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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이 말 그대로 글자 제한이 있어서 미처 못한 말을 여기에서 몇 자 적어둔다. "100자평"에서 나는, <여전히 미쳐 있는>은 <다락방의 미친 여자>보다 분량은 적고, 논의 방식도 깊이보다 넓이에 치중한 듯하다고 썼다. 그러니까 이 페이퍼는 이 "100자평"에 대한 추기(追記)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두 책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꽤 분명하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부제는 "여성 작가와 19세기의 문학적 상상력"이지만, 실상 19세기라는 100년의 (당대 문학계의) 역사를 다루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그 기간에 등장한 주목할 만한 여성 작가들(특히 제인 오스틴,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조지 엘리엇)의 작품 분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작품 분석이다보니 아무래도 논의가 길고 그 수준도 깊다.


이와 달리 <여전히 미쳐 있는>은, 두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듯이, 195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발전해온 "미국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의 상상력"을 "시대 순"으로 다룬다. 요컨대 <여전히 미쳐 있는>은 지난 50여 년의 미국 페미니즘 "연대기"인 셈이다. 비유컨대,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19세기를 껑충껑충 건너뛴다면(가령 오스틴이 활동하던 1810년대, 브론테 자매가 활동하던 1840년대 말~1850년대 등등), <여전히 미쳐 있는>은 지난 50여 년의 역사를 말 그대로 쭉 훑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논의해야 할 작가들의 수가 많을 테고, 각 작가들에게 할당될 수 있는 페이지의 수가 제한될 테고, 결국 논의 수준이 덜 깊어질 수밖에.
















물론 차이점만 부각한다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이 두 저자는 이미 20세기의 여성 작가들을 약 1,250여 쪽에 걸쳐 깊게 다룬 바 있기 때문이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와 <여전히 미쳐 있는>의 저자 소개에 <남자의 것이 아닌 땅>(No Man's Land)이라고만 적힌 이 3부작의 부제가 바로 "20세기 여성 작가들의 자리"(The Place of the Woman Writer in the Twentieth Century)이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보면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진정한(!?) 후속작은 오히려 <여전히 미쳐 있는>이라기보다는 저 3부작이다. 아무튼 그러니 "이미 책 3권을 통해 20세기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해놨는데, 신작(<여전히 미쳐 있는>)에서도 그러라고?"라고, 두 저자가 볼멘소리를 던지거나 거세게 항변해도 할 말은 없는 셈이다.


그런데 그건 두 저자의 사정이고, 한국에 사는 독자로서는 아무래도 아쉬울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남자의 것이 아닌 땅> 3부작이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될 것 같지는 않아서이다. 어쩌면 알라딘 북펀딩을 통해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만, 아무튼 한국 독자의 사정은 이러니 <여전히 미쳐 있는>의 논의 방식이 아쉬울 수밖에(하긴 책을 다 읽고나서는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안젤라 카터(Angela Carter, 1940~1992)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도 무척 아쉽다. <남자의 것이 아닌 땅> 3부작에서도 고작 10쪽 가량만 할애하더니, <여전히 미쳐 있는>에서는 아예 1쪽밖에 할애가 안 되어 있다. 하기사 "미국 여성 작가들"을 다룬다고 못 박아뒀으니 뭐...... 그런데 다른 영국 작가인 버지나아 울프는 많이 언급하더만.


아참, 위에서 말했듯이 카터는 "영국" 작가이다. 본문(234쪽)에는 옳게 적혀 있는데, 어쩐 일인지 찾아보기의 저자 설명(608쪽)에는 "미국 소설가, 시인, 저널리스트"라고 적혀 있다. 재판을 찍는다면(아마도 판매지수로 볼 때 이건 가능하지 싶다) 꼭 고쳐줬으면 한다.


이렇게 나름의 아쉬움을 토로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미쳐 있는>은 지금 그 모양새 그대로 좋은 책이고, 주변에 일독을 널리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희망을 덧붙이자면, 언제가 됐든 국내 연구자(들)가, 국내 여성 작가들에 관해 이런 책을 써줬으면 정말로 좋겠다. 그런 날이 온다면, 내 기꺼이 그 책에도 펀딩을 할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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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
현대, 정치철학, 모험

 

 

 



 



 


2008년 봄과 여름의 길거리를 수놓았던 촛불은 사그라졌다. 그러나 그 촛불은 현재 ‘공화국’에 대한 논의, 87년-97년-08년 ‘체제논쟁,’ 그리고 ‘급진민주주의’에 대한 토론을 낳았다. 이런 촛불의 흔적 또는 촛불효과는 신자유주의라는 반(反)정치를 넘어서는 ‘정치(철학)의 귀환’으로 규정할 수 있을 듯하다.

서구 유럽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 나아가 맑스주의의 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귀환은 맑스주의의 경제주의적 경향을 레오 스트라우스나 한나 아렌트 식의 ‘정치’의 자율성론으로 비판하고 존 롤즈, 마이클 샌들, 찰스 테일러, 로버트 노직,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같은 영미 정치철학자들의 이론을 수용하는 형태를 띠었다. 이처럼 서구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결국 철학이 곧 정치라고 봤던 루이 알튀세르,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 ‘68사상가들’을 결산하며 정치철학의 고유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와 달리 지금 이 땅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대중운동이 지성계에게 사유할 것을 요청, 심지어 명령하는 상황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보다 건설적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귀환은 하나의 철학적 조류에 또 다른 조류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컨)텍스트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건강하다. 하지만 반신자유주의 연합이든, 반MB 연합이든, 또 그밖에 어떤 구체적인 전략을 사유하든 간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촛불의 교훈은 이것이다. 즉, 정치란 (국가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인 동시에, 제대로 된 ‘국가’ 자체를 요구하는 것이라는 이중의 의미에서) 국가에 대한 요구를 초과한다는 것, 민주주의는 일종의 합의나 체제가 아니라 갈등·경합·투쟁·계쟁·봉기의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것. 우리가 지금 소개하는 철학자들은 바로 이런 공통의 지평 위에 서 있다. 

정치철학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람직한 국가형태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떤 권력이 정당하며, 누구에게 권력이 돌아가야 하는가 등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질문은 지금까지도 정치철학의 주된 물음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정치학』에서 평등/불평등의 문제가 정치철학의 난제라고 밝히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는 체제에 대한 고민의 가장자리야말로 정치철학의 아포리아가 자리하는 곳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권력의 정당성과 배분이라는 문제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정치 또는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지를 묻기. 기존의 정치 개념(권리, 정의, 자유, 평등, 인민주권 등)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 바로 이것이 여덟 명의 철학자를 통해 우리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따라서 이 모음집은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하나의 전략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주)텍스트를 읽기 위한 (곁)텍스트, 그러나 늘 곁에 두고 사유하며 곱씹을 것을 요구하는 (곁)텍스트이다.
 

   
 

▣ 현대 유럽의 철학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영향, 그리고 그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유럽의 정치철학은 ‘칼 슈미트’의 영향, 그리고 그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 의회민주주의나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모색하는 사상가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표제나 정당제로 환원되지 않는 민주주의를 사유하고 대표의 원리, 법, 규범, 제도 등에 맞서 인민의 권력이나 다중의 역량의 우위를 강조하려는 사상가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슈미트의 ‘제정하는 권력’대 ‘제정된 권력’이라는 문제틀의 자장 안에 있다. 이 짝패는 가깝게는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멀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와 현실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 바,(1) 이는 제1철학과 무관한 정치철학만의 고유한 주제와 대상을 확보하려드는 일부 정치철학자들의 눈가림과는 달리 정치철학의 핵심에 언제나 존재론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이데거(왼쪽)와 슈미트(오른쪽)의 캐리커쳐   

 

인민의 힘이 제정된 권력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상가들이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물음은 ‘권리’(그 중 가장 문제적인 권리는 ‘저항권’이다)를 정초하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힘이 곧 권리’라는 단순한 등식이 아니라, “각자의 권리는주어진 조건 속에서 실제로 행위하고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에티엔 발리바르)고 가정할 때, 우리는 각자 또는 인민의 힘이 뻗어나갈 수 있을 만큼 뻗어나갔을 때 발생하는 ‘폭력’의 문제와 마주쳐야 한다. ‘권리’와 ‘폭력’에 대한 상이한 성찰은 현대 정치철학자들의 입장을 변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슈미트는 의회/대의민주주의가 본디 대표의 원리(대표자가 정치체를 인격적으로 대표한다는 것)와 동일성의 원리(지배자와 피지배자, 통치자와 피통치자, 명령권자와 복종자 사이의 동일성) 사이의 모순된 결합이지만,(2) 오늘날 정치적 통일체의 동질성과 구성원의 동족성 덕분에 그 모순이 봉합된다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 첫째, 국가의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인정되는 ‘인격’(persona)은 하나뿐이다. 이는 오로지 왕만이 인간으로서의 신체와 주권자로서의 신체라는 두 신체를 가질 수 있음을 전제한다. 둘째, 슈미트가 바라본 동일성의 원리, 곧 민주주의는 이미 동일하거나 ‘비슷한 자들’끼리의 통치, 심지어 “동족결혼”(알랭 바디우)일 뿐이다.

그러나 비슷하다고 간주된 자들 사이에 균열 또는 나눔이 있으며, 왕이 아니라 인민들도 자신의 정치적 인격을 만들어 정치무대에 오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야말로 오늘날 정치철학이 숙고하고 있고, 또 숙고해야 하는 문제이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탈정체화,’ ‘주체화’ 같은 개념은 이런 문제를 반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은 이 책에서 ‘정치’ 또는 ‘정치적인 것’을 정의하는 다양한 방식(특히 클로드 르포르,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샹탈 무페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이에 앞서 우리는 슈미트가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했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슈미트가 제시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사라지는 것은 바로 ‘내전’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피/아 적대는 앞서 얘기한 정치적 통일체의 동질성과 구성원의 동족성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일찍이 플라톤은『국가』제5권(470b∼471a)에서 전쟁(polemos)과 내분/내란(stasis)를 구분했다. 전자가 헬라스인들과 이방인들(이들은 자연적으로‘적’이다)의 적대라면, 후자는 헬라스인들간의 적대이다. 서구 정치철학의 정초자는 내분/내란을 ‘병’으로 간주했고, 고대 그리스의 다른 텍스트들에서 내란은 ‘집안싸움,’ ‘형제간의 싸움’에 비유됐다. 흥미롭게도 내분/내란이 어차피 자연적으로 ‘친구’(슈미트 식으로 말하면 동지)인 자들 사이의 적대라는 이유로 플라톤은 그것을 “화해하게 될 사람들로서” 불화하는 수준으로 축소시키고자 무던 애를 썼다. 불화가 있더라도 국토를 유린하지 말며, 가옥을 불태우지 말도록 하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며 말이다. 플라톤에서 슈미트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정치철학에서 내전이 억압된 이유(플라톤이 내분/내란을 끝까지 ‘전쟁’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은 징후적이기까지 하다)는 형제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친구인 동시에 최악의 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친구인 자들(출생하는 동시에 동일한 국적을 갖게 되는 국민들) 사이에 나눔과 균열을 드러내 밝히는 것이 오늘날 정치철학의 과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주권자가 결정하거나 통치의 원활함을 위해 오늘날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예외상태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는 내전에 대한 사유가 필수적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갈등, 불화, 경합이야말로 곧 정치라는 단언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금 선보이는 여덟 명의 철학자는 우리와 동시대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핵심 주장은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수십 년 지난 게 대부분이다. 이제와 이들의 사유를 소개한다는 것은, 그것도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니라 입문서의 형태로 소개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성사적으로 늘 뒤쳐져서 남들 뒤꽁무니 따르기에 바쁜 우리 모습에 대한 자조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아니면 유행하고 있거나 유행할, 하지만 결국 사라질 운명에 처한 일군의 신상품을 풀어놓는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허나 무엇보다도 푸코가「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근대’를 하나의 태도, 그것도 ‘비판적 태도’로 규정했듯이 우리 역시 ‘현대’ 또는 ‘동시대’를 하나의 태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거의 모든 철학자는 오늘을 사유하기 위해 과거의 텍스트를 읽었다. 이것은 오늘과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시차적(時差的)이며, 과거의 텍스트를 다른 시각으로 읽는다는 점에서 시차적(視差的)이다. 요컨대 현대/동시대는 이 이중의 시차를 경유함으로써만 우리에게 온전히 주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독자들이 이 모음집의 텍스트를 그 맥락에서 떼어내 자유롭게 인용할 때, 다시 말해서 이 텍스트들이 경전들에 대한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이해하기 위한 (곁)텍스트가 될 때 이 모음집에 수록된 정치철학은 비로소 현대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음집에 참여해주신 글쓴이들의 약력에는 대부분 ‘과정’이라는 꼬리말이 붙어 있다. 그러나 학계와 사회의 끝자락 또는 가장자리에 있는, 이 ‘과정 중의’ 사람들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들이 아닌가. 이제는 당신의 차례이다.

기획위원
김상운·양창렬


(1) 홍철기,「칼 슈미트와 스피노자」,『진보평론』(제25호/가을), 2005, 176∼192쪽; 조르조 아감벤, 박진우 옮김,『호모 사케르: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새물결, 2008. 특히「잠재성과 법」을 참조.

(2)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동일해지는 순간은 투표할 때 뿐(장-자크 루소)이고, 명령권자와 복종자가 한 몸을 이루는 형상은 ‘자기계발하는 주체’(서동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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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없는 수단> 발간 이후 보도자료를 쓰기 위해 아감벤에 대한 이런저런 논문들과 책들을 훑어봤다. ‘전세계 최대의 지식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영미권에는 이미 2005년부터 아감벤에 대한 연구서가 6권 정도 나와 있고, 근간예정인 책도 2권이다. 이 중 편집서가 아닌 개별 학자의 연구서는 근간예정인 2권과 기발간된 6권 중 2권이 있다. 간단히 적어보면 그 4권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4번의 표지이미지는 아직 제공되지 않고 있어서 올리질 못했다).
 


 

 

 

 


    

 
 1. Catherine Mills, The Philosophy of Agamben (2009)
2. Leland de la Durantaye, Giorgio Agamben: A Critical Introduction (2009)
3. Alex Murray, Giorgio Agamben (2010/3월 7일 예정)
4. Thanos Zartaloudis, Giorgio Agamben: The Idea of Justice and the Uses of Legal Criticism (2010/4월 8일 예정) 

근간예정인 3번은 영국의 출판사 루틀리지의 ‘비판사상가들’(Critical Thinkers) 시리즈 중의 하나이다. 앨피출판사가 이 시리즈를 계속 내고 있으니 아마 3번은 조만간 국역될 수도 있겠다. 4번은 법학자의 책인 듯한데 지은이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의 지은이들과 모두 ‘안면’을 트게 됐고 책도 모두 볼 수 있게 됐는데(내가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간 뒤 얻은 소득이 있었다면 이것이었다), 이 포스트의 제목으로 쓴 “벤야민은 하이데거에 대한 해독제이다”라는 구절은 그 중 한 책에서 따왔다(어떤 책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 수수께끼가 재미있으니까! ㅎㅎㅎ)

언젠가 <리베라시옹>(1999년 4월 1일자)은 아감벤과 마롱귀(Jean-Baptiste Marongiu)의 대담을 실은 적이 있는데(“아감벤, 인간의 탐구자”[Agamben, le chercheur d’homme]) 그 대담에서 아감벤은 마르틴 하이데거와 발터 벤야민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술회한 바 있다. 관련 부분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편의상 원문은 생략했다). 

 

   
 

[하이데거와의 ‘지적’ 만남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조우였다. 삶에서도 그랬고, 사유에서도 그랬다. 이런 조우는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또는 간혹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좌우간 하이데거와의 만남은 내게 그런 것이었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우한 벤야민의 사유도 내게 그런 것이었다. 모든 위대한 작품은 상당한 위압감과 독(毒)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늘 그에 대한 해독제를 [동시에]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은 내가 하이데거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준 해독제였다.

 
   

 

이 인용구절 바로 앞에서 아감벤은 하이데거와의 만남이 자신에게 ‘철학적 소명의식’을 심어줬다고 인정한 바 있다. 하이데거와의 만남은 아마 ‘물리적 만남’으로 가속화됐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65년 시몬느 베이유의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66년 아감벤은 박사후과정의 일환으로 프랑스 남동부의 한 마을인 르 토르(더 정확히 말하면 이곳에 위치한 프랑스의 시인 르네 샤르의 별장)에서 열린 하이데거의 세미나(헤라이클레이토스에 대한 세미나)에 참여했다. 하이데거와의 만남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대한 아감벤의 고백, 그리고 실제로 아감벤의 저서 곳곳에서 출몰하는 하이데거적 테마는 하이데거가 아감벤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음을 입증해준다. 



▷ 왼쪽이 젊은 시절의 아감벤, 오른쪽이 하이데거이다(1966년). 흔하게 볼 수 없는 사진인데 서비스 차원에서 긴급 방출한다(나는 이 사진을 독일에 사는 지인을 통해서 힘들게 구했다. 그러니 퍼 가시는 건 마음대로이나 꼭 출처를 밝혀주셨으면 한다. 그렇다. 이건 홍보이다 ㅎㅎㅎ).

그러나 내가 <리베라시옹>과의 대담 한 대목을 따온 이유는 하이데거가 아감벤에게 끼친 영향을 과대평가하지는 말자는 취지에서이다. 영향 자체를 안 받았다거나 그 영향이 미미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다시 한번 강조해서 반복하자면) 그 영향을 ‘과장’해서는 참으로 곤란하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요컨대 어디에선가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밟고 올라간 다음에 발로 냅다 차 버려야 할 사다리”(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6.54)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는데, 하이데거는 아감벤에게 그런 사다리였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최근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 젊은 연구자가 어느 강연을 통해 “아감벤의 작업은 하이데거의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는 말을 전해들어서이다. 직접 들은 게 아니라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릇 모든 단언은 명쾌한 맛은 있을지언정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이 문제의 단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결국 “모든 사상가는 플라톤의 주석자”(알프레트 N. 화이트헤드)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모든 말(로고스)은 신의 말씀에 대한 주석이라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아감벤은 앞서 인용한 술회 뒤에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자신은 자기보다 ‘훨씬 더 훌륭한 다른 사람들’이 끝내지 못하고 남겨놓은 작업을 끝내려고, 완수하려고 노력할 뿐인 에피고넨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훨씬 더 훌륭한 다른 사람들’(복수로 쓰였다는 점에 주목하라)에 굳이 하이데거만 있을 이유는 또 어디에 있는가? 실제로 아감벤은 이어지는 술회에서 자신의 정치적 성찰은 벤야민과 미셸 푸코에게 많이 빚지고 있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감벤의 작업은 벤야민의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혹은 “아감벤의 작업은 푸코의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목록은 얼마든지 더 늘어날 수 있다. 아비 바르부르크, 기 드보르, 장-뤽 낭시 등등.

한 사상가의 사유를, 그 사상가에게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사상가의 사유 아래 복속시키는 이런 단언은 문제가 되고 있는 사상가의 ‘독특성’을 무화시킬 우려가 있다. 어찌보면 그 ‘독특성’이 그 사상가의 핵심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요컨대 칼 맑스를 헤겔의 에피고넨이라고 단정한다면 맑스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겠는가? 질 들뢰즈를 칸트의 에피고넨, 스피노자의 에피고넨, 니체의 에피고넨, 베르그송의 에피고넨이라고 한다면 들뢰즈는 자신이 뛰어내린 아파트를 거꾸로 기어올라가 그렇게 말한 사람에게 이렇게 응수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다른 사상가의 뒤에 달라붙어서 그 사상가의 아이를, 그것도 아주 흉물스러운 괴물 같은 아이를 낳는 것이라고. 아감벤이 자신에게는 이런 비역질 취향이 없다고 손사래 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건 그의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철학사는 일종의 비역질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철학사에 이런 비역질을 하지 않아도 됐을 ‘부동의 동자’가 존재했다면 그건 오로지 신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작에 신은 죽었다(Gott ist tot-!). (끝)

※ 여담이지만 나는 하이데거가 현대 사상(특히 유럽의 그것)에 끼친 영향을 절대 과소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그의 그늘이 너무 짙다(물론 이 말이 위에서 밝힌 내 생각, 즉 누가 됐는지 간에 그 사람에 대한 하이데거의 영향을 과대평가/과장하지는 말자, 는 말을 취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렇게 된 연유는 프랑스 지성계의 하이데거 수용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혹은 반만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이데거의 고향인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인가? 



최근에 나온 흥미로운 책 <프랑스(인들)의 하이데거 해석들: 예외적인 수용>(French Interpretations of Heidegger: An Exceptional Reception, Albany, 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8)의 편집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들은 나치 부역자로 의심받았던 하이데거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물론 이 대답은 프랑스 지성인들이 하이데거를 왜 그렇게 열렬히 수용하게 됐는지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건 그 자체로 지성사적인 작업이 필요하며, 앞서 말한 책은 바로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이 책은 2002년 “하이데거와 프랑스”라는 주제로 미국 뉴헤이븐의 서던코네티커트주립대학에서 열린 북아메리카하이데거학회의 성과물을 모은 책이다. 그런데 이런 책은 돈 많은 출판사가 알아서 좀 번역해 출간해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하이데거처럼 짙은 그늘을 드리운 외국 사상가가 누가 있을까? 좌파임을 자임하는 사람들이라면 맑스나 레닌을, 우파임을 자임하는 사람들이라면 (스스로 인식하고 있든 아니든) 허버트 스펜서가 아닐까? ‘적자생존’의 창시자인 그 스펜서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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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갈색책>의 저작권 표기를 두고 나귀님께 "정확하지는 않다"는 말을 듣게 된 담당 편집자입니다. 사정을 밝혀드리면 블랙웰 측에서 계약서상에 "Copyright (c) 1958 by Ludwig Wittgenstein"이라고 명기해 달라고 요구해서 그렇게 명기한 겁니다. ^^;; (혹시 굳이 확인이 필요하시다면 팩스번호를...... *^^*).

그나저나 나귀님의 서재를 간간히 눈팅하는 사람으로서 한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제 생각에 나귀님도 "한국 출판 문화업계"의 일원인 듯하신데 "어벙띠벙" "국제적 망신" 같은 표현은 좀...... 게다가 나귀님의 뒷 부분 문장들은 나귀님 자신이 걱정하시는 X파일 이론을 스스로 대입하신 과도한 표현이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추측" "설마 그럴 리야" 같은 토를 달긴 하셨지만 말입니다. ^^;; 아마존닷컴에서 영어판 판권을 찾아보실 만큼 궁금하셨다면 출판사로 문의 전화 한번 넣어주시지......

중복출판 문제는 아직 책세상 판본을 못 보셨다니 보신 다음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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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그린비에서 나온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강조해 말씀드리지만  "라이히의 독일어 수고를 직접 옮긴 것"입니다. 저희가 알고 있기로는 로쟈님의 말처럼 "독일에도 없는 책"이죠!

지금 단계로서는 이 수고본과 기존의 다른 판본들 사이에 "전문가들의 관심사항이 될 만한" 차이가 있는지는 (특히 편집부 입장에서는 광고의 혐의를 받기가 쉽상이라 ^^;;) 섣불리 말하기 힘들긴 하지만,   "그린비판" <파시즘의 대중심리>가 기존의 독어본, 영어본 등과 비교해볼 때 구체적인 표현이나 문장 자체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특히 독어본이나 영어본들의 경우에는, 해당 시기에 라이히가 처해 있던 상황 때문에 "완곡하게" 써야 했던 표현들이 많습니다(자세한 전후사정은 "머리말(증보개정3판)"을 참조해 주십시오).

그러니 壺裏乾坤 님, 보관함에 들어 있던 책을 "바로" 빼버리신 것은 좀 성급한 결정이셨던 것 같습니다(다시 한번 판단하시기를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

좌우간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저희 편집부에서는 이번 작업에서 라이히의 독일어 수고, 1946년 오르곤연구소 판본, 1970년 FSG 판본, 1970년 세리까서방[일본어] 판본, 1986년 현상과인식 판본,  1986년 키펜호이어[독일어] 판본 등 총 6개의 판본을 비교대조했습니다 -.-;;), 감히 티도 못 내고 있었는데, 로쟈님 덕분에 "티"를 좀 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군요. 편집부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립니다. 울고 싶은 아이 뺨을 때려주셔서요. *^^* 앞으로도 좋은 서평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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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6-01-18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린비 출판사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발벗고 나서서 미심쩍음을 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읽고 싶었던 책인데 개운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로쟈님도 멋지시지만 편집자님도 멋지시네요.

瑚璉 2006-01-1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송구합니다. 곧바로 다시 집어넣었답니다.

그런데 옮기신 분께 따로 질문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로서는 정확성과 정당성이 아무래도 서로 다른 개념인 것으로 생각되어서요, 원래의 용어는 무엇이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번거로우시면 답변 안주셔도 무방합니다 ^.^;)

lefebvre 2006-01-19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옮긴이가 아니라 그린비 편집부입니다] 문의하신 용어의 원래 표현은 "Rechtigkeit"입니다 ^^

paviana 2006-01-19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기에는 너무 수준높은 책이라서 모라 말씀드리기는 어려우나,
앞의 페이퍼나 이 페이퍼를 읽어보니 굉장히 고생하신듯 합니다.^^
해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런 논쟁자체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참 보기 좋네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린비의 다른 책들이라도 꼭 읽어보도록 하겠어요.
편집자들은 독일어,일본어에도 능통해야 되는군요.존경스러워요.^^

lefebvre 2006-01-1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viana/ 별로 수준높지 않은 책입니다. "수준"이 난이도를 얘기한다면요. 쭉 따라 읽으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희 편집자들이 독일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사전 끼고 열심히 "읽을" 뿐입니다. ^^;; 아무튼 저희 출판사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할 테니, 혹 관심 있는 책이 저희 출판사에서 나온다면 꼭 한번 읽어주십시오. 그럼, 이만......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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