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빌렘 플루서 지음, 윤종석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필요한 일이 있어서 빌렘 플루서의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엑스북스, 2015)를 읽다가 1장의 처음 두 문단부터 턱 막혔다.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영어판 <Does Writing Have a Future?>(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1)를 펼쳐들었다. 노트를 끄적이다 보니 분량이 꽤 되어서 아깝기도 하고, 또 다른 분들의 의견도 구하고자 이렇게 올려본다.

 

영어판에 의거해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플루서가 처음 두 문단을 통해서 하려는 말은 다음과 같다. 즉, 자신의 이 책은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writing about writing)인데, 이런 작업은 “Nachdenken”(=thinking something over)이 아니라 “Uberschrift”(=superscript)라는 것이다.

 

왜 이 간단한 말이 이해가 안 갔을까? 다시 한국어판을 펼쳐보고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어판 옮긴이는 “Nachdenken”를 “메타적 사유”로, “Uberschrift”를 “메타문자”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가 되는 두 표현의 접두사 “Nach-”와 “Uber-”를 모두 “메타(적)”로 옮겨놔서(내가 알기로 이 두 독일어 접두사의 의미폭은 동일하지 않다. 아니 겹치는 부분도 없다......아닌가?), 내가 이해하기에 서로 대비되는 두 표현이 서로 비슷한 표현인 것처럼 읽혔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어판만 보면 “writing about writing”=“Nachdenken”=“Uberschrift”처럼 읽힌다.그런데 1장 곳곳에는 그렇게 볼 수 없게 만드는 구절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니 이상할 수밖에.

 

그러고 보니 한국어판과 영어판은 첫 번째 문단의 네 번째 문장을 서로 정반대로 옮겨놨다. 한국어판의 “그래서 이와 같은 모험은 사유들이 사유 자신을 향해 겨냥하고 있는 메타적 사유(Nachdenken)와 비교될 수 있다”에 해당하는 영어판 문장은 “Such an undertaking cannot be compared with thinking something over, in which ideas are directed against ideas”이다. 즉, 한국어판은 긍정문(“비교될 수 있다”)으로, 영어판은 부정문(cannot be compared)으로 옮긴 것이다. 어느 한쪽은 분명히 틀리게 옮긴 것이리라? 어느 쪽일까?

 

일단 계속 나아가보자. 앞서 플루서는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는“Nachdenken”이 아니라 “Uberschrift”라고 했는데 그 차이가 무엇일까? 더 간단히, “Nachdenken”은 무엇일까?

 

(다시 한번 영어판에 의거해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플루서는 “Nach-”의 두 가지 의미를 언급하며 설명을 이어간다. 하나는 “뒤에”(after)라는 의미이며 또 하나는“향해서”(to[ward])의 의미이다. 즉, (해당 접두사의 첫 번째 의미에서)“Nachdenken”는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보충적인 생각들을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 뒤에 따라붙이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해당 접두사의 두 번째 의미에서) “Nachdenken”는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어떤 (새로운/보충적인) 생각들을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Nachdenken”은, “Nachdenken”의 [두 가지] 전략은 “글쓰기[이 맥락에서는 글로 쓰여진 것 혹은 글 자체]에 관해 글을 쓸 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왜냐하면 일단 글로 쓰였다는 것은 그 글을 구성하는 문자기호들 사이에 질서가 잡혀 있다는 말이며(그러니 따로 질서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문자기호들은 그 자체로 이미 흔적들(typoi)이기 때문이다(그러니 따로 흔적들을 찾을 필요가 없다).

 

간단히 말하면, “글쓰기”(=글[문자]로 쓰여진 것) 자체에서 “Nachdenken”의 두 가지 전략, 혹은 두 가지 기능은 이미 완료됐다. 그래서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 이미 완료된 “Nachdenken”의 전략 혹은 기능을 새삼스레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란 무엇인가? 플루서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란 그 자체로 이런 종류의 사유, 그러니까 글쓰기에 관해 이미 사유된 생각들을 질서 있게 정돈하려는 시도, 이미 사유된 그런 생각들의 흔적을 더듬어 다시 쓰는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Writing about writing is itself to be seen as thinking of a sort, that is, as an attempt to arrange those ideas that have already been thought about writing in an order, to track down these thoughts that have been thought and to write them down).

 

이 부분에서 좀 헷갈리는데, 이건 플루서 본인 때문이다. 요컨대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서도 “Nachdenken”에서와 마찬가지로 “질서”짓기와 “흔적” 더듬기가 관건이다. 그렇지만 “Nachdenken”에서와는 달리, (내가 이해한 바대로라면)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서는 새삼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뭔가 그 뒤에 따라붙여야 할 “보충적인 생각들”이 필요 없다(이런 점에서 “an attempt to arrange those ideas that have already been thought about writing in an order”는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겠다. “글쓰기에 관해 이미 질서 있게 사유된 생각들을 [재]배열하려는 시도”). 이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는 새삼 어떤 (새로운/보충적인) 생각들을 그것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시켜 더듬어야 할 흔적들이 없다. 흔적(=글로 쓰여진 것]은 이미 만천하에 드러나 있으니까.

 

하여,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는 “Nachdenken”과 (비슷하면서도) 구분되는 “Uberschrift”인데, 이 “Uberschrift”는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플루서는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사실 “Uberschrift”라는 표현 자체가 1장을 제외하면 2~3번 정도밖에 나오질 않는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플루서의 다른 책들/언급들을 읽어보고 참조해봐야 할 텐데, 그러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어서, 일단 독자로서의 상상력을 발휘해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이하는 완전히 내 상상이다.

 

플루서가 말하는 “Uberschrift”처럼 새로운 것을 추가하지 않고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혹은 “이미 질서가 부여된 것들”[=글로 쓰여진 것들]에, 새로운 것을 추가하지 않고,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내게 떠오르는 한 가지 방법은 “이미 질서가 부여된 것들”을 재/배치하는 방법이다. 비유를 해보자면, 농구팀에 새로운 플레이어를 넣는 게 아니라 기존 구성원들의 포지션을 바꾸는 방법이다. 혹은 발터 벤야민 식으로 말하면 “사유들로 이뤄진 어떤 성좌”의 내부 배치를 바꾸는 방법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아예 새로운 농구팀, 새로운 사유의 성좌를 얻을 수 있다. 나는 벤야민의 꿈, 즉 “인용만으로 이뤄진 책을 쓰는 것” 역시 이런 방법과 그리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쓰일 것이라 상상해본다. 혹은 나는 몽타주도 떠올려본다. 몽타주 역시 기존의 스틸컷들만으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만약에 플루서가 말하는 “Uberschrift”가 정말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진 무엇이라면, 우리는 이 “Uberschrift”를 어떻게 옮겨야 할까?

 

앞서 적었듯이 “Uberschrift”를 영어판은 “superscript”로, 한국어판은 “메타문자”로 옮기고 있다. 일단 한국어판의 번역을 보자면, 그리스어 접두사 “meta-”는 흔히 인문학 분야에서 “~에 관한”(=about)으로 쓰이기 때문에 괜찮은 선택이다. 가령 “언어에 관한 언어”는 “메타언어”라고 불린다. 게다가 독일어 접두사 “Uber-”와 의미폭이 상당히 겹치기도 한다. 그러니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Schrift uber Schrift=Uberschrift)를 “메타문자”(혹은 메타글쓰기)로 옮긴 것은 괜찮은 선택 같다. 실제로 플루서의 주요 활동 무대 중 한곳이었던 브라질에서도 “Uberschrift”를 “metaescrita”로 옮기고 있다. 단, “Nachdenken”를 “메타적 사유”로 옮기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혹은 “Nach-”를 “Uber-”와 명백히 구분되는 표현으로 옮긴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왜냐하면 “meta-”에는 그저 단순히(그러니까 어원학적으로) “~이후”(=post[L.]=after)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즉 “meta-”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Nach-”와의 구분이라는 문제가 곧장 대두되는 것이다. 짐작컨대, 한국어판 옮긴이가 두 접두사 “Nach-”와 “Uber-”를 모두 “메타(적)”로 옮기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또한 영어판 옮긴이가 “meta-script”라는 표현 대신에 “super-script”라는 표현을 쓰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영어판의 선택이 더 나은 것일까? “Uber-”를 “meta-”가 아니라 “super-”로 옮기면 확실히“Nach-”와 혼동될 여지가 (적어도 의미론상으로) 확 줄어든다. 그런데 문제는 영어판 옮긴이가 “Nachdenken”를 “thinking something over”로 옮기고 있다는 데 있다. 이 “over”가 문제이다. 영어 접두사 “over-”는 독일어 접두사 “Nach-”와 의미폭이 다르다. 하여, “Nach-”를 “over-”로 옮기게 되면, 플루서가 “Nach-”의 두 가지 의미(“뒤에”[after]와 “향해서”[to/ward])를 통해서 “Nachdenken”를 설명하는 부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혹은 무척 헷갈리게) 만든다. 게다가 “meta-”에는 “over”의 뜻도 있기 때문에 다시 “Uber-”와 의미론상의 구분이 희미해진다(물론 영어판 안에서는 “Nach-”=“over-,” “Uber-”=“super-”로 일관되게 구분되어 옮겨지고는 있다).


영어판에는 “Nachdenken”를 그냥 “reflection”(=성찰, 숙고)로 옮기는 대목도 있다. 그렇다면 일관되게 “Nachdenken”=“reflection,” “Uberschrift”=“superscript”로 옮겼으면 어땠을까? “Nachdenken”를 일관되게 “reflection”으로 옮길 경우에 문제가 되는 곳은 플루서가 “Nach-”의 두 가지 의미를 통해서 “Nachdenken”를 설명하는 부분이 될 텐데, 차라리 그 대목에서도 “reflection”이라는 번역어를 쓰고 옮긴이 각주 등을 통해서 그 대목의 논리를 설명해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를 종합해 나의 견해 혹은 제안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Nachdenken”는 “반성”(反省)으로 옮기고, “Uberschrift”는 “메타문자” 혹은 “초(超)문자”(실제로 한국어판 옮긴이는 이 표현을 쓰기도 한다). 아예 새로운 표현을 쓴다면 나는 “덮어쓰기”(=overscript)를 선호할 것이다.

 

“反”에는 “되풀이하다, 반대하다”의 의미가 모두 있기 때문에 플루서가 말하는 “Nach-”의 두 가지 의미와 얼추 비슷한 의미폭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되풀이한다는 것은 되풀이할 무엇인가가 선행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이 행위는 선행된 그 무엇에 “뒤따라오는” 행위이다). 그리고 더욱 더 좋게는, 한자 문화권인 우리에게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다. “덮어쓰기”라는 표현을 쓰면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렇다, 저 유명한 “surdetermination”라는 표현이다. 그것은 위상학적으로 기존의 것 위에 무엇인가가 덮어 씌여지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것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며, 덮어 씌여짐으로써 기존의 것들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끝)


덧붙임말.

 

1. 혹시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서 덧붙이는데, 한국어판의 번역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이런저런 평가를 하기에는 내가 이 책을 아직 충분히 읽지를 못했다). 플루서의 다른 번역본들에 비하면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의 가독성은 굉장히 높다.

 

2. 다만, 나라면 좀 다르게 번역했겠다, 싶은 대목이 눈에 종종 띄는데,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다른 또 하나의 예를 들면 “schrift”의 번역이다. 알다시피 이 독일어 단어는 (낱개로서의) “글자”와 (글자들의 집합체로서의) “글”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이런 단어를 번역할 때의 방법은 보통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병기이다. “글자/글” 혹은 (더 구분되게) “문자/글.” 나머지 다른 방법은 문맥에 따라 그때 그때 어울리는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가령 “Uberschrift”는 “메타문자”로 옮길 때 이해가 잘 되는 부분도 있고, “메타글[쓰기]”로 옮길 때 이해가 잘 되는 부분도 있다. (끝)

 

[주의] 움라우트(..)와 악상(/)이 깨져 있습니다. 왜 인식이 안 되는거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