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연구
알프레드 알바레즈 지음, 최승자 옮김 / 청하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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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제는 야만적인 신: 자살 연구. 저자가 제목에서 암시하고자 한 것은,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운명적인 힘에 대한 인간의 응전 혹은 반응이다. 여기서 야만적 신은 아즈텍의 신 테츠카틀리포카를 가리킨다. 이 신은 세상에 번영과 부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앗아가기도 하는 무서운 존재로서 사람들은 흥망성쇠를 쥔 그를 두려워하고 숭배할 수 밖에 없었다. 신은 운명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자살은 운명에 의해 궁지에 몰린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 그리고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인간적 반응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분명한 폭력행위일지라도 말이다.


 

저자는 자살을 대하는 사회의 극단적이고 완고한 두 태도를 지적하는데, 하나는 종교적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적 태도이다. 전자는 자살을 도덕적 범죄나 질병으로 단죄하며, 후자는 자살을 통계학적 연구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자살자 개인의 절망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완고한 편견들을 벗겨보려는 목적에서 자살을 역사적·사회적·예술문화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다섯 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첫 1장과 마지막 5장은 알바레즈 개인사와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저자에게 자살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도 그렇다. 사람 일 혹은 운명은 느닷없이 우리를 덮치기 때문이다.


 

1장 프롤로그: 실비아 플라스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 저자는 그녀를 개인적으로 잘 알았다. 시 비평가로서 알바레즈는 그녀의 시가 성장하고 변모해 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고 지인으로서 그녀의 개인사도 어지간히 알고 있었다. 저자는 그녀가 자살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시를 제한하고 오해하는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그녀의 자살은 실수였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그녀는 불행한 과거사가 있었지만 죽음과 대결해서 이겨내는 것을 시인됨의 자격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전에도 자살 시도는 있었으나 불행히도 이번에는 그것이 성공했을 뿐이다. 그녀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예술에 대해 얼마나 진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저자는 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생동감, 지적 요구, 거친 위트, 위대한 상상력의 자원, 맹렬한 감정, 그리고 절제불행을 예술로 바꿔 놓을 수 있었던 용기가 이 사실로 인해 간과되지 않기를 바란다.



2장 자살의 역사적 배경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런 죽음의 집으로 달려 들어간다면 그것은 죄일까?' 2장 서두에 인용된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자살이 죄였던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이 질문은 대단히 용감하다.


서구 사회에서 자살은 공포와 적대감의 대상이었다. 자살자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명예도 훼손되었다. 자살을 범죄로 보는 관념은 기독교가 고안해 낸 것으로서, 사실 기독교의 응징은 원시적 공포와 미신에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원시사회에서 자살자의 망령은 복수를 부른다고 믿었고 이것을 정화시키기 위한 주술적 행위를 했는데, 기독교가 이교도의 제전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믿음과 행위가 기독교화된 것이다. 그러나 신구약에는 직접적으로 자살을 금지하는 표현이 없다. 오히려 유다의 자살을 참회의 행위로 해석하는 태도가 보이고 초기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죽음도 일종의 자살로 간주했다.


한편, 북유럽 신화나 드루이드교, 플라톤 철학, 스토아학파는 자살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인생 자체가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변한다면 자살은 정당화될 수 있는 합리적 행위가 된다고 암시했으며 고통스런 병이나 견딜 수 없는 속박은 자살할 만한 충분한 이유라고 보았다.


초기 기독교에서도 이른바 순교열이 있었다.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사자의 먹이로 내주었을 때 기독교인들은 죽음이 천국의 지복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기꺼이 죽었다. 순교는 천국으로 가는 보증수표였다. 이 문제는 기독교 교리에 내재된 모순이었는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살을 달리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자살은 생명을 주신 신에 대한 대죄이며 정의와 인간애에 어긋나는 죄라고 규정했다. 생명은 신이 주신 선물이고 고난은 하늘이 지운 운명이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버릴 수 없으며 운명을 견디는 것만이 인간 영혼의 위대함을 재는 척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플라톤과 피타고라스 학파, 아리스토텔레스, 헤브류 장군 요제푸스의 견해를 종합한 것으로써 순수한 기독교적 사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상기할 필요가 있다.


후기 르네상스에 이르면 자살은 기독교 신앙과 도덕 체계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자살을 옹호하는 주장이 우회적으로 나오기 시작하고 그와 동시에 반대 주장도 종교적 배경을 깔고 강하게 펼쳐진다.


현대에 와서 자살은 사회현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고 자살을 이해하려는 긍정적 시도가 행해지는데 한편으로는 인간성을 무시하는 부정적 결과도 낳는다. 과거에 교회가 자살자를 유죄 판결한 행위는 최소한 자살자의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인간에 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자살은 상처받기 쉽고 가변적인 인간 세계로부터 쫓겨나 과학이라는 격리 병동 안에 꼭꼭 숨겨져 버린 것이다.(Pp.108-109)'

 


3장 자살. 그 폐쇄된 세계

자살은 선택의 결과이며 부인될 수 없고 번복될 수 없는 행위다. 자살자는 분명한 결단을 내림으로써 자기 인생에 대해 최소한의 자유를 행사하며 원치 않은 운명으로부터 벗어난다. 자살을 유치한 짓으로 격하시키고 정신의 평형이 무너져 있을 때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행위라고 평가절하하는 것은 자살을 윤리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뒤르켐에서 비롯된 자살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는 자살이 특수한 상황의 산물이며 자살률이 높을수록 사회적 긴장과 불안도 크다고 본다. 이와 같은 사회공학적 접근은 자살 문제가 사회적 양심과 관심, 잘 발달된 사회사업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낳는다. 이것 역시 자살에 대한 왜곡된 태도다. 자살은 섹스와 마찬가지로 분명한 인간적 특성이며 사회가 아무리 완벽해도 일어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살의 핵심은 무엇일까. 알바레즈는 내적 거부와 절망감이라고 보았다. 사회학자 폰 앤딕스 박사의 연구에서 다뤄진 29세의 여성 페니의 경우를 보자. 그녀는 오래도록 수모를 당한 끝에 자살하는데 그녀의 죽음은 상처받은 자존심과 굴욕감 때문이었다. 통계를 바탕으로 한 사회학적 접근 방식은 자살의 직접적이고 부분적 원인을 일부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나 페니의 사례처럼 장기간 완만하게 진행된 배후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해 주지 못한다. 카뮈는 자살이 위대한 예술작품들의 경우처럼 가슴 속 침묵에 예비되어 있다고 말했다. 자살의 바탕에는 극도의 비참한 상태와, 어떤 사회공학으로도 경감시킬 수 없는 결정적인 내적 고독이 존재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자살의 진정한 동기는 심층의 세계에 속한다. 프로이트는 자살을 죽음 본능 이론으로 설명한다(후반기에 그는 이 이론에 대해서 스스로 의문을 가졌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살자는 일종의 격정 상태에 빠져서 자아가 압도된 상태에 있다. 그는 마치 악몽이나 공상과학소설 속 환상처럼 논리적이면서 동시에 비논리적인 세계 속에 놓이게 되는데 그 세계는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고 제 나름의 엄격한 규칙을 따르고 있지만 완전히 도착되고 전도돼 있다. 자살자가 일단 자살을 결심하면 그는 완전히 폐쇄되고 절대적 확신을 가진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자아는 너무 연약해서 과거의 상처들이 치유되지 못한 채 끊임없이 표면으로 뚫고 나와 현재의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방해한다. 자살자의 삶은 대단히 비관용적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알바레즈는 쾌락 원칙을 따르는 인간의 세속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 대신 삶을 택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추정한다. '바로 이 세속성이 인간의 강점일지도 모른다... 자살을 반대하는 최후의 논거는 생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Pp.168-169)' 


알바레즈는 러시아 시인 오시프 만델스탐을 예로 든다. 그는 스탈린 치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죽었는데, 자살하자는 아내의 말에 그는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요. 종말이란 어디서나 똑같은 법인데, 이곳에선 그걸 재촉까지 하고 있다고 말하며 거부했다고 한다. ‘세속의 공포가 우리 삶에 어떤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것 같았어요... 행복이라는 것은 존재의 풍요로움과 강렬함의 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르겠어요라는 만델스탐 부인의 말은 인간에게 내재된 생명 본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Pp.183-184)


 

4장 자살과 문학

4장에서는 낭만주의자부터 다다이즘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살에 대한 인식이 변천하는 과정을 개괄한다. 요약하자면, 낭만주의자들은 자살을 새로운 해방으로 인식했고 천재성이 치러야 하는 많은 대가 중 하나라고 생각했고, 다다이즘은 여기서 더 나아가 예술을 포함한 모든 가치관을 거부하며 예술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의 20세기 예술계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예술가들의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한 것인데, 현대예술운동의 흐름은 세상의 재앙에 대해 더 내적으로 반응하여 예술가가 희생자이자 제물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저자는 본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다시 실비아 플라스로 돌아온다. 엘리어트 이후의 현대 예술가들은 작품과 예술가의 삶을 상호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인생이란 우리가 체험한 것을 고유하게 해석하고 재조직하며 은유적으로 상상하는 행위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래서 삶은 예술이고 예술이 삶이 되어서 경계가 없어진다. ‘극단주의시인들은 정신적 탐험을 더 강하게 밀어붙여서 개인적 혼돈과 대면하며 무의식의 심연까지 내려가 그곳으로부터 시를 건져 올린다. 실비아 플라스는 자기 내부의 분노와 죄의식과 거부와 사랑과 파괴성을 치밀하게 탐색하면서 죽음과 정면으로 대결하고자 했다. 그녀에게 '자살은 하나의 모험이었을 뿐이다.(p.259)' 따라서 그녀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삶과 작품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비단 예술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죽음의 형태가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하게 다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5장 에필로그 해방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자신이 자살 실패자임을 고백한다. 결혼이 고비를 맞았던 인생의 한 시기에 그는 진심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인생이 너무도 혼란스럽고 너무도 꽉꽉 막힌 것처럼 느껴졌기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나는 숨쉴 공기도 없고 출구도 없는, 하나의 폐쇄된, 그리고 응집된 세계에 살고 있었다.(p.268) '그는 자살의 폐쇄된 세계에 들어섰고, 아내와의 불화는 자살의 원인이 아니라 기다리던 구실이었다. 자살 실패 후에 저자는 자신이 낙관주의자였음을 깨달았다


당시 그는 절대적 절망감을 느꼈고 자신에게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어딘가에 해답이 있다는 낙관적 기대를 내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살 실패는 죽음 속에도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자 저자는 '행복하든 불행하든 크게 상관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저자는 자살 시도 후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죽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죽은 자신은 극도의 긴장, 감수성, 자아의식, 오만함, 관념주의 같은 것들이었다. '죽음은 단지 하나의 끝, 더도 덜도 아닌 확실한 끝이라는 사실을, 내 자신의 육체와 신경 감각을 통해 스스로 발견한 이래, 모든것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 자체가 한 형태의 죽음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p.284)' 자살 시도를 하기 전의 그와 시도 후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인 셈이다.

 

저자는 말한다. 자살은 도덕을 초월한 문제이며, 사회학적으로 예방이 가능하지도 심리학적 질병으로 단정지을 수도 없는 문제라고. '자살 행위 자체에 대한 완벽한 철학적 근거는 아직까지 누구에 의해서도 제시되지 못했다(p.179)'라는 지적과, 자살은 비극적 운명을 맞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무시무시하고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반응(p.285)'이라는 알바레즈의 말은 자살을 설명해 보려는 수많은 이론과 연구 속에서 가장 진솔하게 자살을 바라보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죽음이 닥쳐왔을 때 그것은 어쩌면 자살보다 더 불결하고 불편할 것이라는 말로써 알바레즈는 이 글을 마친다. 실은 자살이 문제가 아닌지 모른다. 문제는 죽음인 것이다. 우리 중에서 누군가가 감히 스스로 죽음을 당겨옴으로써 우리에게 생의 종결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 자살에 대한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모든 자살에는 이유가 있을 테고, 모든 자살자는 그만의 사정으로써 죽는다. 이 책에서 다룬 여러 사례들과 저자의 경험담도 그저 수많은 이야기들 속의 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만은 분명하다. 자살자는 절망과 절대 고독 속에 놓여있었다는 것. 우리도 그런 막다른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동류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잊지 말고 그들 앞에서 예의를 다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그들의 삶을 살았고 어쩌면 우리보다 더 치열하게 삶과 싸웠을 위대한 패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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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랜드
제시카 브루더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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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최악의 불평등 현상에 대한 보고서라고 해도 무방하다.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떠돌이(노마드)로서의 새로운 삶의 형태를 끝내 창안해내는 생명력과 연대의식은 희망적이지만 동시에 암담하다. 이들의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 대한 무서운 경고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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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대하여 - 죽음을 생각하는 철학자의 오후
사이먼 크리츨리 지음, 변진경 옮김, 하미나 해제 / 돌베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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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크리츨리는 서문을 자살은 잘못된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이 책은 그에 대해 대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고답은 아니다이다자살에 대해 행해졌던 이제까지의 비난과 눈총과 거리낌은 부당한 것임을 저자는 역사적 궤적과 사유로써 풀어나간다.

 

저자는 자살을 자유로운 행위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행위라고 단정짓지 않고 그럴 여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살에 대해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자살자에 대한 무조건적 비난을 멈추고 연민의 마음으로 대할 것을 권한다. 우리 사회는 자살을 설명하는 어휘가 빈약하다자살은 드러내놓고 논의되지 못했고 따라서 명확하게 언어화될 기회를 갖기 못했다. 크리츨리는 우리 사회가 자살에 대한 논의를 좀 더 활발하게 하기를 바라는 의도로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자살이 자유로운 행위라면이것은 삶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우리는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이 물음에 대해 저자는 시오랑의 희극적 염세주의를 제안한다우리가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구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시오랑에 따르면죽음 뒤에 더 좋은 게 기다리고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낙관주의라는 것이다이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크리츨리의 다음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중요한 것은 삶을 부드럽게주의 깊게 볼 수 있도록 삶을 정지해 있게 하면서 극단적인 폭력 행위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더 느린 형태의 주의를 기르는 능력이다우리는 계속해 나가야 한다. 


여기서 더 느린 형태의 주의는 의미가 모호한데본문에 나오는 마음을 진정하고란 표현과 어딘가 연결이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이해한다면크리츨리의 제안은 이렇게 다시 쓸 수 있겠다극단적인 폭력 수단을 쓰기 전에 일단 마음을 진정하고 삶을 정지한 채 찬찬히 상황을 바라보며 출구를 찾아보자.


1장은 기독교와 정신 의학에서 자살을 대하는 취하는 편협한 태도에 주목한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자살은 신이 주신 생명을 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죄악이다(하지만 성서에는 어디에도 자살을 금지하는 말이 없다), 한편으로, 정신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정신 장애이다.


그러나 자살은 이것보다 더 성숙하고 관대하며 성찰적 논의가 절실히 필요한 주제이다. 예를 들자면, 영국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이미 17세기에 놀라운 주장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자살은 신과 자연의 선물이며 인간의 타고난 자유다사람들은 가볍게 또는 되는 대로 목숨을 버리지 않으며삶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 될 때 삶을 포기한다고 흄은 말한다여기서 문제는 인내의 한계내 생각에인내의 한계는 절대 객관적으로 정해질 수 없으며 철저히 주관적이다사람에 따라사회에 따라시대에 따라 인내의 한계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2장은 자살에 대한 역사적 변천을 간략하게 훑는데, 기독교가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기 전, 고대 스토아 사상에서는 자살을 정당한 행위로 간주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스토아주의자들에 따르면, 자살은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상태에 작별을 고하는 고결한 태도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자살은 하느님의 권력을 사람이 침해하는 죄에 해당한다이 관점은 현대 서구사회에서 아직도 미묘하게 사람들의 도덕적 사고를 계속 형성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나 삶이 신(혹은 부모공동체자연적 우주적 질서)에 의해 주어진 선물이라면 선물은 받는 사람에게 속한다거부할 수 없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다. 신이 무한한 사랑이라면 그런 사랑은 자신의 피조물이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 할 때 자살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생명 존엄성의 관점에서 보더라도극심한 고통을 겪는 경우에 인간의 생명이 고통 속에서 무의미하게 연장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자살은 이기적인가살아야 하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의무인가자살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피해 뿐만 아니라 정서적 피해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인데저자는 자살을 무조건 이기적 행위라고 비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타인에게 끼치는 피해의 문제는 자살을 원하는 사람에게 참을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의 상황 속에서 계속 살아가도록 강요함으로써 야기되는 피해와 견주어 보아야 한다로빈 윌리엄스가 가족이나 팬들을 위해 살아야만 했을까우리가 도덕적 확실성을 갖고 그 판단을 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3장에서는 자살 유서를 토대로 자살을 분석하고 있는데저자는 자살자가 유서를 남긴다는 점에서 자살이 홀로 죽고 싶어 하지 않는 행동이며 공적이고 공개적인 행동이라고 본다. 그리고 자살이 강한 자기애에서 비롯되며, 내가 나를 증오해서 일어나는 살인 행위라는 프로이트의 분석도 인용한다하지만 이러한 저자의 분석은 자살 유서의 분량이라든가 범위에 있어서 충분히 연구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의문이다. 

 

4장에서 저자는 다시 자신의 사유로 돌아온다크리츨리는 서문에서 자살을 자유로운 행위로 생각해 보자는 말로 책을 시작하는데, 책의 마무리는 삶의 혹은 인간의 복잡성과 관련짓는다. 즉, 삶과 인간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죽음의 형태로 설명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자칫하면 그 복잡성을 박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살은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일관성을 부여할지 모르지만 죽음으로써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한다면 그의 삶에서 복잡성을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크리츨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린다울프의 삶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자살이 아니다그의 삶의 일관성은 작품에 담긴 용기와 그가 삶에 대해 쓴 것에서 비롯된다. 


이 책은 해제에서 하미나가 말한 대로, 순수히 사유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구체적이고 학문적인 연구에서 도출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한계도 있겠지만, 이런 저런 방향으로 자살을 더 느슨하고 자유롭게 바라보는 장점이 있다. 이런 글도 있어야 다른 글도 나올 수 있는 게 아닐까.

자살이란 무엇이다라고 규정짓는 순간, 세상의 모든 자살자들과 자살의 사연은 하나로 묶이며 개성을 잃는다. 특히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확실하게 잃는다. 그것은 바로 연민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갖는 연민 말이다. 연민이야말로 우리를 인간이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부록.

자살에 대하여 -데이비드 흄

자살은 신과 자연의 선물이며 인간의 타고난 자유다사람은 삶의 재앙을 맞았을 때 그 해결책으로 자살이라는 방법을 쓸 수 있으며 이에 대해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자살은 신이나 우리의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를 위반하는 행위가 아니다불행이 내게 닥친다면 그것도 신의 섭리이듯불행으로 인해 내가 죽기로 선택한다면 그것 역시 신의 뜻이다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생명을 처분하는 것이 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면생명을 지키기 위한 행위도 신의 권리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범죄가 될 것이다.

인간의 삶은 불행할 수 있으며 이 경우에 인간의 존재가 연장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따라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누린 선과나를 위협하는 불행을 피할 수 있는 힘이 내게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한다세네카는 <서간집>에서 말했다자신의 의지 대로 살 수 있는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라. 고통과 슬픔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더는 인내할 수 없어 삶을 포기할 정도라면내게 삶이 주어졌던 것처럼 내가 삶으로부터 소환됐다고 확신한다.

나는 사회에 작은 선을 행하기 위해서 큰 희생을 바칠 의무가 없다건강이나 권력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세상과 사이좋게 지낼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삶이 유지할 가치가 있을 때는 누구도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

자살은 우리 자신의 이익이나 의무를 위배하는 것이 아니다나이나 병불행은 삶에 짐이 될 수 있고존재가 짐이 될 때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분별과 용기 있는 행동이다우리 모두는 삶에서 행복할 기회를 누리고 모든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그리고 그러한 선택은 사회에 유용한 것이기도 하다.

 

해제 -하미나

하미나의 해제는 이 책과 독립해서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글의 마지막 대목은 크리츨리가 버지니아 울프의 삶을 바라보는 관대하고 열린 태도를 동일한 방식으로 그러나 더 부드러운 연민의 마음으로 변주한 것처럼 느껴져 여기에 그대로 인용한다자살로 우리 곁을 떠난 많은 이들을 떠올렸다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한 이들을 떠올렸다그간 그들의 상실을 아파하느라 그들의 과거마저 너무 슬프게 기억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그들이 피해자였던 것만은 아니다용감한 전사이기도 했다자살을 시행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었겠고 그의 실존적 질문의 답이었을 것이다그것에 관해 따지는 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그러나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이제 남은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삶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삶도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그들이 끝내기로 마음을 먹었어도 내가 기억하고 그들의 영향 아래 살아 있다면 그들도 여전히 내 곁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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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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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정서를 작가의 것이라고 해야할지, 북유럽의 것이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온 포세의 작품은 처음 읽어보고, 북유럽 작가의 글들 역시 많이 소개돼 있지 않아서 아는 게 없다.


아는 게 없다는 것은 선입견 없이 작품과 만난다는 점에서 작품에 대한 느낌을 솔직하게 느낄 수 있는 이점이 있는 것 같다.


'걸작'이니 '진귀한 문학적 위대함'이라는 수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광고를 위해 다분히 과대 포장됐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그럼에도 책을 손에서 내려놓기 힘들게 하는 뭔가는 분명히 있었다. 두 번을 읽었다. 이야기의 끝을 보게 만드는 힘, 두 번을 읽게 만드는 힘이 뭔지 궁금했다.  


작가는 인물을 숲으로 이끌고, 막다른 길까지 내몰았고,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했으며, 눈을 내리고 어둠을 내렸다. 인물은 혼돈 속에 갇혔다. 그는 숲이 아닌 마음속에, 절망 속에, 갇혔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인물을 극단으로 내몰고 있나, 하는 아슬아슬함이 책을 계속 읽게 만들었다. 인물이 처한 상황은 사람이 살다 보면 처할 수 있는 상황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인물의 끝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니, 내 상황의 끝을 주인공을 통해서 보고 싶었다고 하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이야기는 결국 신성으로 귀결되었다. 작가는 침묵과 귀 기울여 들음을 통해서 신을 만나고 싶었던 것일까. 죽음과 신을 주제로 즐겨 삼았다는 소개글을 읽고 작가의 의도를 어렴풋이 추정해본다.  


솔직히, 돌아가신 부모를 만나고 흰빛과 죽음의 안내자를 만나는 것은 새롭지 않다. 서구 세계에서는 흔히 이렇게 죽은 이의 영혼이 내세로 들어간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길을 찾는 주인공에게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한 건 마찬가지"라는 부모의 고백은 진부하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새롭지 않다.   


이 소설의 새로움은 그보다는, 단어와 문장을 음악적으로 구사하는 방법, 길을 읽은 자의 마음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며 주제를 변주해서 진전시켜 나가는 방식, 그리고 소설 초반에서 주인공의 상황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대담함이 아닐까 싶다.   


특히, 이 소설의 힘은 도입부에 있는 것 같다. 흰빛과 부모가 등장하는 중반 이후부터 신성으로 귀결되는 전개와 결말은 개인에 따라 선호도가 갈릴 것이라고 짐작된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진전에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제기하는 보편성은 삶 자체에 대한 회의와 절망, 신뢰할 수 없는 인간 이성,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진리를 다루고 있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해되지 않는 삶의 부조리성, 무한한 사고의 루프, 미로 같은 삶은 숲에서 길을 잃음으로 상징된다. 그 삶은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삶이다. 

 

주인공은 독백한다. "이보다 더 바보 같은 상황이 있을까." 그렇다, 이보다 더 바보 같은 상황이 있을까, 하는 한탄을 우리는 살다 보면 할 때가 있다. 주인공은 또한 자신이 항상 "혼자"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휴식"이었다고. 이 역시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그래서 외롭고 지친 사람이 원하는 것은 결국 "고요함"일지 모른다. "사방이 완전히 고요"해져서 "침묵 속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절실한 마음은 마치 내 마음만 같아서 주인공에게 나를 이입시키게 된다.

    

작가가 상상하는 신성한 빛의 존재까지 상정하지 않더라도, 어둡고 춥고 막막한 깊은 숲 속에 놓인 당황하고 지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주 조용히 서서, 아무 소리도 없는 고요함을, 정적을, 듣는" 일일지 모른다. 침묵 속에서 고요함을 경청하는 일은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저 고요함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그 자체로 자족적인 행위가 아닐까, 싶다.  


...나는 아주 조용히 서 있다. 사방이 완전히 고요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고요함의 소리를 듣고 싶다. 침묵 속에서는 신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듣고 있다. 정적을, 아무 소리도 없는 고요함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p.59)


여기서 더 나아가, 주인공이 "빛 속으로 들어가 무의 공간과 하나가 되어 순백색 속에서 숨을 쉬는" 결말도 굳이 기독교적으로 해석할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 내 편견으로 종교적 시선에 대해 지나치게 불편해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작가가 형용하고 있는 그 상태는 절대적 평온함, 절대 무의 세계이기에 신성함이라는 말로 밖에는 형용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방편적으로 기독교인은 그것을 하느님으로, 불교인은 열반으로 부르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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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전에 쓰는 글들 - 허수경 유고집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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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라기에는 너무 시적이며, 메모나 수필이나 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적인 글들이 담겼다. 자발적 외로움은 고독이 되었고 사유는 진실에 다가간다. 시인은 이 글들이 공개되어 읽히기를 원했을까? 독자로서는 감사하나 시인은 아무래도 얼굴을 붉혔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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