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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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비치지 않는 세상

『천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현대문학, 2007

상희야!
한국은 지금 4월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급히 찾아온 더위에 맥을 못추고 있단다. 그러나 아빠는 여기 여름보다 몇배는 뜨거운 常夏의 나라 싱가폴에 네가 있는 동안은 절대로 덥다고 투덜대지 않기로 했다. 
아빠는 지난주부터 할레드 호세이니라는 아빠와 동갑인 아프가니스탄 작가가 쓴「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기 시작했다. 제목처럼 찬란하면서도 어찌나 슬프던지 어제밤도 이 책을 마저 다 읽느라고 잠을 설쳤단다. 지난번 너한테 보내는 책에 엄마책도 몇권 넣어서 함께 보냈는데 혹시 못보았니? 히잡을 쓰고 부르카를 입은 아프간 여성이 카불 시내를 내려다보는 처연한 뒷모습을 배경으로 한 표지인데. 히잡은 이슬람 여성들이 얼굴이나 가슴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쓰는 가리개고 부르카는 몸 전체를 가리고 눈 부위만 망사로 되어 있는 여성 의상이란다. 참, 싱가폴에서도 이슬람계 사람들을 자주 볼테니 잘 알겠구나. 아빠는 이 책 대부분을 출퇴근하며 전철에서 읽었는데 내려야 할 곳에서 미처 못내리고 그냥 지나친적도 있었고, 가슴을 마구 후비는 슬픈 장면에서는 눈물을 참느라 혼난적도 많단다. 아주 오랜만에 눈과 마음을 홀딱 빼앗기며 읽은 책이다. 

딸아!
책 이야기를 더 하기전에 이 소설의 배경인 아프가니스탄 이라는 나라를 먼저 얘기 해야할 것 같구나.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은 지금은 전쟁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지만 17세기에는 천국에 이르는 길목이라고 불리워졌단다. 그래서 페르시아 시인 사이브에타브리지는 '카불'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지.
'황량한 산들로 둘러싸인 카불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카불의 모든 거리는 얼마나 마음을 사로잡는가/---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고 /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으리’ 
 
아프가니스탄은 왕정붕괴, 소련의 침공, 탈레반의 득세, 미국의 침공 등 혼돈의 오랜 역사 속을 거치면서 전쟁, 기아, 무정부, 핍박으로 한때는 난민이 8백만명에 달한적도 있고 현재도 2백만명이 넘는 난민들이 이웃국가인 파키스탄에 남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대표적인 분쟁지역 중의 하나란다. 특히 아프간 여성들은 숙명적으로 이중삼중의 고통과 절망속에서 나날을 보내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에 놓여 있지. ‘눈송이 하나하나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고통받고 있는 여자의 한숨’이라고 하는 소설 속 구절처럼 아프간은 여자들한테 오랫동안 아주 몹쓸 제도를 갖고 있었다. 특히 소설에도 나오는 1996년부터 5년간 계속된 탈레반 집권시절의 광기는 도를 지나칠 정도였단다. 살인 및 간통죄는 공개처형, 도둑질은 손목 자르기 등 엄격한 이슬람 율법이 적용되었고 정신을 좀먹는다는 이유로 TV, 음악, 영화가 금지 되었고 각종 기호품도 자취를 감췄다. 여성은 외출할때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를 착용해야 했고, 남자 친척 없이는 여행하는게 금지되고, 10세 이상 소녀들은 학교에도 조차 다니질 못했단다. 태양은 똑바로 바라보지 않을때 그것의 광채를 최대한 즐길수 있는 것처럼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아니 여자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싶구나. '우리 아프간 사람이 쳐부술수 없는 유일한 적이 있다면 그건 우리들 자신이란다’ 하는 소설속 구절이 대못처럼 의미심장하게 가슴에 와 박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 소설은 아프가니스탄의 이런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뒤에 남은 사람들, 그 중에서도 전쟁과 테러와 굶주림 속에서 가족을 잃고 한남자의 두 부인으로 살아야하는 기구한 운명을 맞은 두 여자-마리암과 라일라-의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을 담고 있단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가장 잊혀지지 않는 장면은 마리암의 아버지(잘릴)가 죽음을 앞두고 마리암에게 보낸 ‘사랑하는 마리암에게’으로 시작하는 속죄의 편지를 라일라가 읽는 장면이다. -"지금 내가 할수 있는 건 너에게 용서를 비는 것밖에 없구나. 사랑하는 마리암, 나를 용서해다오. 나를 용서해다오. 나를 용서해다오. 나를 용서해다오"라고.- 딸을 그리워하며 죽어가는 아비의 피눈물나는 고해가 있단다. 그리고 그 편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내딸아, 신이 너에게 길고 유복한 삶을 주시기를 기도하겠다. 신이 너에게 건강하고 아름다운 아이들을 많이 허락해주시기를 기도하겠다. 내가 너한테 주지 못했던 행복과 평화와 사랑을 네가 찾기를 바란다. 잘 있어라. 나는 사랑이 깊으신 신의 손길에 너를 맡긴다".- 그러나 마리암은 끝내 이 편지를 읽어보지 못하고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당하고 만다. 하지만 마리암은 라일라와 그녀들의 명민하고 사랑스런 딸 아지자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거 같구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잔인하고 무거운 부당한 시련을 지워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내내 하게 된다. 아빠가 이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인 이 편지를 몇 번인가를 되뇌이고 있었던 게 아마 새벽시간이었을 게다. 갑자기 네 목소리가 얼마나 듣고 싶던지 전화기를 몇 번인가 들었다가 결국 그냥 놓고 말았다. 새벽 3시는 열세살 소녀를 깨우기에는 너무 늦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더구나. 

상희야!
언젠가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다 「카불의 사진사-부르카 밑의 웃음소리」라는 사진전을 볼 기회가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 국제적인 보도사진전에서 여러차례 상을 수상한 정은진 이라는 젊은 여류 사진작가의 개인전이었지. 지금도 출산중에 죽는 아프간 여성이 연간 2만5천명에 이르고 아프간이 세계서 두 번째로 산모 사망률이 높다는것도 그 사진전을 보며 처음 알게 되었단다. 먹을것이 넘쳐나는 오늘날에도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이 전 세계에 3억명이 넘고 지구촌 어딘가에서는 작고 여린 생명들이 빈곤과 전쟁, 질병과 자연재해 등으로 1분마다 10명씩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너는 쉽게 믿을수 있겠니? 네가 공부하고 있는 싱가폴은 인종간ㆍ개인간ㆍ남녀간 차별없이 독자적인 문화를 상호존중하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움을 구가하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대표국가로 꼽히잖니?. 그런데 같은 아시아지역에 그처럼 불공평하고 학대받는 삶이 일반화된 세상이 있다는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겠지. 그러나 상희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맨 얼굴이란다. 그리고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세계의 많은 어린이와 여성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 봉사하며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단다. 예를들면 유엔난민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월드비전에서 긴급구호팀장으로 일하는 한비야 아줌마 같은 사람들이지. 그사람들은 돈이 넘쳐나서도, 특별히 많이 배워서도 아니란다. 다만 자신이 가진 작은 재능과 넘치는 열정을 앞세워 그런 삶을 선택한 거란다. 이 책의 저자인 할레드 호세이니 역시 아프간 사람들을 사랑하는 열정과 글쓰기라는 재능을 조국 아프간의 비참한 현실을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쓰고 있잖니.

얘야!
하느님이 사람에게 재능을 주실적에는 자신을 위해서만 쓰라고 한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당신이 세계 모든곳을 다 다니지 못하시니 그 재능을 주위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써달라고 빌려준 거라고 생각하렴. 지금 네가 낯선 나라에서 아빠랑 떨어져서 힘들게 공부를 하는것도 이담에 커서 네 재능과 실력을 세상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려므나. 이책을 읽고 아빠도 불현듯 그들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턱없이 작고 보잘것 없는 금액이지만 통장에서 일부분을 매달 그들에게 쓰여질수 있도록 해 놓았단다. 

사랑하는 상희야!
싱가폴로 떠날 때 아빠가 부탁했던 말 기억하지? - 첫째, 절대로 아프지 말것. 둘째, 네가 싱가폴에서 배워야 하는건 English가 아니고 Global이라는 것을. 단순히 영어만 배운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러나라 친구들의 좋은 습관과 행동을 많이 배우도록 해라. 습관은 나무껍질에 글자를 새긴 것과 같단다. 그 나무가 커감에 따라 글자도 커진단다. 아침에 일찍 못일어날것 같던 네가 거기서는 그렇게 이른 아침에 학교에 가는걸 보면 너도 알겠지? 이 책은 아빠 서재에 잘 보관하고 있을테니 네 생각과 사고가 한뼘쯤 더 커져서 한국에 돌아오는날 꺼내 읽도록 하려므나. 뜨거운 햇빛에 피부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혹여 더운 날씨에 찬 음식만 찾다가 배라도 아프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다음달 출장때는 싱가폴을 들러서 올까 생각중이다. 그때까지 공부 열심히 하고 잘 지내거라. 아빠는 늘 네 생각 뿐이다. 사랑한다. 딸아! -끝- (2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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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사마천 사기열전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50선 9
정연 지음, 진선규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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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에 길을 묻다

  
『만화 사기열전』(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 v9)
사마천 지음, 주니어김영사, 2008 

재작년 초, 딸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기념으로 서울대에서 선정한 ‘만화로 만나는 인문고전 50선’을 선물로 사주었다. (당시는 20권까지 발간되었다) 워낙 만화를 좋아하기에 아이도 무척 기뻐하는 눈치였다. 주문한 책이 도착한 날 딸아이와 나는 관심 끌리는 대로 한 권씩 집고 읽기 시작했다. (만화지만 분명 이 책은 보는 책이 아니고 읽는 책이다). 아이는 학교 수업시간에 자주 듣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먼저 집었고, 평소 동양고전에 관심이 있던 나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먼저 손이 갔다.

흔히 고전을 ‘누구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말한다. 동양고전을 말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책중의 하나인 《사기》도 그런면에서 예외는 아니다. 《사기》는 중국의 오제(五帝)부터 한무제까지 3천여 년의 시간을 포괄하는 웅대한 스케일을 담은 역사책이다. 사마천이 생식기를 절단당하는 궁형의 치욕을 겪으며 그 절망을 이겨내고 16년의 각고 끝에 집필한 책으로 유명하다. 특히 뛰어난 개인들의 전기를 다룬 70편으로 이루어진『사기열전』은 그중 돋보인다. 2천여년 전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인생의 의미, 처세의 태도, 인간관계 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어 오늘날에도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람이 한평생 만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인간군상이 다 녹아 있고, 인간사회의 영원한 주제인 ‘권력’과 ‘조직’에 관한 통찰에서도 다른 어떤 책보다 앞선다. 현대 경영학에서 전략과 조직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나타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방대한 분량에 압도당해 읽을 엄두가 쉽게 나지 않는게 문제다. 진작 사놓고도 아직도 다 못읽은 2권으로 이루어진 『사기열전』의 책 두께가 한권만도 무려 900여쪽에 이른다. 그러던 참에 200쪽이 겨우 넘는, 그것도 만화로 된 책을 만났으니 그야말로 단숨에 읽을 수 밖에.

이 책에는 《사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만화의 옷을 입고 흥미롭게 출연한다. 우선 이 책의 저자인 사마천과 《사기》의 배경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어서 백이와 숙제, 관중과 포숙, 오자서, 소진, 한신 등 중국 역사의 충신과 역적, 영웅과 호걸들이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그 외에도 한번쯤 들어 봤을 이름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모두 12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마다 독립된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어 굳이 순서를 지켜 읽지 않아도 된다. 어느 쪽을 펼쳐도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사기》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사유의 힘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야기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돋보이고 우뚝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사기열전』을 역사서 이전에 고품격 문학작품으로 읽었다는 이도 많을까. 모두 한번쯤은 들어봤던 이야기인데 다시 읽으니 새삼 흥미롭고 재미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2천년전 역사가 가지고 있는 현대적 힘이다. 『사기열전』의 생각들이 얼마나 강력하게 현재적인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각 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마천의 말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화두를 던지며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하늘은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고 말했지만 백이와 숙제 같은 착한 사람이 굶어 죽은 것을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과연 하늘의 뜻은 옳은가, 그른가.” (73쪽)

 
“한신이 도리를 배워 겸양의 태도로 자신의 공로를 뽐내지 않고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다면 후세에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147쪽)

“여자는 아름답건 못생겼건 간에 궁궐 안에 있기만 하면 질투를 받고 선비는 어질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조정에만 들어가면 의심을 받는다. 그렇듯 편작은 뛰어난 의술 때문에 화를 입었다. 노자는 ”아름답다고 좋은 그릇은 좋지 못한 조짐이 있는 그릇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편작을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173쪽)

《사기》를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으나 방대한 분량에 질려 감히 시도를 못했다면 이 책부터 권하면 좋을 듯 하다. 무엇보다 원전의 중후하고 깊이 있는 사유가 인문학적 결을 잃지 않으면서 만화와 어울려, 글은 그림을 북돋우고 그림은 글을 간지른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게 유익함과 재미가 곁들여진 선물로 적당하다. -끝- (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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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 3.0 -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새로운 시장의 도래
필립 코틀러 지음, 안진환 옮김 / 타임비즈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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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새로운 시장의 도래 

 

『마켓3.0』
필립 코틀러 지음, 안진환 옮김, 타임비즈, 2010

<뉴요커> 수석 칼럼니스트인 켄 올레타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은 대개 두 종류로 나뉜다. 몸을 뒤로 기대는(lean back)사람들이 있는 반면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lean forward) 사람들도 있다. 개인은 물론이고 기업 역시 급변하는 시대에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는 세찬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만다. 물결을 일으키는 자가 될 것인지 물결을 타는 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물결에 휩쓸리는 자가 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마켓 3.0』은 마케팅의 아버지라 불리는 필립 코틀러 교수가 새로운 시장의 판도와 그것을 돌파하는 기업과 개인을 위한 통찰을 제시한다. 경영학, 특히 마케팅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들에게 코틀러 교수는 경외의 대상이다. 그는 <파이낸셜타임즈>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구루 4위에 선정되기도 하였고, 그의 대표작인 『마케팅관리』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함께 <파이낸셜타임즈>가 선정한 역사상 최고의 책 50권에 포함될 정도다.

  마켓3.0은 우리에게 익숙한 규칙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저자는 마켓3.0 시대를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고 규정하며 화려했던 옛시절과 과감히 작별하라고 말한다.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마켓1.0 시대에 기업의 주된 관심사는 제품을 표준화하고 생산비용을 최소화함으로써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있었다. 그를 통해 더 많은 구매를 유도하고 이윤창출의 극대화를 추구했다. 정보화와 함께 열린 마켓2.0 시대는 ‘고객가치창출’로 대변된다. 고객의 수요를 파악하고 고객에게 보다 나은 가치를 제공하기 위한 다양한 마케팅이 등장했다. 고객의 이성(머리)과 감성(가슴)을 모두 감동시키기 위한 노력에 따라 경쟁우위가 갈렸다. 이제 3.0 시장은 감성을 충족시키는 마케팅을 넘어서, 영혼을 감동시키는 마케팅을 요구한다. 3.0 시장들을 리드하는 기업들은 단순히 고객 만족과 이익 실현을 넘어서 좀 더 큰 미션과 비전, 가치를 통해 세상에 기여하고자 한다. 소비자 역시 기업이 제공하는 가치에 대해 수용자 입장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를 투영할 대상을 직접 찾아나서는 능동적인 참여자로 변화했다. 그러다보니 고객 중심의 마케팅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고객과 함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전의 마켓2.0과는 다른 고객가치 창출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 마켓 3.0이 도래했다.

코틀러는 한 인터뷰에서 마케팅의 진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설명했다. “초창기의 마케팅은 소비자의 생각(mind)에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우리 회사 세제의 세탁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강조하는 식이다. 고객이 합리적이라면 품질 좋은 세제를 산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마케팅 1.0’ 방식이다. 여기서 한발 나아간 ‘마케팅 2.0’은 감성(heart)을 자극하는 방식이다. 이 브랜드의 옷을 입으면 당신도 세련된 패션리더가 될 수 있다는 메시를 던진다. ‘마케팅 3.0’은 궁극의 마케팅으로 사람들의 영혼(spirit)에 호소한다. 환경에 신경쓰고,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이라면 내게 특별한 혜택을 주지 않더라도 그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 소비자들이다. 현명한 기업들은 그런 소비자들에게 다가서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마케팅 3.0’이다.” 

1980년대 중반, 소비자들은 코카콜라라는 브랜드와 그 유명한 비빌 제조 방식에 대해 일종의 감정적인 유대감을 느낄 정도로 미국 대중문화의 일부분이었다. 그런데 1985년에 뉴코크(New Coke)는 출시 된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소비자들의 반발 때문에 시장에서 철수해야 했다. 뉴코크는 이런 유대감을 손상시켰고 소비자들은 이 신제품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스칸다나비아의 디자인가구 브랜드인 이케아(IKEA)도 2009년에 비용 절감을 위해 스타일리시한 기존 공식 서체를 기능성 높은 서체로 바꾸었다. 소비자들은 분노를 표출했고 트위터에는 온갖 억측들이 난무했다. 이 두 사건은 소비자들의 그러한 반발이 단순한 제품 개발 실패 그 이상이라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3.0시장에서는 어느 기업의 특정 브랜드가 성공을 거두고 나면 그 브랜드는 더 이상 그 기업의 것이 아니다. 3.0 시장에서는 사실상 ‘브랜드를 통제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브랜드는 이제 그 기업의 것이 아니고 소비자들의 것이다. 소비자들은 이제 기업의 새로운 오너다.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의 행동을 브랜드 미션과 일치시키는 것 뿐이다.

시장은 이제까지의 양상보다, 그리고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질 것이다. 단언컨대 기업을 포함해, 생존과 번영을 모색하는 모든 이들은 ‘공동창조’와 ‘협력’이라는 키워드를 그 중심에 놓지 않고는 이 변화를 헤쳐 나갈 수 없다. 누가 그렇듯 네트워크와 공존하며 협력하는 법을 가장 빨리 배우느냐에 따라, 향후 비즈니스의 지도가 뒤바뀔 것이다. 이제 ‘제때 월급을 두둑이 주는 회사’라는 이유만으로 일류 인재를 유치할 수 없을지 모른다.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 기업, 그리고 기업가정신은 모두의 심장을 뛰게 하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의미와 가치를 제공해주는 주체,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있다. ‘마켓 3.0’은 우리가 기업하는 방식, 일하는 방식, 창조하고 만들어내는 모든 방식을 바꾸어놓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그 변화의 실체를 그 어떤 필치보다 정교하고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여기다 22쪽에 달하는 꼼꼼한 참고문헌은 신뢰를 더한다. 이 책을 비단 미래경쟁력을 대비하는 기업뿐 아니라 정부, 비정부기구(NGO), 미래의 진로를 고민 중인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자들에게 일독하기를 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끝-(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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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나이스비트 메가트렌드 차이나 -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가는 중국의 8가지 힘
존 나이스비트 & 도리스 나이스비트 지음, 안기순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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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 
 

『메가트렌드 차이나』
존 나이스비트ㆍ도리스 나이스비트 지음, 안기순 옮김, 비즈니스북스, 2010
 

존 나이스비트는 앨빈 토플러와 함께 미래학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세계적인 미래학자이다. 1967년 중국 땅을 처음 밟은 후, 43년 동안 100번 넘게 중국을 방문한 ‘중국통’으로 텐진 난카이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나이스비트 중국연구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메가트렌드 차이나』는 나이스비트 부부가 오늘날 중국의 번영을 가져온 비결을 서구인이 아닌 중국인의 시각으로 썼다. 중국의 현재를 가장 정확하게, 중국의 미래를 가장 뚜렷하게 알 수 있는 책으로 꼽힌다. 이 책을 읽다가 작년 글로벌 금융위기때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떠돌던 말이 생각났다. “1949년,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다. 1979년,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다. 1989년, 중국만이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었다. 2009년,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의 탐욕에서 비롯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위기를 중국만이 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지금 중국은 수출 세계 1위, 기업 시가총액 2위, 군사비 2위, GDP 2위로 미국의 턱밑까지 바싹 추격했다. 골드만삭스의 경제학자 짐 오닐은 2030년이면 세계 GDP 순위가 중국 미국 일본 인도 순으로 바뀐다고 예측하고 있다. “중국이 언제 미국을 앞지를까요? 중국이 우리의 직업을 빼앗아 갈까요?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야 할까요?” 이것이 바로 요즘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낙후된 사회체제로 허덕이며 세계 빈국으로 꼽히던 중국이 30년 만에 미국과 함께 G2로 불릴 정도로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한 비결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를 하향식 지도와 상향식 참여의 균형, 중국 특색 사회주의로 안정을 찾은 정치, 국제적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추구하는 대외관계 전략, 자유와 공정성 등 ‘8가지 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는 특히 중국 발전의 원동력이 서구의 ‘수평적 민주주의’와 대비되는 중국식 ‘수직적 민주주의’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개인의 자율과 경쟁을 기반으로 선거를 통해 주기적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서구식 수평적 민주주의와 달리, 중국식 민주주의는 타인과 공동체와의 조화를 중시하는 수직적 민주주의라며 ‘중국모델’을 치켜 세운다. 중국이 공산주의 옷을 입은 자본주의 국가인지, 자본주의 옷을 입은 공산주의 국가인지를 묻는 것은 우문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서구 지식인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서구식 잣대를 들이대며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데 반해, 나이스비트는 중국을 서구의 관점이 아닌 중국인의 시각에서 보라고 누누히 강조한다. 서구식 민주주의는 한 세대가 아닌 수백 년에 걸쳐 성숙되었는데 비해, 중국은 자유와 국민 사회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한 지 불과 30년밖에 안 되었는데도 서구는 중국을 비난한다고 꼬집는다. 유럽이 자유무역을 시작하고 나서 민주적인 시장경제를 수립하기까지 300년이 걸렸고, 미국에서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정책이 폐지되는 데에도 거의 200년이 걸렸음을 상기시킨다. “중국은 천천히 전진할 것이다. 미끄러운 돌다리를 딛고 강을 건널때는 무엇보다 균형을 잡아야 한다. 비록 계속 비틀거릴지는 모르지만, 중국은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서구 지식인들 가운데 드물게 중국 정부로부터 환대를 받는 이유가 짐작된다. 

마지막 부분에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된 3T'(톈안먼 광장, 타이완, 티베트) 등 중국이 당면한 여러 문제에 대한 논쟁거리를 조심스럽게 던져 놓았다. 그러나 저자는 ‘중국 내부자의 시선으로 중국의 변화상을 살펴본다’는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에 몰두한 탓인지 중국 사회의 약점을 다룰 때조차도 한없이 너그럽다. “중국에는 부패가 존재한다.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도 존재한다. 중국에는 의심쩍은 지방정부가 있다. 하지만 직원이 수백 명인 기업에서도 절도, 뇌물 수수, 음모 등을 막을 수 없는데 인구가 13억인 기업이 결함 없이 돌아갈 수 있을까?” 티베트 문제를 언급할 때는 심지어 중국 정부의 대변인같은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중국에서 사람들은 보통 1950년 이전에는 티베트인의 95%가 ‘봉건주의 농노’로 살았다고 본다. 공산당이 지배하기 전의 티베트는 낮은 계급의 사람, 특히 최하층 천민에게 ‘지구상의 지옥’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90% 이상의 티베트 사람들을 농노 제도에서 해방시킨 것만으로도 중국은 이미 티베트를 지배할 도덕적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라는 구절은 선뜻 수긍하기 힘든 대목이다. 지난해 인민일보가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선정 했는데 자칫 중국인에게만 환영받을 책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 
 

일본이 독일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떠올랐던 시기는 1968년이다. 그 무렵 허먼 칸(Kahn)이라는 미래학자가 서기 2000년 일본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2010년 올해, 42년 동안 일본이 누려온 세계 2위 자리는 중국에 넘어간다. 42년 전 미국 추월론에 들떴던 일본은 지금 추락의 길을 걷고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 중심의 판도 재편 역시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극심한 부의 격차와 계층의 분화, 도시와 농촌의 발전 격차 등은 중국 지도부가 안고 있는 최대의 숙제이다. 2030년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 이라는 예언 역시 과잉 예찬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책을 비롯하여 차이나 파워를 다룬 책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중국의 몰락』(고든 창),『중국이라는 거짓말』(기 소르망),『반편이들의 상식』(량원다오) 등 다른 주장을 펼치는 책들을 함께 읽어 중국을 바라보는 균형있는 시각을 갖추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쨌든 중국은 우리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다. 갈수록 커지는 중국의 경제우산 속에서 중국의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대응전략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 중국은 2003년 미국, 2007년 일본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수출국과 수입국으로 떠올랐다. 대(對)중국 교역규모가 미국 및 일본과의 교역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을 정도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중국이 너무 잘돼도 걱정이고, 문제가 생겨도 우려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나이스비트는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비즈니스맨들에게 보다 객관적인 중국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 비즈니스맨들에게 해 주고 싶은 충고는 무었이냐”는 질문에 그는 “중국을 공부해라. 중국인의 시각으로 중국을 봐라. 깊이 알면 알 수록 중국은 거대한 기회의 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중국은 위협이 아닌 기회다”라고 답했다. 저자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중국을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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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즐거움
위치우위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이다미디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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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색이 드리우는 인생의 각별한 무늬  
 

『사색의 즐거움』
위치우위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이다미디어, 2010

‘증정’ 또는 ‘기증’이라는 스탬프가 찍힌 책들은 처음부터 내 눈으로 찍은 책들이 아니어서 그런지 대개는 읽는 순서에서 밀리거나 거의 안 읽혀지기 일쑤다. 그러나 최근에 받아본 위치우이(余秋雨)의『사색의 즐거움』은 사정이 다르다. 중국 공안의 단속망에 걸린 유흥업소 여종업원의 핸드백에서도 립스틱과 함께 그의 책이 나와 ‘문화립스틱’이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위치우위 신드롬’을 일으킨 저자에 대한 호기심이 앞섰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320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 앞에서 ‘思索’에 앞서 ‘死色’이 먼저 되었다) 

위치우이는 중국의 새뮤얼 존슨 또는 현대판 루쉰으로 불리는 유명한 문화사학자이자 예술평론가이다. 이 책은 그가 독서를 통해 얻은 사상, 철학, 인생관을 짧은 명상록 형식으로 적은 글모음이다. 원래 제목은 『인생철언(人生哲言)』이라는데 제목 만으로는 청소년 시절에 연애편지 채우느라 찾아보던 격언이나 명구 엮음집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보고, 현재 역사의 한가운데를 여행하면서 역사속에서 길을 묻고 길에서 느낀 생각의 갈피들을 기록해 놓았다. 저자는 향기로운 역사나 문화 이외에 폐허와 유배지, 또는 쓸쓸한 변방을 거니는 고독한 발걸음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내 마음이 가장 많이 끌리는 곳은 폐허를 여행하는 것이다. 석양 아래 부서진 기둥, 우거진 잡풀 사이 잘라진 비석에 익숙해지면 트렁크 속 역사책에 의혹의 눈길이 닿을 수밖에 없다. 폐허는 우리를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 속으로 인도한다. 폐허가 없다면 어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어제가 없다면 오늘과 내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폐허는 한 편의 교과서로, 우리에게 지리를 역사로 탈바꿈시켜준다. 폐허는 과정이다. 인생은 옛 폐허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폐허로 나아간다.” (58-60쪽)
 

이 문장을 읽다가 실크로드를 여행했던 어느 해 여름을 떠올렸다. 트루판 동쪽 끝에 있는 고창국의 옛 도시터인 ‘고창고성’을 당나귀마차에 의지해 찾아갔다. 부서진 기와와 벽돌, 붉은 흙덩어리들이 황폐한 들풀 사이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8월의 폭염 아래서 난 한참을 그렇게 정물처럼 서 있었다. 폐허를 바라보며 세상을 기어이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애틋하고 장렬한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저자는 이미『중국문화답사기』를 통해 유려하면서도 장중하고 서정적인 필력을 자랑한 바 있는데 이 책에서도 빼어난 글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짧은 기행 감상문에도 향기로운 역사, 운치 서린 사유, 깊고 깊은 삶의 내음이 얼마나 가득 담겨져 있는지, 당장 짐을 꾸려 떠나고 싶은 충동을 내내 억눌러야 했다.

“중국에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 참으로 많지만, 나는 유독 쑤저우(蘇州)에서 진정한 휴식을 얻을 수 있다. 이곳은 물이 맑고, 아름다운 복사꽃에, 창가는 매혹적이다. 주전부리가 너무 달고, 여인은 너무 곱고, 다관이 너무 많고, 서점이 너무 즐비하고, 서법은 지나치게 유려하다.” (115쪽)

“위대함이라는 찬사를 받을 도시는 로마이다. 로마는 모두 예술 거장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고, 모든 설계는 주위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공간적으로 전혀 어색함이 없으니, 다른 도시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눈치껏 위대함이라는 단어를 비껴갈 수밖에 없다.” (131쪽)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보면 그래도 가장 건전한 도시는 파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곳은 다른 도시의 장점과 단점을 거의 모두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장단점을 최대한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 도시에서 잠시 동안이라도 살 수 있다면 생명까지 자유로워질 것 같다” (136-137쪽) 

그의 글은 역사와 인물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내밀한 사유공간과 직접 연결된다. 여행을 하며 생각의 길을 걷다보면 예술이 보이고, 역사가 보이고, 어느덧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며 삶의 길을 묻고 대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문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동서고금의 역사·문화·예술 전반을 누비고 다니는 그의 글솜씨를 쫒아가다 보면 막혔던 ‘사로(思路)’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든다. 

“비극이 없다면 비장함도 없고, 비장함이 없다면 숭고함도 없다. 설봉이 위대한 까닭은 산등성이에 등산가의 시신이 묻혀있기 때문이다. 대해가 위대한 까닭은 곳곳에 선체의 잔해가 떠돌기 때문이다. 인생이 위대한 까닭은 백발, 이별, 어찌할 수 없는 실패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63쪽)

“중년이 가장 쉽게 저지르는 오류는 바로 모든 희망을 노년에 기탁하는 것이다. 지금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절제하며, 엄숙하고 정중하게 그리고 숨죽이며 인내하는 것은 모두 부를 축적하여 존엄하고 자유로운 노년을 쟁취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년에 무능한 사람은 결국 노년이 되어서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200쪽)

 

“사람은 평생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부류의 우정, 즉 넓은 의미의 우정과 엄격한 의미의 우정이 있어야 한다. 전자가 없으면 불편하고 불안할 것이며, 후자가 없으면 깊이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 (295쪽)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인문학적인 통찰과 상상력으로 덧칠한 아포리즘 형식의 짧은 산문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처음부터 읽어도 되지만 순서없이 어느장을 펼쳐도 무관하다. 내가 읽은 책에는 특히 3장(역사의 폐허를 거닐다), 6장(낯선 땅으로의 먼 여행), 8장(삶을 순례하다!)에 무수히 많은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쓴 사람의 사색의 기록이 책에서 걸어나와, 읽는 이의 삶에 각별한 무늬를 드리우는 소중한 증거다. -끝-(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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