고대 시대나 종교, 연역론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관찰로부터 얻은 지식보다 훨씬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세계사의 맥락 속에서 그리고 특히 17세기 유럽에서 이는 상당히 혁신적이고 놀랄 만한 주장이었다. -280~281쪽



한마디로, 데카르트의 대륙철학은 '제논의 역설'을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합리적이라고 본 것이다. '제논의 역설'이란 화살은 활시위와 과녁 사이의 중간 지점을 반드시 통과하게 되므로 영원히 과녁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건데, 현실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관찰과 실험을 중시했던 베이컨식의 영국 경험주의가 옳았던 것이다.     




1850년 이후 한 세기가 지난 뒤에도 여전히 서양은 앞서가고 동양은 추격하는 형세는 바뀌지 않았다. 물론, 이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포기한 국가와 지역이 생긴 것처럼 새롭게 경쟁에 진입한 국가와 지역도 있었는데, 천만다행이도 우리나라는 후자에 속한다. 한국은 레이스에 새롭게 등장해 맹추격을 해서 다크호스로 부상했지만 여전히 선진국과의 격차는 크며 우리의 속도보다 우리를 뒤따라오는 후발 주자의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맹추격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나라는 과거보다 국격이 높아졌다고 기뻐하며 소위 '국뽕'에 취해 있기엔 지속적이고도 항구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내재적 역량, 즉 기초체력이 부족하다. 선발진에 진입할지 아니면 중진이나 후진 그룹으로 뒤처질지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해 보인다. 

바로 다음과 같은 성장을 가로 막는 장애물들을 스스로 쌓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다.  



첫 번째, 부존자원의 판매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저개발의 수렁에 떨어질 수 있다. (...)  아르헨티나는 양모와 쇠고기를 판매했고, 쿠바는 설탕을 팔았으며 잠비아는 구리를, 나이지리아와 멕시코는 석유를, 브라질과 말레이시아는 고무를 판매했다. 이외에도 많은 사례가 있다. 그들의 상품을 고가로 판매할 수 있는 한, 그 나라의 모든 것은 잘 되어 나간다. 그러나 산업 세계가 슬럼프에 빠지고 수요가 떨어지거나 다른 생산국이 시장에 들어오거나 인공적인 대용품이 발견된다면, 그 상품의 시장은 붕괴하게 된다.  (...) 설탕 혹은 커피 혹은 구리 혹은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는 일은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 혹은 기술의 큰 진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더욱이 가치와 수익에서의 실질 이익은 이들 상품을 생산한 국가에게 축적되지 않고 이들 상품을 사탕 혹은 화려한 커피 음료 혹은 구리선 혹은 다이아몬드 보석으로 전화시킨 가공업자에게 축적된다. 가장 큰 금융 이익은 원재료를 생산하는 일에서가 아니라 가치 있는 생산품을 가공하고 창출하는 일에서 나온다. 이들 상품을 판매해 이득을 보는 특혜의 엘리트들이 있는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미숙련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엘리트들은 광범위한 기술교육을 일반인들에게 제공하기를 원치 않는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위협할 수 있는 권력 혹은 후원 세력의 원천이 될 수도 있는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는 산업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두 번째, 장애물은 잘못된 종류의 교육에 대한 투자다. 서양의 성공을 관찰한 많은 국가는 서양의 성공이 광범위한 교육, 사상의 자유, 장인의 기술 교육 그리고 과학적으로 숙련된 기술자 생산에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그들은 종류에 상관없이 대학 교육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수많은 인문학 전공자와 전문가를 고용할 수 있는 근대적 경제를 창출하는 공학적 기업적 능력을 육성하지 않은 채, 법학, 행정학, 사회과학, 예술, 인문학, 의학, 회계학, 심지어 신학의 전통적인 기술로 대학생을 훈련시키는 데 수백만 달러를 낭비했다. 그 결과, 과도하게 교육받은 남녀의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고 경제성장보다 사회불안에 빠져 들어갔다. 

세 번째 장애물은 새로운 산업을 창줄할 수 있는 훈련, 아이디어 그리고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회의 부재다. 공산주의 국가(쿠바처럼)든 비공산주의 국가(인도처럼)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근대적 교육제도를 발전시키고 수천 명의 뛰어난 과학자와 재능있는 공학기술자를 훈련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거나 그들의 아이디어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생산 할당량을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 소유의 공장에서 일을 하도록 배속되었다. 유능한 과학자들과 공학기술자들은 다른 지역에서 개발된 모델을 수입하거나 모방함으로써 종종 생산 목표를 충족시키고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제품과 생산공정 창출에 기반을 둔 자기 자신의 회사와 기업을 출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공학기술자와 산업가들에게 부여하지 않은 채, 사회주의 국가들은 글로벌 경제 선도 국가들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다. 

빈곤으로 치닫는 네 번째 요소는 폐쇄적인 경제의 창출이다. 미국, 영국, 일본을 포함한 많은 성공적인 국가는 특정 산업을 보호하거나 혹은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특정 회사나 산업을 도와주기 위해 시장 제한 혹은 관세정책을 활용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목적은 항상 무역에서 이익을 증대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무역을 전적으로 폐쇄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많은 개발도상국은 서양과 나머지 비서양 국가들 사이의 격차에 반응해 서양의 제조품에 문을 닫고 그 대신 자신들의 공산 제품을 생산한다. 처음 이런 정책은 좋은 아이디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경제를 닫아버린 채, 이들 국가들은 혁신을 이뤄 경쟁할 수 있는 공학기술자들에게 주어쟈야 할 기회와 동기도 없애 버렸다. 사회주의 국가처럼, 이들은 시대에 뒤진 생산기술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 이들 사회의 경제가 경쟁에 개방되자, 비로소 경제성장이 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빈곤으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은, 오늘날의 세계에는 좀더 드물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역사 속에서 매우 흔하게 일어났던 것으로, 종교의 정통 신앙이 혁신을 질식시키거나 종교 교육이 과학기술 교육을 지배하거나 대체하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존경받을 만한 성취로 간주되기보다는 죄악으로 간주되거나 혹은 정통 신앙의 연구가 위신과 보상에서 현대과학 연구보다 훨씬 더 존경스럽다고 간주되는 곳에서는, 혁신은 일상적인 경제생활의 토대가 전혀 되지 않는다. -306~308쪽 중  




이상의 다섯 가지 장애물 중,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두 번째 장애물이 현재 우리 사회 곳곳에 칸막이처럼 들어차 소통과 혁신과 개방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저자의 지적처럼 불필요한 인문계 고등 교육에 대한 투자를 대폭 줄이고 그 대신 초등, 중등 교육과 기술 교육에 치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 유럽인가?' 라는 질문을 '왜 우리는 못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본다면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한다면 반드시 일독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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