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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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

언제부턴가 남루한 일상과 지리멸렬한 삶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어중간한 존재로 사는 쓸쓸함과 피로감이 미역줄기처럼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어느 날 아침 토스트를 굽다가 식빵이 톡하고 튀어 나와 식탁 아래로 굴렀다. 커피도 떨어지고 냉장고 안도 텅 비어 있었다. 갑자기 인도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들레르처럼.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가장 빨리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구하고 짐을 꾸렸다. 불룩해진 배낭에서 옷가지를 빼고 몇 권의 책을 채워 넣었다.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도 그중 하나다. 앨리스 먼로는 우리 삶이 그래서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살아야 하는, 온통 비밀로 둘러싸여 있는 것임을 말해 준다. 그저 지키고 남아있고 바라보고 돌아오고 기다리는 것들로 인생이 채워져 있다며, 너무 많이 흔들리지 말라고 낮게 속삭인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앨리스 먼로, 디어 라이프, 문학동네, 2013, 142)

 

먼로의 소설은 여행 내내 위태로운 내 발걸음을 위무慰撫해 주었다. 읽을 때마다 매번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는 느낌과 함께 내가 살아냈던 인생의 어떤 한 장면과 마주치게 하면서, 삶 속으로 무찔러 들어와 균열을 냈다.디어 라이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416) 먼로는 삶은 우리보다 강하다고, 그러니 살아내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델리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마지막 쪽을 덮으며 한쪽 여백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용서하라, 사랑하려면! 사랑하라, 용서하려면!”지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지우지 못한 그 사람에게 올해가 가기 전에 전화를 걸어야겠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브라마의 도시 푸쉬카르에서 낙타를 타고 들판을 가로질러 사막으로 갔다. 들판에서 만난 목동들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게임을 하거나 다운로드한 음악을 듣느라 염소 떼를 돌보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염소들이 제멋대로 멀리 달아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염소들이 저렇게 흩어지는데 괜찮아? 안 쫓아가도 돼?”

여전히 스마트폰에 코를 박은 목동이 답한다.

“No Problem! 저들이 가는 방향이 내가 가려던 쪽이예요.”

 

여행은 자주 멈추고 자꾸 뒤돌아보게 만든다. 이름 모를 역을 지나칠 때마다 낯선 전율과 흥분이 눈을 찌른다. 발걸음은 더뎌지고 감상은 농밀해진다.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새삼 외로움이 더해지는 게 기어코 휴지 한 장을 더 꺼내 빈자리까지 닦아낸다. 그러나 하나는 적지만 둘은 너무 많은 게 여행 아닌가. 때론 비어있는 자리가 더 많은 말을 건넨다. 빈자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에 익숙해지는 게 여행이다. 불안과 주저와 한숨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이니, 그럴 때마다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푸쉬카르에서 아그라를 거쳐 카주라호에 도착했다. 50루피짜리 자전거를 빌려 타고 한가롭게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방인들이 점령해 버린 관광지를 벗어나 자연 속에 자리 잡은 마을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냈다. 울타리 없이 짐승을 기르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사진 찍히기를 두려워하는 우물가의 여인들을 지나치기도 했다. 카주라호는 궁색한 시골벽촌 이지만, 여전히 북인도 최고의 사원 유적지다. 노골적인 에로틱한 힌두사원 조각을 보기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조각상들은 인도 최초의 성애서인 카마수트라에 실려 있는 것들로 일반적인 종교에서 금기시하는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상상을 초월한 체위의 남녀 미투나상(교합상)들이 너무나 리얼하다. 남녀 둘만의 교접에서 더블Double은 물론, 동성애와 심지어 수간까지 등장한다. 이쯤 되면 19금이 아니고 49금이다. 그러나 신의 허락 아래 이루어지는 투명한 사랑의 행위라니 어쩔 것인가. “어떡하나요, 사랑 없인 살 수 없고, 사랑만으로도 살 수 없으니.”‘외로움이 지나쳐 애로움으로 변했는지, 카주라호에서의 마지막 날 밤 꿈속에 현란한 미투나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참지 않았다.

 

몽정은 나의 외가外家. 몽정이 육체의 정열이 될 수 없는 것은 자신이 그 육체를 사용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 몽정은 타인의 몸과 나누는 성교가 아니다. 자신의 육체와 벌이는 성교다. (중략) 몽정은 자신의 몸을 그리워하며 몸을 지나간다. 몸에 잔설殘雪을 남긴다.

(김경주, 밀어, 문학동네, 2012, 3539)

 

사막에서 사람들이 타고 온 낙타들이 저녁이 되면 둥글게 모여서 울곤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캄캄한 어둠속에서 낙타들이 집단적으로 수음을 하는듯한 몽롱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밀어는 인간의 몸속에 억겁으로 뒤엉킨 시차의 눈을 달래며 엄혹하고도 정밀하게 써내려간 육체의 서사시다. 신체 각 부위에 명명된 인간의 욕망과 고뇌의 흔적들을 하나씩 호출한다.

 

밤기차를 타고 콜카타에 도착했다. 한때는 대영제국의 전 세계 영토 중 런던을 제외하고 가장 컸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20세기 초반의 한 언저리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퇴락해가는 슬픈 화양연화花樣年華의 기억을 간직한 도시다. 집과 사람이 함께 쓰러져 가고 있는 슬럼가를 곳곳에 품고 있다. 역에서는 꼬질꼬질한 옷과 때 묻은 손을 한 아이들이 기부나 후원을 뜻하는박시시!’를 외치며 맨발로 앞을 가로막는다. 인도 아이들의 눈은 정말 엄청나게 크다. 아마 다른 민족에 비해 몇 배는 더 검고 몇 배는 더 흰 눈동자를 가진 듯하다. 그 큰 눈에 자신들의 모든 감정을 한껏 담아 손바닥을 내미는 아이들의 눈동자는 낙타의 그것처럼 허망하고 공허하다.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맞추지 않는 것으로 일단 피해 보지만 여자들은 빈손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의 등짝을 후려쳐 아이들을 관광객 앞으로 다시 내몬다.

 

나는 라면이 끓는 사이, 그들의 눈을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나눠 먹어야 마땅했지만 그 소중한 그것을 나눠 먹는 일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저 약간의 사례를 하고는 다 끓은 라면을 들고 찬바람까지 일으키며 그곳을 빠져 나왔다. 내가 떠나자 아이들이 라면 봉지와 스프 봉지를 차지해 핥으면서 다투기 시작했다.

(이병률,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2012, 7#)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71억 인구의 12%에 해당하는 84200만 명이 기아에 내몰리고 있다. 5초마다 10살 이하의 어린이가 못 먹어 죽어가고 있고, 해마다 630만 명의 어린아이들이 5살이 되기 전에 굶어 죽고 있다. 축복받은 땅일수록 저주받은 땅이고, 풍요로운 곳일수록 굶주림이 많은 곳인가. 세상의 거의 모든 신이 깃들어 사는 이곳 인도에 거의 모든 가난과 비참함이 동거하고 있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콜카타를 떠나기 전날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비오는 콜카타를 찍겠다고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한다. “카메라와 사람 둘 다 젖지 않으면서 좋은 사진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다.”우산을 던져놓고 셔터를 눌렀다.

 

이러면 어떨까요. 모두를 던지는 거예요.

그 다음은 그 이후의 모두를 단단히 잠그는 거예요. (중략)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이병률,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2012, 11#)

 

인도에서 한 달 쯤 시간이 지나자 입고 갔던 옷들의 단추가 하나둘씩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자주 멈추고 자꾸 뒤돌아보긴 했지만 그건 다른 빛깔의 희열이고 충만함이었다. 그러나 여행에서 막 돌아온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여행이라고 했던가.어디론가 짧은 편지를 썼다. “당신이 그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삿포르 대신에 상하이행 항공권을 끊었습니다. 12141155분에 푸동공항에 도착하는 OZ 363편입니다. 삿포르는 아니지만 공항에서 당신이 눈을 맞고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상하이에도 눈이 올까요?”--

     

리뷰한 책들

디어 라이프, 앨리스 먼로, 문학동네, 2013

밀어, 김경주, 문학동네, 2012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병률,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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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낭송Q 시리즈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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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라고 한다. 경제력과 체력만 있으면 과거 고려조선시대 왕들보다 호사하며 살 수 있다. 지금 시대의 대통령보다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던 과거 유럽의 황제들도 여러 모로 오늘날 선진국의 평균적인 시민보다 가난했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조차도 가장 좋은 교통수단은 마차였고 주치의는 무능했으며 화장실에선 수돗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저승 앞을 흐르는 삼도천의 뱃사공 카론의 눈에 일찍 띄는 것처럼 억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길어진 여생을 대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태평성대 아닌가. 굶어 죽지도, 전염병이 휩쓸지도, 전쟁을 겪지도 않는 시대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이 얼마나 난세이고 혼세인지를. 무엇이 문제인가?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미숙,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북드라망, 2014, 179)

 

길어진 인생을 위해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연금과 일자리가 아니라, 길어진 삶이 지닌 가능성을 어떻게 꾸려 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다. 매일 등산을 갈 수도 없고, 손자 손녀를 무릎에 올려놓고 바라보는 재미도 잠깐이다. 그렇다고 매번 새로운 아이템item을 쫒으며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버겁다. 되도록 빨리 아이 엠i am을 찾는 공부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스는 2030년 안에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직업적 격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시간을 보람 있게 쓸 수 있게,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게, 웃을 수 있게,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 가장 큰 존경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삶의 질 향상사쯤이 될까. 구체적인 직업을 생각해 보자. 예술가, 철학자, 영화제작자, 축구선수, 심리치료사는 살아남을까? 그럴 것이다. 정치인과 은행가도 살아남을까? 그러길 바란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한다. “자신의 가슴을 타인의 노래로 채우지 마라!” 그렇다. 가지나 잎을 따는 사람은 절대로 꽃이나 열매를 가질 수가 없는 법이다. 나를 구원할 이는 오직 나뿐이다. 그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우리 스스로가 내딛는 공부다. 기존의 공부에 대한 통념을 전복하고, 공부에 대한 새로운 통찰에 다가서야 한다. 바로 남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자기 자신과 경쟁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를 변혁하고 삶을 벼리는 새로운 공부의 방식이다. 다행히 디지털 문명 덕분에 누구든 어디서건 최고의 지성에 접근할 수 있다. 대신지금 당장’‘여기서시작해야 한다. 살아 있다는 건지금, 여기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강력한 의지는 삶을 항상 현재적인 것으로 만든다. 하루가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의역학에서는 40세가 되기 전까지는 발산 운동이 지배하므로 활발히 움직이고 일하며, 40세 이후에는 수렴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로 서서히 활동을 줄이고 힘을 기르는 수렴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40세 이후에 공부 욕구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올해 쉰을 살았다. 주역에서 50을 기본수라고 한다. 인생에서 50이라는 시기는 매우 중요하다. 자연과 인생을 시작과 끝을 놓고 볼 때 중간을 매개하는 숫자가 50이다. 우리는 매년 사계절을 경험하지만 특히 봄여름에서 가을겨울로 넘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생의 변곡점을 어떤 식으로든 겪어야 제대로 마디를 넘을 수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 그럼 대체 공부란 무엇인가? 교과서를 달달 외고 문제집을 술술 풀고 계산을 척척 해내는 게 공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안다. 그렇다. 공부는 쿵푸다. 몸과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것을 넘어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부의 핵심은 역시 소리요 청각이다. 신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낭송과 암송이라는 전통의 공부법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니체는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비유컨대,‘정신은 몸의 의지를 수행하는 손이라는 것. 그러므로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지도 않고, 분리할 수도 없다. 고로, 나는 신체다!

(고미숙,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북드라망, 2014, 2021)

 

몸은 삶의 유일한 현장이자 무대요, 존재와 우주가 교차하는 접점이다. 낭송은 아주 구체적이면서 신체적인 활동이며 몸이 좋아하는 독서법이다. 백미보다 현미가 몸에 좋은 것처럼 묵독보다 낭송이 몸에 더 잘 호응한다. 묵독은 이야기에 담긴 긴장과 갈등, 지혜와 성찰의 호흡을 제거한다. 그런데 낭송하는 순간 책속에 몽글몽글하게 웅크리고 있던 활자들이 그 뜻을 곧게 펴고 책 밖으로 걸어 나온다. 내용을 이해하고 못하고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건 그 파동과 기를 몸이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을 하려면 입과 귀를 써야 한다. 입과 귀가 움직이면 뇌가 충전된다. 그리고 뇌를 자극하면 심장을 거쳐 신장으로, 허벅지와 발바닥까지 그 기운이 전달된다. 그래서 낭송을 일종의 양생비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유일한 부작용은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나쁜 중독이든 좋은 중독이건 중독은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다. 낭송에 빠지면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입 밖으로 소리 내서 읽으려고 달려들지 모른다. 비록 그것이 가계부와 애 성적표일지라도. 그러니 일단 신체와 궁합이 잘 맞는 좋은 고전을 고른 다음에 머리로 바짝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낭송을 통해 몸에 새기는 과정이 필요하다. 낭송에 가장 적합한 텍스트는 동양고전이다. 그중에서도 춘향전이나 심청전같은 우리말의 보고인 판소리계 소설이라면 금상첨화다.

    

낭독이나 낭송은 혼자 할 수도 있고, 같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낭독과 낭송은 그 자체로 다중적이며 공동체적 행위다. 함께 읽어야 하고, 서로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이다. 감동을 주는 요긴한 방법 중 하나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서로 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낭독이나 낭송은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이 길을 오래 걸어가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같이 하는 것이 좋다. 광장이나 마당을 통해 일종의지성의 코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크기는 삶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말 그 자체가 명령서이면서 실천윤리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발달할수록지혜로 삶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욕구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창조의 언어인 로고스logos를 통해 개인의 운명과 삶의 배치를 바꾸는 것, 그것이 디지털 문명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윤리적 선택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는 점점 더불통의 시대로 변하고 있다. 폭언과 무언 사이를 허망하게 왕복달리기 하기 일쑤다. 신체를 소외시킨 우리 시대의 화법이 호흡은 짧고 서사는 빈곤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신은 어쩌면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인간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핵심은 외는 것이다. 다 외워야 낭송이 가능하다. 암기와 암송은 다르다. 암기가 음소거 상태에서 의미 단위로 텍스트를 먹어 치우는 것이라면, 암송은 소리로써 텍스트를 몸 안에 새기는 행위다. 그렇다. 뼈에 새기려면 외워야 한다. (고미숙,『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북드라망, 2014,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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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리거나 혹은 떨리거나 - 박일호 기행 서평집
박일호 지음 / 현자의마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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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후반전을 준비하기 위해 떠난 한 달 간의 인도여행! 그곳에서 길어올린 빛나는 사유가 반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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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마켓이 온다
무라타 히로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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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마켓에 주목해라

 

그레이마켓이 온다

무라타 히로유키 지, 김선영 옮김, 중앙books, 2013

 

일본의 고령화율(총인구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2012년 기준으로 세계 최고치인 24.1%에 달한다. 일본인 4명 중 1명은 65세 노인으로, 이대로라면 2055년엔 거의 둘 중 하나가 노인인구다. 근로자 1명이 노인 1명 가까이를 부양해야 하는 시대가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일본을 필두로 각국에서 급속도로 진행되는 고령화가 기업들의 경영전략을 뿌리부터 바꿔놓기 시작했다. 기업들의 성패가 거대한 고령 소비층, 이른바 '그레이 달러'를 잡느냐 놓치냐에 달린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미래경제 패러다임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레이마켓이 온다는 일본 시니어 비즈니스 분야의 전문가인 무라타 히로유키가 고령화사회의 일본 현실을 진단하고, 실버산업과 시니어 시장에 대해 통찰을 전한다. 저자는 미국 시니어 비즈니스 최대 싱크탱크인 더 소사이어티The Society’의 유일한 일본인 회원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서 시니어 비즈니스 분야의 일인자로 인정받고 있는 전문 컨설턴트이다. 일본은 지난 2007, 베이비부머세대의 최연장자가 퇴직연령인 60세가 되면서 노인고객이 만들어낼 유례없이 큰 시장을 기대하며 경쟁적으로 실버 화두를 내세웠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고령사회 최대집단인 노인인구의 씀씀이는 애초 시장기대를 빗나갔다. 뚜껑을 열어보니 의외로 덜 쓰고 안 쓰는 노인이 태반이었다. 이 책은 이미 시니어 시장에 진출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기업 관계자들에게는 어째서 고전하는지, 어떻게 하면 성공할지,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힌트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우리 생활 속에서 지금까지 오래도록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수많은 상식이 뒤집히고 있다. 최근 언론에 부쩍 등장하는 시니어 시프트Senior Shift’가 그 중 하나다. 종이기저귀, 리카 인형, 노래방, 스마트폰, 패밀리 레스토랑, 슈퍼마켓과 같은 시장은 종래의 아동 및 청장년을 위한 서비스에서 시니어를 위한 서비스로 스타일을 바꾸어 매출을 높이고 있다. 편의점 역시 그간 청장년에게 맞췄던 포인트를 점차 고령손님에게 옮기는 추세다. 진열전략을 바꾸고 노인 입맛에 맞춘 상품과 서비스를 대거 확충했다. 미래시장의 주인공이 누군지 인구변화로 확인했으니 기업전략도 여기에 맞춰 전환하겠다는 움직임이다. 이들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시니어 시프트는 대세이고 기다려주지 않는 시대의 물결이다. 이 변화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면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즈니스 기회를 두 눈 멀쩡히 뜨고 놓치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니어 시프트에 대처할 것인가? 먼저 시장을 정확히 분석해야 한다. 시니어 자산의 특징은 고자산 빈곤층이다. 자산이 많다고 해서 그 자산을 전부 일상 소비에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또 시니어층의 소비 행동은 청장년층에 비해 매우 다양하고 다면적이다. 시니어 시장은 매스마켓이 통하지 않는 다양한 마이크로 시장의 집합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니어 시장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가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활용해 정보를 수집하고, 적극적인 소비행동을 취하는 스마트 시니어의 등장이다. 2001년 일본의 50대 인터넷 이용률은 30%대였지만 2010년에는 90%로 급격하게 증가했다. 시장은 이전의 판매자 시장에서 구매자 시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정보로 무장한 시니어가 증가하면서 시니어 시장도 종래의 판매자 논리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실버타운 체험 입주를 할 때 디지털카메라를 준비해, 운영 체제가 가장 약해지는 새벽 1시에 긴급신고 버튼을 눌러 직원의 대응상황을 사진으로 찍어서 철저한 사전검증을 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스마트 시니어의 증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다. 무엇보다 시니어 비즈니스의 기본은 ‘3해소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시니어의 ‘3대 불안은 건강 불안, 경제 불안, 고독 불안이다. 책에는 이런 불안, 불만, 불편의 해소를 통해 비즈니스에 성공한 사례가 소개되고 있다. 여성 전용 피트니스 클럽 커브스Curves는 여성이 기존 피트니스 클럽에 품고 있던 불만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해소함으로써 7년 사이 점포 수 1200, 회원 수 50만 명으로 성장했다. 게이오 백화점은 고령자가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 넘어지기 쉽다는 점을 고려해 에스컬레이터 속도를 일반적인 평균 속도보다 늦추었다. 포화된 것은 시장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머릿속이다. 시니어 시장에서는 언뜻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사업의 기회를 찾기도 한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 인구 6만 명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2000가구의 대규모 은퇴자 커뮤니티인 윌로우 밸리Willow Valley가 그 예이다. 윌로우 밸리는 플로리다나 애리조나처럼 따뜻하고 편리한 장소가 아니다. 겨울에는 춥고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도 시설 입주율이 거의 100%에 이르는 비결은 입주자가 참가하는 독특한 영업활동에 있다. 견학자가 전미에서 모여드는데, 이때 입주자가 직접 안내를 맡는다. 가령 플로리다 주에서 온 견학자는 플로리다에서 입주한 입주자가, 캘리포니아 주에서 온 견학자는 캘리포니아에서 이주한 입주자가 안내한다. 그렇게 되면 처음에는 이렇게 추운 시골에서 어떻게 사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망설이던 사람도 자기와 같은 지역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 온 사람의 실제 체험을 듣고 안도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도 예외가 아니라는데 있다. 흔히들 일본의 현재가 한국의 미래를 보여준다고 말하는 근거는 바로 인구구성이다. 한국은 이미 고령화 사회를 넘어 고령 사회로 다가서고 있다. 2050년쯤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37%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한다. 이는 일본 다음으로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아지는 것을 뜻한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근로인구 부족과 부양인구 증가로 나타나며 이는 세수 부족으로 이어져 복지 부담과 성장 동력 상실의 원인이 된다. ‘현재 일본미래 한국의 바로미터이다. 오늘날 한국의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이러한 암울한 미래 전망은 세계에서 가장 고령화된 인구구성을 가진 일본을 연구해야만 답을 찾을 수 있다. 일본에서 시니어 산업과 고령화 이슈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현장 전문가의 치밀한 분석과 설득력 있는 해법은 내일의 한국을 보는 현미경이자 망원경이다. 우리나라 실버 산업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디플레가 불가피한 시대에 유력한 대안은 저성장고령화와 맞물린 시니어 시장의 잠재파워다. 향후 우리나라 역시 실버 산업, 노인시장의 경쟁이 더욱 심화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다가오는 변화의 바람을 타고 미로에서 탈출해 미래를 주도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저자의 조언에 귀 기울여야 할 듯 하다. -- (기획회의 361호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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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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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이다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문학동네, 2013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장편소설 롤리타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비정상적 소아성애증을 뜻하는롤리타 콤플렉스라는 용어까지 낳을 정도로 추잡한 중년 남자가 12살 짜리 여자아이에게 성적으로 집착하는 구역질나는 이야기라고 했다. 반면 충격적이고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독창적인 사랑에 대한 연구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의 후유증으로 사춘기 이전이나 사춘기에 접어든 9세에서 14세에 이르는님펫이라고 부르는 어린 소녀들에게 집착하며 사랑의 욕망을 느끼는 험버트가 주인공이다. 어느 여름날, 37살의 험버트에게 치명적인 매력과 마력을 가진 12살 소녀 롤리타가 나타난다. 롤리타에게 완전히 매혹 당한 험버트는 그녀 곁에 머물기위해 롤리타 엄마와 재혼하여 롤리타의 의붓아버지가 된다. 롤리타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자 험버트는 롤리타와 함께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사랑을 나눈다. 험버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배심원들을 향해 감옥 겸 정신병원에서 길게 늘어놓은 독백이 이 소설의 중심 내용이다. 낭만적이고 시적이며, 성애적이자 희극적이고도 비극적인, 포에로틱한poerotie한 이 소설의 스토리를 요약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읽을 수 밖에 없다. 금지된 사랑을 다룬 이 소설은 1955년에 출간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키며 논란의 중심에 휩싸이며 20세기 포르노그라피라 매도당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수많은 은유와 상징들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문학적으로 재평가되어, 타임 르몽드 모던라이브러리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영문소설'에 포함될 정도로 고전의 반열에 놓이게 된다. 책 표지를 열자마자 흰 목양말에 끈달린 운동화를 신고 눈부시게 빛나는 종아리를 드러낸 짧은 교복치마의 하반신 사진이 눈길을 끈다. 혼자있는 서재지만 혹시나 아내나 딸애가 볼세라 주위를 한 번 둘러보게 만든다. 영화로도 본 적이 있는 소설 은교가 오버랩되어 지나간다.

 

롤리타는 이렇게 시작한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 . .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에 이렇게 압도하는 첫 문장이 있었던가.

 

사랑 혹은 광기에 집착하는 한 사내의 과도한 집착이 시종일관 고른 호흡으로 읽기를 방해하지만, 중간중간 심어놓은 깨알같은 유머코드가 심각한 독서에서 독자들을 끌어낸다. 험버트가 자신들 사랑의 훼방꾼인 극작가퀼티와 맞대결하며 그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대목이 특히 압권이다. 거창한 서부영화처럼 심각하고 잔인하고 엄숙해야 할 살인장면이 오히려 슬랩스틱 코미디를 닮았다.(471-491) 우리는 프리송frisson(두근거리는 것, 스릴을 뜻하는 프랑스어)에 잘 걸려 넘어지는 존재다.롤리타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엄격한 법전이나 딱딱한 상식 대신 자유로운 정신과 풍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 존재가 가진 비밀스러운 구석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정신의 밑바닥을 훑어야 가능하다. 여러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위대한 스타일리스트인 나보코프는 우아하고 비유적이고 재치 넘치는 문장으로 위장한 언어유희와 수많은 중의어들을 작품 곳곳에 숨겨놓았다. 그리고 그 지뢰가 터질때마다 독자가 깜짝깜짝 놀라는 모습을 시치미를 뚝 떼고 즐기는 듯 하다. 마치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역자는 독창적이고 매혹적인 문체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이 시종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며힘을 주면 금이 갈 것 같고, 조금만 열어두면 향기가 다 날아갈 듯하다고 표현했다. 사족하나. 우연인지 요즘 읽는 소설에서 꼭 한 대목씩 한국에 대한 언급이 보너스처럼 찾아온다. 이를테면 챗필드 부인이 험버트에게 하는 이런 대사. “가엾게도 그 아이는 얼마 전에 한국에서 전사했단 말예요.”(466)

 

롤리타는 한 번 읽고 말 책이 아니다. 나보코프가 말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사람은 책을 읽을 수 없다. 다시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좋은 독자, 일류 독자,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독자는 재독자再讀者. 소설은 읽고 또 읽어야 한다. 아니면 읽고 읽고 또 읽든지.”롤리타의 주석 및 해설을 담당한 나보코프 전문가인 앨프리드 아펠도 이렇게 단언했다. “전 세계의 속독가들이여, 유념하라!롤리타는 여러분을 위한 책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가. 영국의 소설가 킹즐리 에이미스가 롤리타의 문제 중 하나는, 지나치게 외설적이기는커녕 충분히 외설적이지 않다는 점이다.”라고 한 말이 지금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롤리타를 한 번 읽고 쓴 이 리뷰도 무효일수밖에. 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해야할 것 같다. “누군가에게 첫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랑이다.”그렇지 않은가? 미스터 험버트 험버트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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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30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저도 정말 처음 문장 보고 잠시 멍했죠. 시적이잖아요.
그러면서도 뭔가 쓸쓸한... 정말 첫 문장이 황홀한 소설 넘버 원입니다....

구름을벗어난달 2014-02-10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아마 저도 너무 어리거나 젊었을때 이 소설을 읽었다면 어쩌면 중간에 던졌을지도 모릅니다. 책의 감동은 영화로도 이어졌는데, 마지막 장면에 나오던 제레미 아이언스의 허망한 눈빛이 지금도 기억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