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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사마천 사기열전 ㅣ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50선 9
정연 지음, 진선규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역사에 길을 묻다
『만화 사기열전』(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 v9)
사마천 지음, 주니어김영사, 2008
재작년 초, 딸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기념으로 서울대에서 선정한 ‘만화로 만나는 인문고전 50선’을 선물로 사주었다. (당시는 20권까지 발간되었다) 워낙 만화를 좋아하기에 아이도 무척 기뻐하는 눈치였다. 주문한 책이 도착한 날 딸아이와 나는 관심 끌리는 대로 한 권씩 집고 읽기 시작했다. (만화지만 분명 이 책은 보는 책이 아니고 읽는 책이다). 아이는 학교 수업시간에 자주 듣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먼저 집었고, 평소 동양고전에 관심이 있던 나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먼저 손이 갔다.
흔히 고전을 ‘누구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말한다. 동양고전을 말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책중의 하나인 《사기》도 그런면에서 예외는 아니다. 《사기》는 중국의 오제(五帝)부터 한무제까지 3천여 년의 시간을 포괄하는 웅대한 스케일을 담은 역사책이다. 사마천이 생식기를 절단당하는 궁형의 치욕을 겪으며 그 절망을 이겨내고 16년의 각고 끝에 집필한 책으로 유명하다. 특히 뛰어난 개인들의 전기를 다룬 70편으로 이루어진『사기열전』은 그중 돋보인다. 2천여년 전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인생의 의미, 처세의 태도, 인간관계 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어 오늘날에도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람이 한평생 만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인간군상이 다 녹아 있고, 인간사회의 영원한 주제인 ‘권력’과 ‘조직’에 관한 통찰에서도 다른 어떤 책보다 앞선다. 현대 경영학에서 전략과 조직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나타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방대한 분량에 압도당해 읽을 엄두가 쉽게 나지 않는게 문제다. 진작 사놓고도 아직도 다 못읽은 2권으로 이루어진 『사기열전』의 책 두께가 한권만도 무려 900여쪽에 이른다. 그러던 참에 200쪽이 겨우 넘는, 그것도 만화로 된 책을 만났으니 그야말로 단숨에 읽을 수 밖에.
이 책에는 《사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만화의 옷을 입고 흥미롭게 출연한다. 우선 이 책의 저자인 사마천과 《사기》의 배경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어서 백이와 숙제, 관중과 포숙, 오자서, 소진, 한신 등 중국 역사의 충신과 역적, 영웅과 호걸들이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그 외에도 한번쯤 들어 봤을 이름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모두 12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마다 독립된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어 굳이 순서를 지켜 읽지 않아도 된다. 어느 쪽을 펼쳐도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사기》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사유의 힘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야기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돋보이고 우뚝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사기열전』을 역사서 이전에 고품격 문학작품으로 읽었다는 이도 많을까. 모두 한번쯤은 들어봤던 이야기인데 다시 읽으니 새삼 흥미롭고 재미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2천년전 역사가 가지고 있는 현대적 힘이다. 『사기열전』의 생각들이 얼마나 강력하게 현재적인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각 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마천의 말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화두를 던지며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하늘은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고 말했지만 백이와 숙제 같은 착한 사람이 굶어 죽은 것을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과연 하늘의 뜻은 옳은가, 그른가.” (73쪽)
“한신이 도리를 배워 겸양의 태도로 자신의 공로를 뽐내지 않고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다면 후세에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147쪽)
“여자는 아름답건 못생겼건 간에 궁궐 안에 있기만 하면 질투를 받고 선비는 어질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조정에만 들어가면 의심을 받는다. 그렇듯 편작은 뛰어난 의술 때문에 화를 입었다. 노자는 ”아름답다고 좋은 그릇은 좋지 못한 조짐이 있는 그릇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편작을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173쪽)
《사기》를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으나 방대한 분량에 질려 감히 시도를 못했다면 이 책부터 권하면 좋을 듯 하다. 무엇보다 원전의 중후하고 깊이 있는 사유가 인문학적 결을 잃지 않으면서 만화와 어울려, 글은 그림을 북돋우고 그림은 글을 간지른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게 유익함과 재미가 곁들여진 선물로 적당하다. -끝- (2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