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 개정 증보판 페이퍼로드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페이퍼로드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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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한국사다. 

이븐 할둔의 <역사 서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이어 인도와 중국 및 일본의 역사를 훑어본 후, 마침내 한국사에 이르렀다.

한국사는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대적 상황과 저자의 관점에 따라 같은 역사적 사실이라도 다르게 설명되며 나 또한 나이 먹어 감에 따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2000년 대 초반에 나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우리 역사 책으로, 80~90년 대 좌파적 역사 사관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선 누락(?)되었던 발해를 통일신라와 같이 한반도의 역사로 보아 '통일신라시대'라는 표현 대신 '남북국시대'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발해에 대해선 조선 후기 유득공이 <발해고>를 쓰면서 처음으로 우리 역사로 인식되었단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 80년 대까지 우리나라 역사계에선 철저히 무시되었다가 2000년 대 초반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로 발해를 완전한 한반도 역사로만 편입시키려는 주장이 펼쳐졌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발해사는 어느 한 나라의 역사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발해 건국자 대조영이 100% 고구려인이 아닌 혼혈이었으며 인구수로만 보면 말갈 등 북방 유목민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본 역사서 등에서도 확인되는 바,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분명히 밝히고 신라와 당에 대해선 끝까지 적대적이었다. 

저자의 지적처럼 앞으로 발해사에 대해선 러시아, 중국, 남북한의 더욱 활발한 공동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건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와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였다. 

소수림왕이 다지고 광개토대왕 때 드넓은 영토를 정복해서 장수왕 때는 국력이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어째서 갑자기(아무런 설명도 없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긴 걸까? 

저자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으로 장수왕의 평양 천도를 꼽고 있다.


"15년(427년) 서울을 평양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중 <고구려본기>, 장수왕조 (p48)


잘 알다시피,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에서 기록된 역사서다. 그러니 고구려에 대해서 중립적일 수는 없지 않았을까. 김부식이 이렇게 짧게 사실만을 남겨놓은 건 실제로 이유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거나 물어보지 않아도 누구나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라와 백제를 치기 위해서 15년(427년) 서울을 평양으로 옮겼다." 


당시 중국 대륙은 588년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5호 16국 혼란기였다. 그러므로 장수왕은 당연히 우선 등 뒤를 안전하게 만든 후 대륙 진출을 노렸을 것이다. 수도를 평양으로 옮겨 백제를 한강 이남으로 밀어냈지만 백제의 저항과 군사력이 만만찮았고 수, 당과의 연이은 전쟁으로 힘이 빠졌는데 이때 신라가 당나라와의 연합이라는 신의 한수를 꺼내들면서 고구려는 진퇴양난에 빠져 급격히 기울고 만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게 고구려의 국운이었을 뿐이다. 만약,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지 않았더라면 전혀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겠지만 그게 반드시 고구려의 삼국통일과 대륙 차지라는 영광의 역사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한반도와 대륙 사이에 자리한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대륙 세력과 맞부딪혀 먼저 무너졌다면 백제와 신라까지 오늘날엔 중국 대륙과 한 나라가 되어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장수왕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연개소문에 대해 살펴보자.

북방 오랑캐를 물리친 자랑스런 고구려 장수에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매국노(?)라는 혹평까지 고대사 인물들 중 연개소문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이도 드물 것 같다.  

이 책의 저자는 연개소문이 영양왕을 퇴위시키고 보장왕을 왕으로 추대한 가장 큰 이유로, 영양왕을 필두로 한 대신들이 당에 대해 사대주의를 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구려는 수 문제 시절 먼저 수나라를 공격했다가 수 양제 때 세 차례에 걸쳐 침략을 당하지만 모두 잘 막아냈다. 그 유명한 살수대첩과 안시성 싸움 등이 모두 선비족인 탁발 씨가 세운 수나라에 대한 승리였다. 고구려 정벌과 패배로 국력이 급격히 떨어진 수가 멸망한 뒤 들어선 당나라 역시 선비족이 세운 나라로, 당 태종과 고종 모두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이번에도 연개소문이 잘 막아냈다. 하지만 신라 김춘수 등이 당과 연합하여 백제(660년 멸망)에 이어 고구려(668년 멸망)도 무너지고 만다. 연개소문은 666년 사망할 때까지 대륙의 공격을 꿋꿋히 버텼지만 그가 죽은 후 세 아들이 모두 나라를 나누어 당과 신라 등에 갖다바쳤다.

결과적으로,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잘못'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연개소문 (가문)이 고구려를 팔아먹었다는 말이 아주 근거 없는 건 아니다. 



한편, 찬양 위주로만 배웠던 (통일)신라에 대해서도 빛과 그림자가 모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외세인 당을 끌여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의 영토 2/3 밖에 차지하지 못했다는 게 '신라의 그림자'라면, 일찌감치 당의 야욕을 파악해 당과의 전쟁을 미리 준비해 물리쳤다는 건 '신라의 빛'이라 하겠다.

만약, 이때 신라의 기득권층이 19세기 말 조선처럼 스스로 자강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사치와 세도정치를 일삼으면서 민란마저 청과 일본 군에 의지했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보다 국사력과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부족했지만 지도층의 솔선수범으로 약점을 보완하여 백성들의 희생과 일치단결을 이뤄냈다.

나는 (경상도 출신이 절대 아니지만) 신라의 아니 우리민족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이점이라고 생각한다. 

똘똘 뭉치는 것!

어렵고 불가능할수록, 똘똘 뭉쳤다. 

직면한 난관의 종류와 상황에 따라 협력의 규모가 가족이나 씨족, 마을, 국가 등으로 확대되어 언제나 우리끼리 똘똘 뭉쳤다. 

집안에선 싸우던 형제 자매도 놀이터나 학교 운동장에선 하나로 뭉치듯 나라 안에선 티격거려도 밖에선 하나가 되는 게 바로 우리민족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신라가 운좋게 삼국을 통일했다는 말은 역사를 몰라도 한참 모르고 했던 말이요 믿었던 거짓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중세인 고려시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나는 '무기를 내려놓고 문화인이 되어 간 시기'라고 하겠다. 

모든 문명은 풍요 속에서 싹터 사치와 향략 속에서 발전한다

덕분에 고려인은 현대 기술로도 재현해내지 못한다는 비취빛 고려청자와 일독하는데 30년이나 걸린다는 팔만대장경 등 빼어난 문화유산을 남겼지만 무를 버리고 문을 숭상했기에 나약했다. 사람이 약하면 비굴해듯이 나라도 마찬가지다. 


거란족으로부터 외교 담판으로 서희가 강동 6주를 얻어낸 것과 강감찬 장군의 살수대첩 승리는 거친 야만의 시대가 저물어갈 때 마지막으로 타오른 불꽃이었다.   

저자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서희의 담판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그러나 나는 우리 민족의 기개가 이때 정점을 찍고 서서히 작아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국력은 겉으로 들어나는 역사적 사실이 전부가 아니다. 행동은 과감했고 결과는 좋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호연지기로 가득차 부풀어오르는지 아니면 온힘을 다한 위기의 순간이 끝나고 '휴~'하고 한숨을 몰아쉬는 상황은 분명 다르다.


전자라면 계속 도전하면서 실패와 발전을 거듭해 성장해 나가지만, 후자라면 모든 일에 겁부터 집어먹고 머뭇거리면서 후퇴하게 된다. 


경제는 파탄났고 무신의 난을 불러왔으며, 이는 신분 질서의 파괴로 이어졌다.



고려는 결국 몽골 제국의 지배와 간섭기에 들어갔다. 물론, 강화도에서 항쟁하다가 강화를 하고 나왔기 때문에 조선의 인조처럼 아홉번 무릎 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려야하는 '친조의 예'를 강요당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한 번 꺾인 기상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패배 의식에 갇혀 버렸다. 

범죄자들이 실제로는 모지리에 찌지리들이 많듯이 악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가 행하는 법이다. 짙은 패배감은 마음속 열등감으로 자라나 약한 자들에게 가혹한 행태로 뿜어져 나왔다.  


지배 계층은 단순히 넘쳐나는 풍요를 누리고 즐기는 사치에서 벗어나 다 쓰지도 못하고 다 먹지도 못할 곡식들을 창고에 쟁여놓았다.

쌓고, 쌓고, 또 쌓고....

탐욕의 시작이었다. 

마음이 빈곤하면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듯 백성들을 아무리 수탈하고 짜내도 문벌귀족들의 욕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위화도 회군과 조선의 건국은 그 어떤 이유를 들더라도 공민왕의 개혁에 대한 반기임에는 분명하다. 몽골이 무너져 내정간섭도 없으니 신돈을 내세운 공민왕의 개혁이 성공한다면 고려는 다시 일어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몽고 간섭기에 성장한 문벌귀족 등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너무나도 거샜다.  

하여, 나는 조선의 건국 자체에 대해선 찬성표를 던지고 싶다. 그러나 건국이념을 성리학에서 찾았다는 게 악수라면 악수였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고 했으니 이념으로 시작한 조선은 결국 이념 논쟁에 빠져 침략을 당했고 또한 무너졌다. 

500년 동안 버틴 것 자체가 기적이었지만 백성과 후손에겐 비극이었다. 


이 책이 출판된 2000년 대 초반부터 갑자기 문사철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니 어엿한 하나의 시장을 형성한 것 같다.

공자 및 소크라테스 등등 동서양의 고대 철학과 칸트와 니체 관련 책들과 강연들이 한동안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트로이전쟁과 펠로폰네소스전쟁 등으로 강력했던 그리스 폴리스들이 소크라테스 등장 이후 이념과 철학 논쟁에 빠져 무너졌다는 걸 알기나 하고 열광하는 걸까?

혼란한 춘추전국 시대에 탄생한 백가쟁명은 평화로운 시기엔 하등 쓸모가 없건만 중앙집권화와 과거제도의 실시로 절대불변의 진리가 되어버렸다. 

젊은이들이 새로운 사상이나 학문에 도전하기보다는 "공자 왈, 맹자 왈" 암기만 열심히 하고 있으니, 그 넓은 땅에 그 많은 인구에 그 발달한 상공업을 가졌던 나라치고는 그 뒤의 역사가 너무 비극적이지 않은가. 

좀 심하게 표현하면, 문사철의 인기는 인문사회계열 출신 386세대들의 지적허영에 찬 글쓰기와 토론문화를 하나의 상품과 산업으로 만든 것뿐이다.

무슨 새로운 발견이나 철학 혹은 이론이나 책임있는 주장이 아니다.

그 옛날 주희가 더 옛날 책들을 읽고 토를 달았듯, 그들도 똑같이 이미 쓰여진 책들을 읽고 해석할 뿐이다. 다만, 오늘날엔 그 대상이 동양에만 머물지 않고 서양으로까지 확대되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교육방송의 <위대한 수업> 시리즈는 반갑고도 놀라웠다.

과학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인문 분야에서도 기존 이론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독창적 사상이나 깊이있는 관찰과 분석적 사고를 통한 철학을 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성리학으로 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율곡 이이를 따르는 서인과 퇴계 이황을 따르는 동인에서 출발해,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서인은 소론과 노론으로 나누었다. 

왕을 퇴위시키는 것도 모자라 독살하고 서로 모함하여 떼죽음으로 내몰고, 그러다 전쟁 나면 도망가기 바빴다. 조선의 양반들은...  다 부질없는 탁상공론과 트집잡기에 사람 목숨만 날아갔던 헛된 입씨름들만 한평생 하다가 갔다. 

나는 지금까지도 조선의 당쟁과 사화가 헷갈린다.  열심히 기억할 일말의 가치조차 없지만...



정조라는 어질고 유능한 임금 한 사람만으론 기울어가는 국운을 되돌려 놓기에는 너무 멀리 그리고 오래 흘러왔다. 


청이 건륭제를 끝으로 19세기 내내 몰락한 것처럼 조선도 정조 대왕이 이른 나이에 죽자마자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글자 하나 모르는 강화도령을 임금으로 앉히질 않나... 두 살짜리 아들을 세자로 책봉시켜 달라고 무너져가는 청의 서태후와 리훙장에게 수십 만 개의 금은괴를 보낸 왕비가 있질 않나.... 5년 동안 관리에겐 봉록을 지급하지 못하고, 군대에게 13달치 밀린 봉급 중 그것도 기껏 한 달치만 지급하면서 모래와 돌을 섞질 않나... 나라 곳간은 텅텅 비었건만 금강산 1만1천 봉 한 개마다 쌀 한 섬과 베 한 필을 바쳤다 하니, 그런 나라가 아니 망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너무 힘들어서 더이상은 못 쓰겠다.

이 다음부터의 역사는 이미 흘러간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일어나 겪고 있는 현실인 것마냥 힘들고 괴롭다.   

어째서 우리나라 역사 특히 근현대사는 알면 알수록 괴롭고 슬픈걸까? 나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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