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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최근 병을 앓고 막 회복된 오십 대의 여성이 있다. 그녀는 아름다운 6월의 어느 아침, 꽃을 사러 집을 나선다. 그날 저녁, 그녀의 집에서는 파티가 열릴 예정이다. 이 소설은 그녀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열기로 한 어떤 날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하고, 동시에 그녀의 청춘에서 노년까지의 세월이 또 하나의 시간적 흐름을 이룬다. 소설은 이 두 개의 시간이 엮이면서 전개되는데, 하나는 현실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 속의 시간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여러 관점에서 무수한 독법으로 읽힐 수 있는데, 무엇보다 형식이 매우 낯설다는 점에서 독특한 소설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나 전지적 작가 시점 같은 일반적 서술 방식을 크게 벗어나서, 주인공인 댈러웨이 부인을 한 축으로 많은 주변인들의 시점이 마치 수건돌리기처럼 이어지고 이어지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람들의 마음속을 자유롭게 들락거리는 이 이상한 방식은 하나의 인상, 하나의 풍경이 내게 있어서만 그렇게 보이며 동일한 것을 놓고도 우리는 그것을 모두 다르게 해석한다는 진리를 새삼 환기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방식으로 말해지는 것, 그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소설을 다른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소설은 중요한 두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하나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며, 이것들은 삶이라는 대주제로 귀결된다.
● 우선 시간에 대해서.
소설의 전개는 마치 모든 물줄기가 모여들어 하나의 큰 강물을 이루는 것과 비슷하다. 인물들은 작은 물줄기가 되어 이야기를 만들고 이들의 이야기는 점점 몸집을 불려서 유장하게 흐르는 하나의 큰 이야기를 이룬다. 부분이 전체로 합쳐지는 모양새인데, 이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닌 더 큰 무엇이다. 강이라고 부르는 것이 단순히 물의 집합체가 아니듯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모여서 이야기들이 아니라 '삶'이라고 불리는 더 궁극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만들어낸다.
혹은 이 소설을 꽃다발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한 송이 한 송이를 모아 커다란 꽃다발을 만들 듯 소설의 전개는 한 인물 한 인물이 모여서 크고 아름다운 꽃다발을 이루는 과정 같다.
꽃다발은 실제로 소설의 상징처럼 쓰이고 있는데, 소설 첫 문장은 '꽃은 자기가 사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p.7)'로 시작된다. 이 꽃다발은 그날 저녁에 있을 파티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의 중요한 두 친구는 그녀의 젊은 시절을 '흰 드레스를 입고 꽃다발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기억하며, 댈러웨이 부인의 남편은 부인에게 사랑의 징표로 꽃다발을 안기기도 한다.
그런데 강물은 흘러가서 붙잡을 수 없고, 꽃은 시든다. 삶은 불확실하며 무상하다. 강물이 흐르는 것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어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손을 담글 수 없다. 내 앞의 순간들은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다. 꽃을 시들게 하는 것도 시간이다. 유한한 삶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죽게 마련이고 사는 매 순간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계속 등장하는 시계탑의 종소리는 우리에게 '기억하라, 인간의 삶은 끝난다'를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장치일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젊음은 끝나며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댈러웨이 부인은 인식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파티를 준비한다. 병을 앓고 나서 본격적으로 노년에 접어든 여인에게 이러한 행위는 무의미해 보인다. 그런데 진짜 무의미할까? 바로 이 지점이 버지니아 울프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유한한 시간, 그 시간을 살아내는 인간의 유약함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은 모순될 수도 있을 두 생각을 '그래서'로 잇는 매우 독특한 마음의 소유자인데, 이를테면 '레이드 브래드쇼는 딱하게도 우둔한 여자야-미워할 수가 없어.(p.239)' 식이다. 이 사고방식은 삶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 같다. 삶은 유한하고 인간은 어리석고 연약한데 '그래서'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 그리고 두려움.
삶에 대한 사랑이 큰 만큼 사랑을 잃는 것은 더 큰 두려움이 된다. 댈러웨이 부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시간이 젊음의 아름다움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며 늙어가고 끝내는 죽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은 아닌 듯싶다. 그녀의 두려움은 삶의 어두운 뒷면까지 포괄하는 더 복잡하고 큰 성질의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녀의 두려움은 삶을 실패할 위험성에 대해서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자신의 두려움을 이렇게 인정한다:
'두려움이라는 것도 있다. 부모가 손에 쥐어 준 이 인생이라는 것을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 평온하게 지니고 가야 한다는 것에 덮쳐 오는 무력감.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도 끔찍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p.241)'
댈러웨이 부인은 삶을 사랑하는 인물이고, 파티를 열어 삶을 축제로 만들고 싶은 인물이다. 마치 흰 드레스를 입고 꽃다발을 품에 한가득 안아 들 듯이 그녀는 삶의 순간들을 사랑으로 조합하고 창조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저녁이 찾아오고 파티가 막 시작됐을 때, 눈치 없는 손님으로부터 한 청년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녀는 놀라고 두려워 빈방으로 숨는다. 그녀는 청년이 실패했음을 알았다. 죽었으니까. 실패와 죽음, 이 이중의 사실 앞에서 그녀는 두려움에 떤다.
죽은 청년은 전쟁의 트라우마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셉티머스라는 인물로, 의사가 자신을 부인으로부터 떼어내 요양원에 격리시키려고 집을 방문하자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다. 청년도 댈러웨이 부인처럼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산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p.195)' 하지만 요양원에 격리되어 사랑하는 부인과 떨어져야 하는 삶은 자신의 영혼이 손상되는 삶이었다. 청년은 삶을 지키고 싶었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고통의 어둠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 보지 않은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죽어야 하는 이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렇기에 '뛰어듬'이라는 행위는 이 소설에서 의미심장하다. 설사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은 매우 용감한 행위이다. 영혼과 삶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맨 앞머리에서 댈러웨이 부인은 아침에 꽃을 사러 집 밖으로 나가며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다(p.7)‘고 느낀다. 그녀는 찬란한 삶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실패와 늙음과 죽음을 함유하는 위태로운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한 청년이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오십 대의 한 여성이 아침의 대기 속으로 뛰어든다. 한 사람은 죽음의 복판으로, 또 한 사람은 6월의 빛나는 아침이 펼쳐지는 삶의 복판으로. 둘은 결국 같은 사람으로,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자 했고 삶을 지극히 사랑한 샴쌍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 사람은 삶을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을 향한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 안에는 이 두가지 얼굴이 다 들어있지 않을까.
● 시간과 두려움이 합쳐질 때
시간과 죽음 그리고 삶의 실패가 만나는 정점은 삶이 환희가 마법처럼 펼쳐지려고 하는 파타의 한복판에 위치한다. 댈러웨이 부인이 청년 셉티머스의 죽음을 전해 듣는 바로 그 순간이 그녀의 두려움이 최고조에 이를 때이다. 황망히 작은 방으로 숨어 들어간 그녀는 자신의 두려움을 꺼내보며 남편이 곁에 있기에 자신이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청년과 자신의 차이점이라면 청년은 그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뿐. 그런데 이런 두려움 속에서도 그녀는 병에서 회복된 지금이 무척 행복하다고 느낀다:
'이상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행복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좀 더 천천히 지나갔으면, 좀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싶었다.(p.241)’
병이란 작은 죽음과도 같아서 그녀가 죽음을 통과했기 때문일까? 죽음에서 살아나온다는 것은 일종의 부활이고 재생일 것이다. 그녀는 젊었을 때부터 하늘을 바라보는 일을 즐겼다. ’하늘에는 그녀 자신의 일부가 들어 있는 듯했다.(p.242)’ 지금도 그녀는 어둡고 작은 빈방에서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본다. 그런데 맞은편 집에서 노부인이 그녀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노부인은 평소에도 그녀가 존경심을 느끼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창밖 맞은편 집에 사는 노부인이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기도 했고, 침실에서 커튼을 열고 방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 광경에는 어딘가 엄숙한 데가 있었다... 영혼의 비밀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그녀를 울고 싶게 만드는 광경이었다.(p.167)'
삶이란 죽음을 곁에 두고 담담히 그 순간을 사는 것인가, 찰나에 명멸하는 빛의 눈부심 같은 것인가. 영혼은 그러한 삶을 위해 존재하고 그런 삶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응접실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웃고 소리치고 하는데, 이렇게 조용히 저 노부인이 잠자리에 드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각별한 느낌을 주었다. 이제 블라인드를 내렸다. 시계가 종을 치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자살을 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계가 시간을 알린다. 한 점, 두 점, 석 점. 그녀는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여전히 계속되는 것이다. 저기! 노부인이 불을 껐다! 온 집이 어두워졌다. 이 모든 것이 여전히 계속되는 가운데, 하고 그녀는 되뇌었다. 그러나 그 말이 떠올랐다. 태양의 열기를 더는 두려워 말라. 손님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얼마나 특별한 밤인가! (Pp.242-243)‘
죽음이 있는 곳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청년이 죽었지만 파티는 이어진다. 태양의 열기가 뜨겁다해도 두려워 말고 뛰쳐나가는 것이다. 죽음은 마치 노부인의 잠자리처럼 평화로운 것인지 모른다. 댈러웨이 부인이 죽은 청년이 불쌍하지 않다고 느낀 까닭은 그래서일까? 그녀는 그 일이 오히려 기쁘기까지 했다:
’그녀는 왠지 그와 – 자살을 한 청년과 – 아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이,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린 것이 기뻤다. 시계가 종을 쳤다. 납처럼 둔중한 원이 공중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가봐야 했다. 손님들과 어울려야 했다. 샐리와 피터를 찾아야 했다.(p.243)'
청년이 내던져 버린 모든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삶인데, 이 삶은 뜨겁게 달아오른 태양이 내뿜는 열기이고 사납게 휘몰아치는 겨울의 횡포이기도 하다. 댈러웨이 부인은 청년의 마음을 알았고, 그래서 청년이 모든 걸 내던져 버린 게 기뻤다. 태양과 겨울로부터 자유로워졌으므로.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지켜냈으므로:
더는 두려워 말라, 태양의 열기를.
사나운 겨울의 횡포를.
셰익스피어의 <심벌레인>에 나오는 이 구절을 댈러웨이 부인은 거듭 떠올린다. 버지니아 울프는 태양의 열기와 겨울의 횡포 속에서 그 두려움과 싸우며 순간을 살아내는 것, 계단을 오르고 싶으면 오르고 내려가고 싶으면 내려가는 노부인처럼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 찬란한 6월의 아침 대기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 하늘을 바라보는 것, 종교도 사랑도 주장하지 않고 그저 삶 그 자체와 나의 존재를 맞대고 부비는 것. 동전의 뒷면인 죽음과 하나가 되어 동전의 앞면으로서 존재하는 것, 이것이 삶이고, 삶은 그 자체로 기쁨이고 환희이며 마법이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을 지키는 것이라고.
고통스러운 정신병을 앓고 끝내는 주머니에 돌멩이를 채워넣고 강물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다는 드라마 같은 인생 때문에 버지니아 울프가 나약한 비관주의자였을 거라는 오해를 했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지적이고 통찰적인 이 소설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는 두려워했지만 명료한 의식으로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자 했고, 남편이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멈추고자 했기에 죽음으로 뛰어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었고, 용감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삶을 사랑한만큼 죽음도 기꺼이 껴안을 수 있었을 거라고 느낀다. 댈러웨이 부인이 구사하는 ‘그래서’가 여기에 가장 극적으로 구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삶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는 죽기를 선택했다고.
댈러웨이 부인은 결혼 전에 클라리사라고 불렸다. 물론 결혼 후에도 그녀는 계속 클라리사였지만 친구의 눈에 ‘속물’로 비치는 세속적 여인인 댈러웨이 부인이 순수한 영혼의 클라리사를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 현세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댈러웨이 부인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댈러웨이 부인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클라리사가 죽으면 안 됐다. 두 존재로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세상이 우리를 돕지 않는다면 혼자 힘으로는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피터는) 그녀가 늙었다고 생각할까? 그가 그렇게 입 밖에 내어 말할까?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이쪽에서 눈치 채게 될까? 그가 돌아와 보니 그녀가 늙어 있더라고? 사실 그랬다. 앓고 난 후로 그녀는 머리가 거의 새하얗게 세었다.
브로치를 탁자 위에 놓다가, 그녀는 갑작스런 경련을 느꼈다. 잠시 그런 의문들을 떠올리는 사이를 틈타, 얼음처럼 차디찬 새발톱이 가슴속을 파고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직 그렇게 늙은 것은 아니다. 이제 겨우 쉰두 번째 해로 접어들었을 뿐인데. 아직도 여러 달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월, 칠월, 팔월! 한 달 한 달이 여전히 옹글게 남아 있었다. 마치 그 떨어지는 방울을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클라리사는 (화장대 쪽으로 다가가며) 바로 그 순간의 핵심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거기에 고장시켰다 – 이 유월 아침의 순간을, 다른 모든 아침들의 무게가 실려 있는 이 아침의 한순간을 고정시키듯, 그녀는 거울과 화장대와 늘어선 병들을 새삼스럽게 둘러보면서, 자신의 전부를 한 점에 모아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서), 섬세한 분홍빛 얼굴을 마주 보았다. 오늘 저녁 파티를 열려는 여인, 클라리사 댈러웨이, 그녀 자신의 얼굴이었다.
얼마나 수없이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던가! 그럴 때마다 얼굴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긴장되곤 했다. 거울을 보면서 그녀는 입술을 꼭 오므렸다. 그러자 얼굴에 구심점이 살아났다. 예리하고, 화살 같고, 분명한, 그것이 그녀 자신이었다.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어떤 부름, 어떤 노력이 부분들을 – 그것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인지는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_ 한데 끌어 모을 때의 그녀 자신이었다. 그렇게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의 중심, 하나의 다이아몬드, 응접실에 앉아 사교의 중심이 되는 한 여인의 얼굴을 내보이는 것이다. 따분한 생활에 분명 생기를 돌게 하고, 외로운 이들에게는 아마도 피난처가 될 수도 있을 터이다.(Pp,5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