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는 수단> 발간 이후 보도자료를 쓰기 위해 아감벤에 대한 이런저런 논문들과 책들을 훑어봤다. ‘전세계 최대의 지식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영미권에는 이미 2005년부터 아감벤에 대한 연구서가 6권 정도 나와 있고, 근간예정인 책도 2권이다. 이 중 편집서가 아닌 개별 학자의 연구서는 근간예정인 2권과 기발간된 6권 중 2권이 있다. 간단히 적어보면 그 4권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4번의 표지이미지는 아직 제공되지 않고 있어서 올리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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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atherine Mills, The Philosophy of Agamben (2009)
2. Leland de la Durantaye, Giorgio Agamben: A Critical Introduction (2009)
3. Alex Murray, Giorgio Agamben (2010/3월 7일 예정)
4. Thanos Zartaloudis, Giorgio Agamben: The Idea of Justice and the Uses of Legal Criticism (2010/4월 8일 예정)
근간예정인 3번은 영국의 출판사 루틀리지의 ‘비판사상가들’(Critical Thinkers) 시리즈 중의 하나이다. 앨피출판사가 이 시리즈를 계속 내고 있으니 아마 3번은 조만간 국역될 수도 있겠다. 4번은 법학자의 책인 듯한데 지은이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의 지은이들과 모두 ‘안면’을 트게 됐고 책도 모두 볼 수 있게 됐는데(내가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간 뒤 얻은 소득이 있었다면 이것이었다), 이 포스트의 제목으로 쓴 “벤야민은 하이데거에 대한 해독제이다”라는 구절은 그 중 한 책에서 따왔다(어떤 책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 수수께끼가 재미있으니까! ㅎㅎㅎ)
언젠가 <리베라시옹>(1999년 4월 1일자)은 아감벤과 마롱귀(Jean-Baptiste Marongiu)의 대담을 실은 적이 있는데(“아감벤, 인간의 탐구자”[Agamben, le chercheur d’homme]) 그 대담에서 아감벤은 마르틴 하이데거와 발터 벤야민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술회한 바 있다. 관련 부분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편의상 원문은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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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와의 ‘지적’ 만남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조우였다. 삶에서도 그랬고, 사유에서도 그랬다. 이런 조우는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또는 간혹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좌우간 하이데거와의 만남은 내게 그런 것이었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우한 벤야민의 사유도 내게 그런 것이었다. 모든 위대한 작품은 상당한 위압감과 독(毒)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늘 그에 대한 해독제를 [동시에]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은 내가 하이데거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준 해독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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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용구절 바로 앞에서 아감벤은 하이데거와의 만남이 자신에게 ‘철학적 소명의식’을 심어줬다고 인정한 바 있다. 하이데거와의 만남은 아마 ‘물리적 만남’으로 가속화됐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65년 시몬느 베이유의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66년 아감벤은 박사후과정의 일환으로 프랑스 남동부의 한 마을인 르 토르(더 정확히 말하면 이곳에 위치한 프랑스의 시인 르네 샤르의 별장)에서 열린 하이데거의 세미나(헤라이클레이토스에 대한 세미나)에 참여했다. 하이데거와의 만남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대한 아감벤의 고백, 그리고 실제로 아감벤의 저서 곳곳에서 출몰하는 하이데거적 테마는 하이데거가 아감벤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음을 입증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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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이 젊은 시절의 아감벤, 오른쪽이 하이데거이다(1966년). 흔하게 볼 수 없는 사진인데 서비스 차원에서 긴급 방출한다(나는 이 사진을 독일에 사는 지인을 통해서 힘들게 구했다. 그러니 퍼 가시는 건 마음대로이나 꼭 출처를 밝혀주셨으면 한다. 그렇다. 이건 홍보이다 ㅎㅎㅎ).
그러나 내가 <리베라시옹>과의 대담 한 대목을 따온 이유는 하이데거가 아감벤에게 끼친 영향을 과대평가하지는 말자는 취지에서이다. 영향 자체를 안 받았다거나 그 영향이 미미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다시 한번 강조해서 반복하자면) 그 영향을 ‘과장’해서는 참으로 곤란하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요컨대 어디에선가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밟고 올라간 다음에 발로 냅다 차 버려야 할 사다리”(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6.54)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는데, 하이데거는 아감벤에게 그런 사다리였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최근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 젊은 연구자가 어느 강연을 통해 “아감벤의 작업은 하이데거의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는 말을 전해들어서이다. 직접 들은 게 아니라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릇 모든 단언은 명쾌한 맛은 있을지언정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이 문제의 단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결국 “모든 사상가는 플라톤의 주석자”(알프레트 N. 화이트헤드)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모든 말(로고스)은 신의 말씀에 대한 주석이라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아감벤은 앞서 인용한 술회 뒤에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자신은 자기보다 ‘훨씬 더 훌륭한 다른 사람들’이 끝내지 못하고 남겨놓은 작업을 끝내려고, 완수하려고 노력할 뿐인 에피고넨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훨씬 더 훌륭한 다른 사람들’(복수로 쓰였다는 점에 주목하라)에 굳이 하이데거만 있을 이유는 또 어디에 있는가? 실제로 아감벤은 이어지는 술회에서 자신의 정치적 성찰은 벤야민과 미셸 푸코에게 많이 빚지고 있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감벤의 작업은 벤야민의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혹은 “아감벤의 작업은 푸코의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목록은 얼마든지 더 늘어날 수 있다. 아비 바르부르크, 기 드보르, 장-뤽 낭시 등등.
한 사상가의 사유를, 그 사상가에게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사상가의 사유 아래 복속시키는 이런 단언은 문제가 되고 있는 사상가의 ‘독특성’을 무화시킬 우려가 있다. 어찌보면 그 ‘독특성’이 그 사상가의 핵심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요컨대 칼 맑스를 헤겔의 에피고넨이라고 단정한다면 맑스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겠는가? 질 들뢰즈를 칸트의 에피고넨, 스피노자의 에피고넨, 니체의 에피고넨, 베르그송의 에피고넨이라고 한다면 들뢰즈는 자신이 뛰어내린 아파트를 거꾸로 기어올라가 그렇게 말한 사람에게 이렇게 응수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다른 사상가의 뒤에 달라붙어서 그 사상가의 아이를, 그것도 아주 흉물스러운 괴물 같은 아이를 낳는 것이라고. 아감벤이 자신에게는 이런 비역질 취향이 없다고 손사래 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건 그의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철학사는 일종의 비역질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철학사에 이런 비역질을 하지 않아도 됐을 ‘부동의 동자’가 존재했다면 그건 오로지 신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작에 신은 죽었다(Gott ist tot-!). (끝)
※ 여담이지만 나는 하이데거가 현대 사상(특히 유럽의 그것)에 끼친 영향을 절대 과소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그의 그늘이 너무 짙다(물론 이 말이 위에서 밝힌 내 생각, 즉 누가 됐는지 간에 그 사람에 대한 하이데거의 영향을 과대평가/과장하지는 말자, 는 말을 취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렇게 된 연유는 프랑스 지성계의 하이데거 수용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혹은 반만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이데거의 고향인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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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흥미로운 책 <프랑스(인들)의 하이데거 해석들: 예외적인 수용>(French Interpretations of Heidegger: An Exceptional Reception, Albany, 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8)의 편집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들은 나치 부역자로 의심받았던 하이데거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물론 이 대답은 프랑스 지성인들이 하이데거를 왜 그렇게 열렬히 수용하게 됐는지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건 그 자체로 지성사적인 작업이 필요하며, 앞서 말한 책은 바로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이 책은 2002년 “하이데거와 프랑스”라는 주제로 미국 뉴헤이븐의 서던코네티커트주립대학에서 열린 북아메리카하이데거학회의 성과물을 모은 책이다. 그런데 이런 책은 돈 많은 출판사가 알아서 좀 번역해 출간해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하이데거처럼 짙은 그늘을 드리운 외국 사상가가 누가 있을까? 좌파임을 자임하는 사람들이라면 맑스나 레닌을, 우파임을 자임하는 사람들이라면 (스스로 인식하고 있든 아니든) 허버트 스펜서가 아닐까? ‘적자생존’의 창시자인 그 스펜서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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