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현대, 정치철학, 모험
2008년 봄과 여름의 길거리를 수놓았던 촛불은 사그라졌다. 그러나 그 촛불은 현재 ‘공화국’에 대한 논의, 87년-97년-08년 ‘체제논쟁,’ 그리고 ‘급진민주주의’에 대한 토론을 낳았다. 이런 촛불의 흔적 또는 촛불효과는 신자유주의라는 반(反)정치를 넘어서는 ‘정치(철학)의 귀환’으로 규정할 수 있을 듯하다.
서구 유럽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 나아가 맑스주의의 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귀환은 맑스주의의 경제주의적 경향을 레오 스트라우스나 한나 아렌트 식의 ‘정치’의 자율성론으로 비판하고 존 롤즈, 마이클 샌들, 찰스 테일러, 로버트 노직,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같은 영미 정치철학자들의 이론을 수용하는 형태를 띠었다. 이처럼 서구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결국 철학이 곧 정치라고 봤던 루이 알튀세르,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 ‘68사상가들’을 결산하며 정치철학의 고유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와 달리 지금 이 땅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대중운동이 지성계에게 사유할 것을 요청, 심지어 명령하는 상황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보다 건설적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귀환은 하나의 철학적 조류에 또 다른 조류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컨)텍스트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건강하다. 하지만 반신자유주의 연합이든, 반MB 연합이든, 또 그밖에 어떤 구체적인 전략을 사유하든 간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촛불의 교훈은 이것이다. 즉, 정치란 (국가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인 동시에, 제대로 된 ‘국가’ 자체를 요구하는 것이라는 이중의 의미에서) 국가에 대한 요구를 초과한다는 것, 민주주의는 일종의 합의나 체제가 아니라 갈등·경합·투쟁·계쟁·봉기의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것. 우리가 지금 소개하는 철학자들은 바로 이런 공통의 지평 위에 서 있다.
정치철학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람직한 국가형태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떤 권력이 정당하며, 누구에게 권력이 돌아가야 하는가 등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질문은 지금까지도 정치철학의 주된 물음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정치학』에서 평등/불평등의 문제가 정치철학의 난제라고 밝히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는 체제에 대한 고민의 가장자리야말로 정치철학의 아포리아가 자리하는 곳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권력의 정당성과 배분이라는 문제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정치 또는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지를 묻기. 기존의 정치 개념(권리, 정의, 자유, 평등, 인민주권 등)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 바로 이것이 여덟 명의 철학자를 통해 우리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따라서 이 모음집은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하나의 전략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주)텍스트를 읽기 위한 (곁)텍스트, 그러나 늘 곁에 두고 사유하며 곱씹을 것을 요구하는 (곁)텍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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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유럽의 철학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영향, 그리고 그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유럽의 정치철학은 ‘칼 슈미트’의 영향, 그리고 그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 의회민주주의나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모색하는 사상가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표제나 정당제로 환원되지 않는 민주주의를 사유하고 대표의 원리, 법, 규범, 제도 등에 맞서 인민의 권력이나 다중의 역량의 우위를 강조하려는 사상가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슈미트의 ‘제정하는 권력’대 ‘제정된 권력’이라는 문제틀의 자장 안에 있다. 이 짝패는 가깝게는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멀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와 현실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 바,(1) 이는 제1철학과 무관한 정치철학만의 고유한 주제와 대상을 확보하려드는 일부 정치철학자들의 눈가림과는 달리 정치철학의 핵심에 언제나 존재론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하이데거(왼쪽)와 슈미트(오른쪽)의 캐리커쳐
인민의 힘이 제정된 권력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상가들이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물음은 ‘권리’(그 중 가장 문제적인 권리는 ‘저항권’이다)를 정초하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힘이 곧 권리’라는 단순한 등식이 아니라, “각자의 권리는주어진 조건 속에서 실제로 행위하고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에티엔 발리바르)고 가정할 때, 우리는 각자 또는 인민의 힘이 뻗어나갈 수 있을 만큼 뻗어나갔을 때 발생하는 ‘폭력’의 문제와 마주쳐야 한다. ‘권리’와 ‘폭력’에 대한 상이한 성찰은 현대 정치철학자들의 입장을 변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슈미트는 의회/대의민주주의가 본디 대표의 원리(대표자가 정치체를 인격적으로 대표한다는 것)와 동일성의 원리(지배자와 피지배자, 통치자와 피통치자, 명령권자와 복종자 사이의 동일성) 사이의 모순된 결합이지만,(2) 오늘날 정치적 통일체의 동질성과 구성원의 동족성 덕분에 그 모순이 봉합된다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 첫째, 국가의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인정되는 ‘인격’(persona)은 하나뿐이다. 이는 오로지 왕만이 인간으로서의 신체와 주권자로서의 신체라는 두 신체를 가질 수 있음을 전제한다. 둘째, 슈미트가 바라본 동일성의 원리, 곧 민주주의는 이미 동일하거나 ‘비슷한 자들’끼리의 통치, 심지어 “동족결혼”(알랭 바디우)일 뿐이다.
그러나 비슷하다고 간주된 자들 사이에 균열 또는 나눔이 있으며, 왕이 아니라 인민들도 자신의 정치적 인격을 만들어 정치무대에 오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야말로 오늘날 정치철학이 숙고하고 있고, 또 숙고해야 하는 문제이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탈정체화,’ ‘주체화’ 같은 개념은 이런 문제를 반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은 이 책에서 ‘정치’ 또는 ‘정치적인 것’을 정의하는 다양한 방식(특히 클로드 르포르,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샹탈 무페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이에 앞서 우리는 슈미트가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했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슈미트가 제시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사라지는 것은 바로 ‘내전’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피/아 적대는 앞서 얘기한 정치적 통일체의 동질성과 구성원의 동족성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일찍이 플라톤은『국가』제5권(470b∼471a)에서 전쟁(polemos)과 내분/내란(stasis)를 구분했다. 전자가 헬라스인들과 이방인들(이들은 자연적으로‘적’이다)의 적대라면, 후자는 헬라스인들간의 적대이다. 서구 정치철학의 정초자는 내분/내란을 ‘병’으로 간주했고, 고대 그리스의 다른 텍스트들에서 내란은 ‘집안싸움,’ ‘형제간의 싸움’에 비유됐다. 흥미롭게도 내분/내란이 어차피 자연적으로 ‘친구’(슈미트 식으로 말하면 동지)인 자들 사이의 적대라는 이유로 플라톤은 그것을 “화해하게 될 사람들로서” 불화하는 수준으로 축소시키고자 무던 애를 썼다. 불화가 있더라도 국토를 유린하지 말며, 가옥을 불태우지 말도록 하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며 말이다. 플라톤에서 슈미트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정치철학에서 내전이 억압된 이유(플라톤이 내분/내란을 끝까지 ‘전쟁’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은 징후적이기까지 하다)는 형제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친구인 동시에 최악의 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친구인 자들(출생하는 동시에 동일한 국적을 갖게 되는 국민들) 사이에 나눔과 균열을 드러내 밝히는 것이 오늘날 정치철학의 과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주권자가 결정하거나 통치의 원활함을 위해 오늘날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예외상태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는 내전에 대한 사유가 필수적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갈등, 불화, 경합이야말로 곧 정치라는 단언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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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선보이는 여덟 명의 철학자는 우리와 동시대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핵심 주장은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수십 년 지난 게 대부분이다. 이제와 이들의 사유를 소개한다는 것은, 그것도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니라 입문서의 형태로 소개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성사적으로 늘 뒤쳐져서 남들 뒤꽁무니 따르기에 바쁜 우리 모습에 대한 자조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아니면 유행하고 있거나 유행할, 하지만 결국 사라질 운명에 처한 일군의 신상품을 풀어놓는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허나 무엇보다도 푸코가「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근대’를 하나의 태도, 그것도 ‘비판적 태도’로 규정했듯이 우리 역시 ‘현대’ 또는 ‘동시대’를 하나의 태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거의 모든 철학자는 오늘을 사유하기 위해 과거의 텍스트를 읽었다. 이것은 오늘과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시차적(時差的)이며, 과거의 텍스트를 다른 시각으로 읽는다는 점에서 시차적(視差的)이다. 요컨대 현대/동시대는 이 이중의 시차를 경유함으로써만 우리에게 온전히 주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독자들이 이 모음집의 텍스트를 그 맥락에서 떼어내 자유롭게 인용할 때, 다시 말해서 이 텍스트들이 경전들에 대한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이해하기 위한 (곁)텍스트가 될 때 이 모음집에 수록된 정치철학은 비로소 현대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음집에 참여해주신 글쓴이들의 약력에는 대부분 ‘과정’이라는 꼬리말이 붙어 있다. 그러나 학계와 사회의 끝자락 또는 가장자리에 있는, 이 ‘과정 중의’ 사람들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들이 아닌가. 이제는 당신의 차례이다.
기획위원
김상운·양창렬
(1) 홍철기,「칼 슈미트와 스피노자」,『진보평론』(제25호/가을), 2005, 176∼192쪽; 조르조 아감벤, 박진우 옮김,『호모 사케르: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새물결, 2008. 특히「잠재성과 법」을 참조.
(2)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동일해지는 순간은 투표할 때 뿐(장-자크 루소)이고, 명령권자와 복종자가 한 몸을 이루는 형상은 ‘자기계발하는 주체’(서동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