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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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단은 완결된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 바람구멍을 내어준다. 늘 보아온 풍경을 달리 보게 하고, 신선한 측면을 보게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의 혹은 상식으로 여겨져 온 것을 뒤집는 위협도 숨기고 있다 - p.22  
   

대체 달에는 뭐가 사는 겨?

허연 머리 곱게 쪽진 우리 할매는 유난히도 나를 예뻐하셨다. 나의 유년시절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우리 할매의 무릎위에서 보냈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다. 할매는 여름밤이면 모깃불 피워놓은 들마루에 나를 뉘이고 한손으로는 연신 부채질하며, 한손으로는 내 배를 쓰다듬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주셨더랬다. 훤한 보름달이 뜬 날에는 꼭 달에 산다는 옥토끼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때마다, 아가 저 보거라, 방아 찧고 있는 토끼의 모습이 보이지 않니? 하시곤 했었다. 아무리 봐도 토끼 모양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할매가 그렇다니 그런 줄 알았다.

우리 엄마의 무한한 교육열과 사랑의 몽둥이찜질로 학교 전 어설프게나마 한글을 깨친 나는 아버지 빵구난 런닝구 같이 오래된 전래동화집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을 읽다 문득 혼란에 휩싸였다. 달에는 옥토끼가 산다는 할매 말씀을 콩떡같이 듣고 찰떡같이 믿고 있었는데 책에서 보니 어느 이야기에서는 달에서는 두꺼비가 산다고 하고, 어느 이야기에서는 달에서 아름다운 아가씨가 산다고 나와 있었던 것이다. 책이 잘못 됐을 리 없고 우리 할매가 거짓말을 할리도 없는데 그럼 대체 달에는 뭐가 사는 걸까? 이 의혹은 내가 학교에 들어가 지구와 달의 공전과 자전의 개념을 배우게 됨으로써 풀리게 된다. 달에는 할매 말대로 옥토끼가 산다. 다만 내가 사는 곳에선 보이지 않는 달 반대편에는 두꺼비를 키우는 아름다운 처녀가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바깥에 서서 이단을 외치다!

한번 습득한 ‘상식’이라 불리는 단편적인 지식들을 전복시킨다는 것은 사실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사람의 뇌는 꽤 유연하지만 습득과 납득이 반복되어 굳어진 생각에 대해서는 꽤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극이 주어지지 않고 반복적으로 학습된 기억에 대해서는 그것이 ‘진실’인양, ‘진리’인양 착각하고 단단한 의식의 갑옷을 둘러준다. 후에 그것에 반하는 사실을 마주치게 되면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은 익숙하게 학습된 사실로 포커스가 맞춰지고 새롭게 받아들이는 사실에 대해서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아를 찾겠다는 사람들이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집을 떠나는 일이듯이, 사실 납득하지 못할 진실,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시야를 넓혀야 한다. 내가 집에서 다 떨어진 동화책을 붙들고 고민하다가 학교에 가서 빳빳한 교과서를 통해 어린 날의 의혹을 해맑은 상상력으로 해소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안에서 나와 바깥에 설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편견이 걸러진 날몸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요네하라 마리는 그런 의미로 진정 바깥에 서 본 사람이다. 역자가 말미에 소개한 것처럼 요네하라 마리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고, 요네하라 마리 자신도 공산주의가 쇠퇴하던 1960년대 동유럽 체코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영어가 주류가 되는 시절 러시아어를 공부했고, 결혼과 출산이 당연시 되는 때를 독신으로 살아냈다. 다수결로 주류와 비주류를 나눈다고 한다면 요네하라 마리의 삶은 주류 보다는 비주류에 걸쳐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그녀의 직업은 동시통역가다. 그야말로 중심과 또 다른 중심이 부딪치는 경계에 서는 사람이다. 다른 상식, 발상법, 견해가 서로 충돌, 보완, 조화하려고 부글부글 끓고 있는 전쟁터 혹은 희극무대와 같은 그곳(p.263)에서 그녀는 어쩌면 중심에서 살짝 비껴난 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책을 써 낼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야 말로 상식과 상식이 충돌하는 최전방 같은 곳에서 그녀만은 무른 머리를 가지고 ‘절대’가 아닌 ‘상대’를 생각할 수 있었다.  특유의 익살로 그 ‘상대’를 풀어놓은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검은 점이 빽빽한 화면에 한 칸 비워진 듯 찍힌 하얀 점처럼, 다른 문화 속에 이단인양 떨어진 누군가의 일화는 대게가 동시통역가로서 활동한 그녀와 지인들의 실제 경험담이다. 이 이야기들은 유머러스하고 재기발랄한 문체로 책속에서 춤을 추고 있지만 사실은 상당히 냉소적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녀의 시선은 꽤 중립적이라는 것이 흥미로웠다.

러일전쟁의 잔재로 우리나라와 일본 만큼이나 관계가 껄끄러운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통역을 했던 일을 떠올리며 적어 내려간 그녀의 문체가 퍽 객관적이어서 조금 놀랬었다. 조선인 김 씨와 전후 분단국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깨달은 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그녀의 흥미로운 시각은 동시통역사로 활동하면서 겪은 일화뿐만 아니라 각국의 이해관계 충돌로 인한 분쟁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드러나는데, 이런 그녀의 쿨함이 신선함을 너머 충격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이 책을 덮고 나서 더욱 충격이었다.

앞서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바 있다. 하지만 이 ‘상식’이라는 범주에 민족의식 같은 것도 포함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해본 것이다. 자국과 타국의 이해관계나 과거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아무래도 자국을 옹호하게 되는 그런 것이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서양에서 개고기 식용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의 편견 또는 아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한편으로 통렬히 일침을 가했던 좁은 시야, 오만한 강요, 무지하고 자만에 가득 찬 독선, 다른 문화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결여된 상상력(p.145), 그런 골치 아픈 것들을 가진 사람들이 주류가 되는 것이 그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나름 뜨끔했던 것이다. 국수주의니 사대주의니 하는 것은 극단적인 일례들로 설명되는 것이지만 실상 그리 극단적인 일례가 아니더라도, 나는, 어떻게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섬뜩하기 까지 했던 것이다. 인간으로 인한 모든 비극과 참사는 대게 이런 의식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문화가 교차하는 순간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이문화가 교차하는 순간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저자가 존경해 마지않는 미하일 바흐친 선생이 남긴 말이 뇌리에 강하게 남는다.

‘이단’과의 만남이야 말로 애매했던 낱말의 의미를 명확히 해준다. 상대 혹은 우리 자신의 뜻과 처지도 자각하게 해준다. 또한 우리 자신을 보다 풍요롭게 해준다.(p.271) 그녀의 말처럼 ‘이단’은 낯설기만 하거나 배척하고 거부할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멀어져 당사자도 상대방도 아닌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시도(p.180)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럼으로써 발생하는 의미를, 감동을, 유머를 그녀는 알았는데 우리는 다만 긴장한 체 외면하고만 있지 않았나,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아쉬움을 느꼈다.

저자가 받아든 『악마와 마녀의 사전』에는 13이 악마와 마녀의 세계에서 한 다스에 해당한다고 적혀 있었다. 저자는 이것에 꽤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저자 자신은 정작 13이 마녀의 한 다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저자의 유연한 사고에서 10개 혹은 12개 혹은 13개 모두가 한 다스 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저자의 생각을과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아주 유쾌한 문화인류학 서적 혹은 동시통역가의 에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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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사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폭력사회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볼프강 조프스키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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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폭력은 도처에 널려 있다. 하루에도 수백번, 수천번씩 사람들은 서로에게 날을 세우며 으르렁 거린다. 인내심이 부족한 누군가가 자제하지 못하고 먼저 주먹을 내지르면 순식간에 피해자로 전락한 이는 이렇게 소리칠 것이다. 무식한 놈. 법대로 하자! 폭력은 이제까지 인간이 쌓아올린 문화와 문명에 역행하는 원시적인 행동이며, 평화를 꿈꾸며 만든 ‘사회’라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정해놓은 규칙에 반하는 행태라는 의식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의 문화는, 우리의 사회는 폭력을 배척하고 있을까? 우리의 자랑스러운 업적이 과연 우리를 폭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는가?

독일의 사회학자 볼프강 조프스키는 이에 대해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원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물질적 발전을 도모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오히려 인간들의 이러한 노력은 산발적이고 개별화됐던 폭력을 집권적이고 체계적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사회는 개개인이 가진 폭력의 경험과 그 공포로 말미암아 탄생하였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으로 유지되었다. 사회가 생겨나고 유지되는 것은 고상한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나 공공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개인이 경험한 폭력으로 기억되는 신체적인 고통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 언제 상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모든것을 완성시켰다. 더 나아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은 개인독점화 되었고, 지배는 폭력에 제한을 가하는 동시에 폭력을 증폭시켰다. 사회를 유지한다는 명분에서 발생한 질서는 폭력을 체계화 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러한 사회는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정리와 정복, 동화, 병합, 비자유를 추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이 책에서 몇가지 주제를 가 폭력을 고찰한다. 이 책에서 서술되는 폭력의 모습들은 상당히 적나라 하고 노골적이다. 무기의 발달, 폭력의 잔인한 기록, 희생자의 불안과 고통, 고문, 폭력에 가담하는 익명의 구경꾼, 사형, 전투, 사냥, 학살, 파괴 등의 주제로 서술되는 각 장들은 첫 번째 질서와 폭력을 다룬 장과는 다르게 주장 보다는 묘사와 서술이 주가 되며 폭력의 잔인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폭력의 역사 같기도 하면서 인간의 폭력적인 기질을 폭로하는 장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리고 문화와 폭력을 논하는 장에 이르러서는 개인적인 폭력을 넘어 사회와 문화에 내재된 폭력에 대해 이야기 한다. 

첫장부터 마지막장 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꿰뚫어 진다기 보다는 각 장이 분리 되는 느낌이다. 명확한 정리가 되진 않지만 폭력의 모습과 인간의 기질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만이 강하게 남는다. 다만 이전까지 생각 못했던 사회나 질서, 문화 등과 폭력을 깊이 있게 연관시킨 주장은 상당히 인상깊다.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사회와 폭력간의 긴밀한 관계와 그로 인한 폭력의 변화양상은 오늘날의 현대사에 빗대어 봐도 반박할 만한 논리를 찾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니까. 

이 책을 두고 어떤 정리를 해야 하는지 솔직히 고민이다. 인간이 폭력을 지향할 수 밖에 없고,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래서 의식하고 싶지 않았지만 실은 지금 내가 폭력사회를 살고 있는 거라면. 다만 암담할 뿐이라는 건가? 저자는 직접적으로 내뱉기 보다는 독자의 판단을 이끌어 내려는 것 같은데 글쎄.. 솔직히 모르겠다. 저자의 주장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는 것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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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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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을 두고 그것이 성공이었네, 실패였네 라고 따지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지만, 그래도 문득 궁금했다. 딱 평균치의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대단한 성공도 없이, 밑바닥 까지 떨어지는 실패도 없이 그저 평탄하게 딱 평균치의 삶을 살다 가는 사람들 말이다. 어떤 잣대를 들이대야 근접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예측컨대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대단한 성공이든 무참한 실패든 간에 한 사람의 생에 그런 일이 닥친다면 그것은 똑같이 재앙일 거라고 누구 씨가 말했다. 야망이 없는 나는 부디 내 생에 재앙이 드리우지 않기를 기도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재앙이란 것은 본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던가? 우리네의 삶에 대고 본다면 운명이랄까, 팔자랄까 뭐 그런 게 되겠다. 어느 날 문득 재앙이 휩쓸고 간 내 삶의 자취를 되돌아보게 되는 날이 온다면(부디 그럴 일이 없길 바라지만), 그 비참한 현장에서 피하기 위해 어디로 도망해야 할까?

인생의 패배자. 우리는 집으로 갑니다. 

답은 집이다. 집이 어디냐고 하면, 엄마가 있는 곳이다. 초대형 쓰나미에 울트라 메가톤급 허리케인까지 휩쓸고 지나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 마흔여덟 살, 관객을 우롱하고 제작자의 뒤통수를 친 배신자 오인모는 엄마에게 간다. 인생이 쭉 사하라 사막보다 더한 불모지라서 아무것도 일구지 못하고 오물만 뒤집어 쓴 채 뻔뻔하게 엄마에게 얹혀사는 깡패, 형 오한모가 있는 곳으로. 거기에 두 형제에 비교해도 덜하지만은 않은 험한 인생을 살아온 동생 미연과 싸가지 없는 조카 민경까지 엄마의 집으로 들어오면서 평균나이 49세의 찌질이들이 가족으로 다시 뭉친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참. 이보다 더한 뜨악! 한 가족은 일찍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없지 싶다. 

재앙이라고 했었다. 이 가족의 경우는 ‘실패’의 재앙이다. 아직까지는 딱 평균치의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아침 드라마보다도 독한 재앙 속에 있는 이 가족이 정말로 ‘뜨악’스러웠다. 읽는 내내 낡은 가죽쇼파에 앉아 시간을 죽이는 노인네들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저 302호네 아들이 말이야’하면서 입으로는 웃고 눈으로는 흘기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가족관계부터가 복잡한 이놈의 콩가루 집안이, 하나같이 ‘뜨악’ 한 인물들이 모여 과연 공생(?)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그물은 생각보다 촘촘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촘촘했다.

결국은 또 가족 이야기. 그런데 참 독특한 가족 이야기.

‘가족’을 다룬 소설책들이 요즘 들어 눈에 띄는 기분이다. 나는 많이 읽히는 소문난 작품을 주로 보는 편이니 ‘가족’이라는 소재로 재미를 본 작가들이 꽤 있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겠다. 하기사, 가족 이야기만큼 적절한 감동과 재미가 보장된 소재가 또 있을까? 많은 사람의 공감과 지지를 얻어 내기 용이한 소재이고, 공감과 지지를 받는 글에는 힘이 실리는 법이니 이야기에서 ‘가족’이라는 테마는 참 흥미로운 소재일 것이다.

결국은 또 가족이야기다. 제목에서도 이미 대놓고 가족 이야기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식상한 기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가족 구성원 누군가의 부재와 그로 인해 재발견되는 가족의 참모습. 뭐 이런 레퍼토리는 흔하디흔하고 이전에 누군가가 써먹은 것이나 여기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올까? 했더니 나왔다. 근데, 묘하게 식상하지가 않다. 작가의 비범한 필력 때문인가? 힘 있는 스토리의 힘인가? 뭐 둘 다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다른 가족 이야기와는 다른 과감한(이라고 쓰고 ‘막장’이라고 읽는다) 설정 때문이리라.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스토리가 큰 힘을 내는 이 소설을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스포일러 같지만, 살짝 맛보기만 뵈자면 말이다. 이 가족이 관계도 그리기가 애매할 정도로 복잡하다는 거다. 이런 설정이 뭐 종종 문학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간에 등장을 하긴 했었지만 이렇게도 대놓고 쏟아내지는 않는데 말이다. 참 완급조절이란게 어느 분야에서든 중요한 건데, 이 책에는 그게 없다. 그래서 그런지 막장이 막장 같지가 않고, 흉악한 게 흉악하지가 않다. 도처에서 웃음이 비져나올 뿐이니 신기하기까지 하다.

엄마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이 가족은, 사실상 엄마를 제외하면 서로 반쪽이 가족이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제는 남이네요, 안녕~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관계다. 하지만 참 끈끈하다. 부끄럽고 유치하고 한심하게 굴어도, 경멸하는 것처럼 말하고 흘겨봐도 의지한다. 사랑하고 기대고 때로는 어려워하고, 때로는 의리를 지킨다. 왜, ‘내놓은 자식’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어지간하면 내놓았겠느냐마는, 이 가족은 내놓을 만한데도 한사코 끌어안는다. 그런 모습이 문장 속에 너무나도 교묘하게 녹아있어, 시종일관 웃길 것만 같은데 때로 기습이라도 하듯 가슴에 감동을 꽂아 넣는다.

이런 가족이야기. 일전에 있었던 듯 하지만 없었고, 생소한 듯 하지만 친숙하다. 그래서 웃음이 나고 코끝이 찡해진다. 이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왜 그리도 절절하게 ‘가족이구나!’하고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작가의 교묘한 계산일지도, 혹은 순수한 이야기의 힘일지도.

고령화 가족, 진짜 가족을 말하다.

가족은 단순히 의식주를 함께 하는 ‘닮은 사람’이 아니다. 이 세상 마지막까지 응원해 줄 든든한 지원군이며, 상식이나 규칙을 벗어나는 일이라도 ‘가족의 정’이란 것으로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는 이들이다. 걸진 욕 한마디에 사랑한다. 백 마디를 담을 수 있는 유일한 타인이며, 격한 매초리에 눈물 백방울을 실을 수 있는 사람이다. 세상에 좌초되어 실패하더라도 ‘너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어. 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은 찌질한 인생이었어도 반전을 꿈꾸게 하는 박카스 같은 존재다. 사람은 가족에게 힘을 얻고, 세상으로 나간다. 실패하더라도 가족이 있어 그들은 다시 도전할 것이다. 가족이 있는 한 실패자는 없다. 실패의 재앙도 없을 지어다.

웃음과 감동과 막장과 약간의 뻔뻔한 음담패설이 범벅된 한권의 책에서 가족은 ‘가족’이 된다. 평범하게 살지 못해 도태된 이들에게도 편은 있다. 모두가 그들의 실패를 손가락질해도 등을 돌려도 그들에게는 ‘가족’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에게 돌아가 다시 힘을 얻고 반전의 기회를 엿본다. 놓지 못해 끌어안은 이 가족이, 위대하지만 자기 인생을 알차게 살아낸 억척 엄마에게 안겨 그런 ‘가족’이 되었다. 드라마틱하게, 혹은 그네들답게 재기에 성공한 그들에게 다시 재앙은 없을 지어다. 가족은, 특히 그들의 가족은 위대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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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 무서운 그림 1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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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명화를 소재로 한 책 중에 정말 보기 드물게 재미있는 책이다. 나는 그림에는 문외한입네하며 그림 앞에서 유독 작아지던 사람이라도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자칫 딱딱하고 어렵게만 보일 수 있는 명화를 가지고 이렇게 재미난 책 한권을 써 낸 작가에게 박수라도 보내고 싶다.
 
 다비드가 스케치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직막 모습에 공포를 느낀 작가는 자신의 그러한 경험에서 아이템을 얻어 이 책을 써 냈다고 한다. 16세기부터 20세기에 명화 20점을 소재로 묶어낸 책으로, 과연 제목에서 예고한 대로 20점의 그림들이 '무서운' 그림인지, 무섭다기 보다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그림인지는 보는 사람의 판단에 맡겨야 겠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무서운' 그림들은 그 종류도 참 다양하다. 보이는 자체가 끔찍하기에 시각적으로 무섭게 느껴지는 그림들도 있고,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작가의 무서운 의도가 여기저기 장치되어 있는 그림들도 있고, 보기에는 너무 아름답지만 그 숨겨진 뒷 이야기가 정말 소름끼치는 그림들도 있고, 그림의 테마가 되는 이야기가 잔혹하기에 무섭게 느껴지는 그림들도 있다. 저자는 이런 사연많은 그림들을 잘도 찾아내어 알차게도 묶어놨다.   책 내용은 대게가 그림을 제시하고 거기서 보여지는 표면적인 사실들이나 뒷이야기들, 특히나 그림을 그린 작가들의 개인적인 얘기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그러한 접근이 상당히 흥미롭고 부담이 없다.
 
  대게의 미술 관련 서적이나 명화를 소재로 쓰여진 책들은 미술사적 접근이나 미학적 접근에 치우친 나머지 읽는 사람의 인내심 테스트를 넘어서 독자를 무시하는 수준의 책들도 많은데, 그 책들에 비교하여 이 책은 얼마나 친절하고 다정한가? 누구나 그림에 소양을 갖추고 있는것이 아닌이상 무슨 양식, 무슨 파의 그림입네, 빛이 어디로 떨어지네, 구도가 어쩌네, 붓터치가 어쩌고, 색상구성이 어쩌고 하는 눈이 핑핑 도는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사람들이 그림을 소재로 한 책들을 막연하게 어렵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나또한 화려한 도판이 좋아 그림책들을 보는 것을 즐기지만 그런 머리아픈 얘기나 늘어놓는 책은 정말 손도 대기 싫다. 허나 이 책, 젠체하지 않는 데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도 잔뜩,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림을 양식적으로 대하지 않고 그 작가부터 알려준다. 게다가 도판!! 책에 실린 도판들도 아주 훌륭하다. 일본에서 출판된 책보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되는 이책에 더 많은 도판이 실려 있다고 한다. 본문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다른 그림들의 도판까지 알뜰히 싣고 있으니 이거야 말로 친절한 그림책씨다.
 
  이 친절한 그림책에 단점을 하나 꼬집어 보자면 이런거다. 제목은 '무서운 그림'일진데 '무섭기 보다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그림'이라는 점이다. 책에 실린 그림들은 저마다 충격적인 뒷이야기와 다소 자극적이기도 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허나, 무섭지는 않다. 간혹 정말 무서운 그림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소개된 그림들 중 고야나 보티첼리, 베이컨, 제리코의 그림은 정말 무섭다고 느꼈다. 허나 나머지 그림들은 '무섭다'기 보다는 '재미있다'. 안타깝게도.. 저자는 때로는 좀 억지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소개된 그림이 무섭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하는 점이 단점이라면 단점이겠다. 호가스의 [그레이엄 집안의 아이들]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림에 숨겨진 상징들이 뭐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호가스가의 비극과 너무 짜맞추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뭐 개인적인 생각이다. 허나, 무서운 그림이 재밌는 그림이면 또 어떠랴, 그래도 이 책이 엄청 재미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결론적으로, 젠체하지 않는 그림책, 도판 좋고, 번역 나쁘지 않고, 내용 알차고 재미있고, 그러면서도 교양서적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고, 더불어 그림에 대한 흥미 유발에도 일조하고 있는 그런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읽었던 비문학 도서중 가장 마음에 든다. 최고다! 난 서양그림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럼 이 책을 읽어라. 그림에 문외한인가? 이 책을 읽어라! 내가 그림을 좀 알지.. 그래도 이 책을 읽어라!! 재미와 교양을 두루 갖춘 정말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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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검이 말해주는 죽음 - 법의학자의 죽음에 관한 고찰 Moon's Forensic Thanatology 1
문국진 지음 / 오픈하우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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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이다. 한편의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라고 까지 하면 과장이지만 반전이 있는 소설만큼 때로는 충격적이고 때로는 신선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인상적이었던 것은, 철학적이면서도 이지적인 작가의 필치였다. 저명한 법의학자인 작가는 매우 박식하면서도 대단한 달필이라, 한줄 한줄 부드럽게 읽히면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저자의 말처럼, 성과 죽음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도덕과 금기의 주요대상이었다. 사회를 구성하고 공동체의 삶을 지탱하는 이 두가지 성분을 규제하는 것이야말로 공동체 유지의 사활이 걸린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고로 이것들은 묶어두고 감시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가지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없었으며 그러한 시도조차 보편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속된 것, 말해서는 안되는 것 이라는 전통적인 금기가 의식 깊은 곳에 뿌리박힌 것이다.

특히, 죽음에 관한 문제는 더욱 그렇다. 죽음 이라는 것은 실상 우리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며 매 순간 우리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하고 장기사(심박정지, 호흡정지로 의학에서 정의하는 인간의 사망. 심폐기능설에 입각한 죽음의 정의는 오래 전부터 지배적인 설이었으며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에 의한 죽음만을 인간의 죽음으로 인식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지식이 얕은 탓에 죽음을 과히 두려워 하기도 하고 또는 경시하기도 하며 고단한 현실의 도피처로 여기기까지 한다.

죽음은 어느 생명체에게나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순간이다. 생물에게 주어진 오직 유일한 평등을 사람들은 막연히 두려워 하고 혐오하기 까지 한다. 이것은 분명 잘 모르기 때문이다. 소위 존엄사로 명명되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 - 저자는 책에서 안락사와 존엄사를 구분하고 있다. 안락사는 의사가 환자의 임종에 개입하는 것, 존엄사는 환자가 존엄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환자측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구분된다. 고로 환자측의 요구로 인한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은 존엄사이다.)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장생하고자 하는 의지는 오랜 역사 속에서 의학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고, 생물로써의 인간이 가진 강한 욕구이자 본능일 것이다. 그것을 어그러뜨리고 고통스러우나마 남은 생명을 의도적으로 중지시키는 행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명백한 살인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혐오로 인간이 마지막까지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의지를 꺽는 것 또한 옳은 일은 아니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안락사(안락사가 큰 개념이고 그 안에 존엄사가 포함된다.)에 대한 정의나 유형등은 꽤 세부적이며 다양했다. 존엄사(혹은 안락사)에 대한 의견과 논리는 분분하지만 정작 그것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책은 적어도 그것에 대해 (조금 미묘한 부분도 있지만)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나로서는 모르던 것이었고, 그것이 존엄사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는 되었다.

이 책은 존엄사와 안락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다루고 있을뿐더러 죽음 전반에 대한 폭넓은 접근을 시도한다. 총 5장에 걸쳐서 죽음의 본질과 고대의 죽음에 대한 인식, 예술작품에 나타난 죽음의 상징으로 알아본 죽음에 대한 의식변화, 죽음에 대한 의학적 접근으로 바라본 죽음의 정의나 판정, 존엄사나 안락사 같은 문제에 대한 이야기, 법의학적 지식들이 풍부하게 곁들여진 사후현상 소개와 임사체험 이야기, 시체 방부보존이나 인체 냉동보존술 같은 죽음 이후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개인적으로는 궁금하지만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죽음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도 장기사, 세포사, 뇌사 등 다양한 설이 있으며 보편적인 설이 있을 뿐 여전히 다양한 논의가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존엄사와 안락사에 대한 문제도 옳고 그르다는 입장인 일단 배제하고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룬 장을 읽으며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유익했다. 법의학적 지식들이 망라된 장과 시체 방부보존, 냉동보존술을 다룬 장은 흥미로웠으며, 고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 부분도 나름 충격적이었다. 특히 내세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언젠가 찾아올 죽음의 순간을 받아들이고 삶에 충실하고자 했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의식은 오늘날에 견주어도 참 진보적이어서 놀라웠다.

저자가 책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생명은 물이 흘려가는 것과 갔다. 뒤에서 오는 물이 앞서가는 물을 뒤따르는 것인지, 뒤의 것이 앞의 물을 미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물은 끊임없이 흐름을 만들어 낸다. 생명도 분명 하나의 흐름이며 과정이고 그 끝과 처음을 규정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생명의 시작과 끝을 두고 죽음을 그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마 남들도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흐름에서 시작과 끝이란 애매한 것이며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고 인간의 죽음은 그 커다란 흐름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죽음은 막연하지만은 아닌 것이 된다. 생물의 죽음은 막을 수 없고 인간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 하지만 말고 받아들이고 준비해야 한다. 잘 사는 것 만큼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250여 페이지가 너무 안타까운 책이다. 더 두툼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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