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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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여러 인물이 화자가 되어 자신의 내면 풍경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물들의 교체는 순간의 인상들이 고리가 되는데, 문단의 구분조차 없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읽기가 매우 어렵다. 왜 굳이 이런 작법을 써야 했을까를 물으며 소설을 읽었다. 작품을 다 읽고 느낀 결론은, 하나의 인상이 한 인물과 다른 한 인물에게 상이한 영향과 연상 작용 등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이 작법은 아주 효과적인 동시에 유일한 것 같다는 것이다. 독자에게는 작품의 진입 벽이 높지만 그 벽은 힘들게 넘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느낀다.  


소설은 이 하루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시간 안에서 펼쳐치면서 동시에 댈러웨이 부인의 청춘에서 노년까지의 세월에 대해 추억한다. 시간의 흐름이 이중으로 연주되는 것인데, 하나는 현실적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하는 시간이다.


이야기의 전개는 마치 모든 물줄기가 하나로 모여 큰 강물을 이루는 것과 비슷한데,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작은 물줄기가 되고 이 물줄기들은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서 점점 몸집을 불려서 유장하게 흐르면서 하나의 큰 이야기를 이룬다. 물줄기가 모여 '강'이 되듯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모여서 '삶'이라고 불리는 크고 추상적인 거대한 개념을 형상화한다. 


혹은 이 소설을 꽃다발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한 송이 한 송이를 모아 커다란 꽃다발을 이루듯이 한 인물 한 인물이 모여서 크고 아름다운 꽃다발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는 것만 같다. 


꽃다발은 실제로 이 소설에서 상징처럼 쓰이고 있는데, 소설 첫 문장은 '꽃은 자기가 사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p.7)'로 시작된다. 이 꽃다발은 그날 저녁에 있을 파티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의 중요한 두 친구는 그녀의 젊은 시절을 '흰 드레스를 입고 꽃다발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기억한다. 댈러웨이 부인의 남편은 부인에게 사랑의 징표로 꽃다발을 안긴다. 


그런데 강물은 흘러가서 붙잡을 수 없고, 꽃은 시든다. 삶은 이렇게 불확실하며 무상하다.  강물이 흘러간다는 것도 시간이어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손을 담글 수는 없다. 내 앞의 순간들은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다. 꽃을 시들게 하는 것도 바로 시간이다. 유한한 삶,  그렇다. 우리 인간은 모두 유한한 삶을 산다.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소설에서 중간 중간 등장하는 탑의 종소리는 우리에게 '기억하라, 인간의 삶은 끝난다'를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장치일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젊음은 끝났으며,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댈러웨이 부인은 인식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파티를 준비한다. 병을 앓고 나서 본격적으로 노년에 접어든 여인에게 이러한 행위는 무의미해 보인다. 그런데 진짜 무의미할까? 바로 이 지점이 버지니아 울프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유한한 시간, 그 시간을 살아내는 인간의 유약함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은 모순될 수도 있을 두 생각을 '그래서'로 잇는 매우 독특한 마음의 소유자인데, 이를 테면 '레이드 브래드쇼는 딱하게도 우둔한 여자야-미워할 수가 없어.(p.239)' 식이다. 동일한 사고 방식은 삶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즉, 삶은 유한하고 인간은 어리석고 연약하기에 '그래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수가 있다. 이것이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었던 요점일 것 같다. 물론 그 요점을 다양한 삶의 색채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지만.    


삶에 대한 사랑이 큰 만큼 사랑을 잃는 것, 다시 말해서 늙어가고 결국 죽을 것이라는 삶의 여정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 두려움은 삶의 어두운 뒷면에 대한 것도 포함한다. 삶을 실패하는 것 말이다.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다음의 묘사를 보자. '두려움이라는 것도 있다. 부모가 손에 쥐어 준 이 인생이라는 것을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 평온하게 지니고 가야 한다는 것에 덮쳐 오는 무력감.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도 끔찍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p.241)'  


파티를 열어 삶을 축제로 만들고 싶은 댈러웨이 부인은 파티가 한창 열리고 있는 와중에 한 청년의 죽음을 듣게 된다. 그녀는 놀랍고 두려워 빈 방으로 숨어든다. 그녀는 청년이 실패했음을 본다. 죽었으니까. 실패와 죽음, 이중의 사실 앞에서 그녀는 극도로 충격을 받는다. 


죽은 청년은 전쟁의 트라우마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셉티머스라는 인물로, 의사가 자신을 부인으로부터 떼어내 요양원에 격리시키려고 집을 방문했을 때 부인이 의사의 권고를 거절하기 위해 현관으로 내려간 사이에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다. 청년도 댈러웨이 부인처럼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산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p.195)' 하지만 요양원에 격리되어 사랑하는 부인과 떨어져야 하는 삶은 자신의 영혼이 손상되는 삶이다. 청년은 삶을 지키고 싶었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고통의 어둠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 보지 않은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죽어야 하는 이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렇기에 '뛰어나감'이라는 행위는 이 소설에서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매우 용감한 행위이다. 인간의 영혼과 삶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맨 앞머리에서 댈러웨이 부인은 아침에 꽃을 사러 집 밖으로 나가며,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p.7)'다고 느낀다. 그녀는 찬란한 삶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다. 실패와 늙음과 죽음을 함유하고 있는 위태로운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청년 셉티머스가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자신의 영혼과 사랑하는 아내와의 삶, 아름다운 삶을 지키기 위해서.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 한 사람은 6월의 빛나는 아침이 펼쳐지는 삶의 복판으로 뛰어들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의 복판으로 뛰어든다. 


이 소설에서 시간의 흐름과 죽음은 매우 강력한 주제다. 소설 곳곳에서 계속 종소리가 울리고 노년의 여인들이 나오고 병과 늙음이 언급되는데, 그 절정은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에서 청년 셉티머스의 죽음을 전해듣는 대목이다. 그녀는 어두운 작은 방에 홀로 숨어 들어가 죽은 청년을 생각한다. 그리고 끝내 이른 생각은, 그가 불쌍하지 않다는 것이다. '젊은이는 자살을 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왠지 그와-자살을 한 청년과- 아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이,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린 것이 기뻤다. 시계가 종을 쳤다. 납처럼 둔중한 원이 공중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가봐야 했다. 손님들과 어울려야 했다. 샐리와 피터를 찾아야 했다. (p.243)' 청년의 죽음이 기뻤다니. 댈러웨이 부인은 어떻게 해서 이런 결론에 이르렀을까? 


댈러웨이 부인은 어둔 방에서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보는데, 문득 맞은편 집에서 노부인이 정면으로 자기 쪽을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한다. 노부인은 잠자리에 들려고 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석양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노부인이 조용히 잠자리에 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데 탑에서 종 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이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이. 


이 노부인은 평소에도 그녀가 존경심을 느끼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창밖 맞은편 집에 사는 노부인이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올라가고 싶으면 올라가고, 멈춰서고 싶으면 멈춰서면 될 것이었다. 아니면 클라리사가 종종 보았던 것처럼, 침실로 가서 커튼을 열과 그 뒤편으로 다시 사라지든지.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는 채 창밖을 내다보는 그 노부인에게는 왠지 존경심이 들었다. 그 광경에는 어딘가 엄숙한 데가 있었다... 영혼의 비밀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그녀를 울고 싶게 만드는 광경이었다.(p.167)' 노부인은 죽음을 곁에 두고 그저 담담히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상징 같이 보인다. 


더는 두려워 말라, 태양의 열기를.

사나운 겨울의 횡포를. - 셰익스피어의 <심벌레인>에 나오는 구절


댈러웨이 부인이 거듭 떠올리는 저 구절은 그녀가 지극히 삶의 어두운 뒷면을 두려워했음을 반증한다. 실패와 늙음과 죽음을. 그러나 노부인은 늙고 죽을 존재로서 지금 살아있다. 노화와 죽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있을 수 있고, 그것도 아주 담담하게 살아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존재로서 노부인이 있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궁극적 자세일 수 있다. 그래서 노부인의 모습에서 댈러웨이 부인은 엄숙함을 본다. 


청년의 죽음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던 그녀는 문득 맞은편 창문에서 노부인의 모습을 보는데, 노부인은 평화롭게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니, 평화롭게 죽음으로 들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댈러웨이 부인이 청년의 죽음을 기뻐할 수 있게 된 까닭은 그가 그렇게 평화로운 죽음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린 것이 기뻤다.(p.243)' 사랑하는 만큼 두려운 삶의 모든 것을 과감하게 떨쳐버린 것이 그녀는 기뻤던 것이다. 그녀는 왠지 청년과 자신이 아주 비슷하게 느껴졌다. 


과연 청년은 댈러웨이 부인처럼 삶을 지극히 사랑했다. '나무들은 물결치듯 흔들렸다. 환영하오, 세계는 그렇게 말하는 성싶었다... 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차분하고 이성적이며 있는 그대로 평범한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진실 그 자체였다. 아름다움이란 이제 진실이었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었다.(p.94)' 그러나 그는 '버림받은 것이었다... 사람 사는 땅을 뒤돌아보는. 세상의 해안에 난파당한 뱃사람처럼 누워 있는 자는.(p.124)' 청년과 댈러웨이 부인의 차이라면, 그녀의 말대로 남편이 곁에서 그녀를 지켜줬기에 삶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청년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  


아침에서 시작해 저녁으로, 젊은 시절의 기억으로 시작해 노부인과 청년을 통한 죽음의 환기로 이어지는 소설의 흐름을 생각하면, 이 소설의 제목이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는 뒷얘기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제목이 훨씬 더 포괄적이다. 삶의 덧없음 속에서 순간의 핵심, 삶의 핵심을 붙잡고자 하고,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부름에 집중하는 그녀는 6월의 아침 햇살처럼 빛난다.


아직도 여러 달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마치 그 떨어지는 방울을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클라리사는 (화장대 쪽으로 다가가며) 바로 그 순간의 핵심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거기에 고정시켰다 - 이 유월 아침의 순간을. 다른 모든 아침들의 무게가 실려 있는 이 아침의 한순간을 고정시키듯, 그녀는 거울과 화장대와 늘어선 병들을 새삼스럽게 둘러보면서, 자신의 전부를 한 점에 모아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서), 섬세한 분홍빛 얼굴을 마주 보았다. 오늘 저녁 파티를 열려는 여인, 클라리사 댈러웨이, 그녀 자신의 얼굴이었다... 거울을 보면서 그녀는 입술을 꼭 오므렸다. 그러자 얼굴에 구심점이 살아났다. 예리하고, 화살 같고, 분명한, 그것이 그녀 자신이었다.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어떤 부름, 어떤 노력이 부분들을 - 그것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인지는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 한데 끌어 모을 때의 그녀 자신이었다. 그렇게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의 중심, 하나의 다이아몬드, 응접실에 앉아 사교의 중심이 되는 한 여인의 얼굴을 내보이는 것이다. 따분한 생활에 분명 생기를 돌게 하고, 외로운 이들에게는 아마도 피난처라 될 수도 있을 터이다.(Pp.52-53).'

 

꽃다발을 안고 삶의 기쁨을 노래하며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이어주고 포용하는 그녀, 파편 같은 삶의 순간들과 사람들을 조합하고 새롭게 창조해내어 삶에 봉헌하는 파티을 여는 그녀.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인물은 꽃처럼 연약하고 유한하며 불완전하지만 그래서 더 빛나고 아름답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이 순간적으로 명멸할 때 빛의 존재감이 가장 극대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소설은 필연적으로 이렇게 끝나야 하는 것이다. .  


"나도 갈게요." 피터는 말했지만, 잠시 더 앉아 있었다. 이 두려움은 뭐지? 이 황홀감은? 그는 생각했다. 나를 이토록 흥분으로 채우는 이건 대체 뭐지?

클라리사로군. 그는 말했다. 

거기 그녀가 와 있었다.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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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에티 힐레숨 - 근본적으로 변화된 삶
패트릭 우드하우스는 지음, 이창엽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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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 힐레숨은 네덜란드 유대인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에티 힐레숨은 열한 권의 일기와 많은 편지들을 남겼다.

 

이 책은 에티의 일기와 편지에서 중요한 내용들을 추린 일종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글을 직접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책에 인용된 글들을 통해서나마 에티 힐레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책의 부제는 근본적으로 변화된 삶이고 저자 패트릭 우드하우스는 영국 성공회 사제인 걸로 미루어, 근본적 변화란 신을 모르던 사람이 신을 알게 된 것을 뜻하는 것이려니 짐작했다. 책 날개에도 에티 힐레숨의 일기와 편지가 홀로코스트 시대의 가장 놀라운 신앙 고백 문서라고 소개돼 있다. 하지만 그녀는 초교파적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녀의 은 기독교라든가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기성 종교의 신으로 한정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신은 그 신들을 포용하고 넘어서는 곳, 더 근원적인 곳에 머문다. 그녀의 가방 속에는 이슬람 경전 코란과 유대교의 탈무드가 들어있었고, 그녀가 애독한 책들은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시인 릴케 그리고 신약성서였다.

 

에티 힐레숨을 짧게 요약해서 설명할 방도를 모르겠다. 마치 신약성서의 바울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바울의 회심이 신비로웠던 것처럼 에티 힐레숨의 그것도 그렇다. 그녀의 정신세계는 깊고도 넓어서 간단히 가늠할 수 없고, 마치 성경을 읽듯 한 줄 한 줄을 세심하게 읽으며 오래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모든 사람은 자기 내부로 시선을 돌려서, 남들 내부에서 파괴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것을 자기 내부에서 파괴해야만 해. 우리가 세상에 아주 작은 것이라도 증오를 더하면 더할수록 세상을 더 살기 힘들게 만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돼.

 

- 최근에 깨달았다. 모든 순간은 새로운 순간을 낳고, 생생한 가능성이 충만하며,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 같을 때가 있다. 문제가 있는 순간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부질없이 오래 끌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풍요로운 순간이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장대한 일련의 순간들이 끊임없이 흘러가며 이루어지는 것이다.

 

- 지금 나는 햇빛 아래 작은 테라스의 쓰레기통 위에 앉아서 빨래통에 머리를 기대고 있고, 밤나무의 단단하고 짙은 색 가지 위에 해가 걸려있는데, 과거와 분명히 달라진 게 있다.... 과거에는 지성으로 나무와 태양을 받아들였다. 그것들이 왜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지 말로 쓰고 싶었고, 모든 게 서로 잘 어울리는 이유를 이해하고 싶었고, 그 깊은 원시적 느낌을 정신으로 헤아리고 싶었다... 다시 말해 나는 자연과 모든 걸 나에게 복종시키고 싶었다. 그것을 설명해야만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일어나는 그대로 놓아둔다... 햇빛 아래 앉아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숙였는데, 마치 이 새로운 삶의 인식을 더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문득 깊은 내면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손에 묻은 채,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생각으로는 아무 데도 도달할 수 없다. 생각은 학문 연구에 훌륭하고 뛰어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감정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없다. 전혀 다른 것이 필요하다. 감정을 다루려면 수동적이 되어야 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 조각 영원과의 접촉을 회복해야 한다.

 

- 언젠가 분명히 생각과 감정의 균형을 이룰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한다. 말하지 않고 외부의 소리를 듣지 않고 완전히 침묵하고 가장 깊은 존재의 소리가 울리게 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 내 안에서 가장 깊고 최선인 것, 그것의 이름은 신이다.

 

- 지금은 전쟁 중이다... 사람들은 겁을 먹었고, 그들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는 걸 안다. 박해와 억압, 독재, 무력한 격노, 잔인한 가학증에 대해서도 안다. 그런 것들을 모두 안다... 하지만 내가 무방비 상태일 때, 혼자 남았을 때, 나는 문득 삶의 맨 가슴the naked breast of life에 안긴다. 삶의 팔은 나를 감싸며 부드럽게 보호해 주고, 나의 심장 박동은 아주 느리고 규칙적이며 부드럽고 조용하고도 한결같이 뛴다. 그것은 지극히 선하고 자비롭다. 삶에 대한 나의 태도도 그렇다. 전쟁이나 그 어떤 몰상식한 인간의 잔학 행위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다.

 

- 한가지가 점점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즉 당신()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스스로를 돕기 위해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이며 중요한 것입니다. 신이여, 우리 안에 있는 당신의 작은 조각을 보호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보살핍니다.

 

- 중요한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생명을 보존하느냐다.

 

- 밤에 수용소에서 판자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주위에서 여자들과 아이들이 조용히 코를 골거나 꿈꾸면서 소리를 내거나 가만히 흐느끼거나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낮에 나에게 우리는 생각하고 싶지 않고 느끼고 싶지도 않아. 생각하고 느낀다면 분명히 미쳐 버릴 거야.”라고 자주 말했다. 나는 몇 시간이고 잠들지 않은 채 누워서, 한없는 다정함으로... “제가 이 막사의 생각하는 가슴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 슬픔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슬픔으로부터 도망가면 안 되고 어른스럽게 슬픔을 견뎌야 한다. 증오를 통해 슬픔을 줄이려 하지 말고, 모든 독일의 어머니들에게 복수하려 하지도 말라... 모든 사람이 슬픔을 정직하고 용감하게 견디면, 세상을 가득 채운 슬픔이 누그러질 것이다.

 

-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국경이 없다.

 

- (암스테르담의 긴 도로를 터벅터벅 걸으며 유대인 출입이 금지된 길가의 카페들을 지나쳤고, 옆으로 유대인 탑승 금지 전차가 지나갔다. 그 순간 에티는 깨달았다.) 여러 시대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신의 땅 위에서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며 지치고 발이 벗겨졌다... 내가 지치고 병들고 두려울 때 난 혼자가 아니다... 나는 수백 년 동안 살았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하나이고, 모든 고통은 삶의 일부다.

 

- 만일 (수용소로 가라는) 소환장이 내일 온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일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에서 가장 조용한 곳으로 가서 내면으로 물러나 내 몸과 영혼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기력을 모두 끌어모을 것이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립스틱은 던져버릴 테다. 그 주가 끝나기 전에 릴케의 편지를 마저 읽을 것이다. 그리고 남겨 뒀던 두꺼운 겨울 외투 옷감으로 바지 한 벌과 상의를 만들어야겠다.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를 최선을 다해 안심시킬 것이고, 짬이 날 때마다 그에게, 언제나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보려 할 것이다... 조만간 치과에 가서 많고 많은 충치를 때워야겠다. 수용소에 있을 때 이가 아프면 정말 끔찍할 테니까. 배낭을 구해서 꼭 필요한 것들만 채워 넣을 것이다. 어쨌든 모두 품질 좋은 것들이어야 한다. 성경을 가지고 갈 것이고, 릴케의 얇은 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도 가져가고, <기도시집>도 한 구석에 끼워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진은 가져가지 않겠다. 다만 그들의 얼굴과 익숙한 몸짓들을 모아 마음 속의 공간 벽에 걸어두겠다. 그러면 그들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 이 두 손과, 단단한 어린 가지처럼 표현이 풍부한 손가락들도 나와 함께 갈 것이다. 그러면 두 손은 기도로 나를 보호해 주고 마지막까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탐색하는 표정을 지닌 짙은 색 눈도 나와 함께 갈 것이다.

 

- 한때 히틀러가 나오고, 다른 때는 폭군 이반 4세가 나오고, 다른 때는 종교재판이, 그 다음에는 전쟁, 전염병, 지진, 기근이 일어난다.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고통을 견디는 것, 고통에 대처하는 것, 자기 영혼의 작은 구석도 순수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 그렇다. 우리는 내면에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신과 천국은 물론 지옥과 땅과 생명과 죽음과 모든 역사가 우리 안에 있다. 외부는 단지 많은 버팀목일 뿐이고, 필요한 것은 모두 우리 안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선한 것과 더불어 악한 것까지,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악한 것을 고치는 데 삶을 바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 우리는 개인들에게 증오를 쏟을 수 없다. 어느 한 사람을 비난하면 안 된다. 체제가 그들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그들도 자신이 처한 특정한 개인적 사회적 상황의 영향을 밭아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들도 슬픔, 불의, 굴욕에 대응히야 하고 끔찍한 부당함과 굴욕을 겪을 때도 있다. 나치 이데올로기가 모든 사람의 집단적 마음을 해쳤다.) 불온한 구조는 무너질 수 있다. 우리 모두의 머리 위로, 심문 당하는 사람은 물론 심문 하는 자들의 머리 위로도 무너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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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인상주의 그림 50
이네스 야넷 잉겔만 지음, 이정연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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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품절돼서 아쉽다. 판형이 비교적 크고 인쇄도 나쁘지 않다. 인상주의 작품들이 다양하게 소개됐고 작품 설명도 개성 있다. 인상주의에 대한 전형적 시각을 벗어나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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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디테일로 보는 명작의 비밀 1
다이애나 뉴월 지음, 엄미정 옮김 / 시공아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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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작품 20점을 선정해 세부적으로 감상하게 만든
책이다. 화가가 어떤 색들을 사용했는지, 붓질과 구도는 어떤지, 그림의 주제를 어떻게 잡았는지 등 설명이 전문적이고 구체적이다. 저자의 안목이 참신하고 유익하다. 번역은 절대 나쁘지 않으나 판형이 작아서 그림을 감상하기에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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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마거릿 렌클 지음, 최정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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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상실의 자연사,라는 부제가 책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저자는 가족도 자연의 일부임을, 정원의 동식물이 살고 죽는 풍경 속에서 슬프게 납득해나간다. 아름다운 글과 삽화를 번역서가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최상이 아니란 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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