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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ㅣ 낭송Q 시리즈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4년 11월
평점 :
100세 시대라고 한다. 경제력과 체력만 있으면 과거 고려조선시대 왕들보다 호사하며 살 수 있다. 지금 시대의 대통령보다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던 과거 유럽의 황제들도 여러 모로 오늘날 선진국의 평균적인 시민보다 가난했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조차도 가장 좋은 교통수단은 마차였고 주치의는 무능했으며 화장실에선 수돗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저승 앞을 흐르는 삼도천의 뱃사공 카론의 눈에 일찍 띄는 것처럼 억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길어진 여생을 대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태평성대 아닌가. 굶어 죽지도, 전염병이 휩쓸지도, 전쟁을 겪지도 않는 시대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이 얼마나 난세이고 혼세인지를. 무엇이 문제인가?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미숙,『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북드라망, 2014, 179쪽)
길어진 인생을 위해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연금과 일자리가 아니라, 길어진 삶이 지닌 가능성을 어떻게 꾸려 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다. 매일 등산을 갈 수도 없고, 손자 손녀를 무릎에 올려놓고 바라보는 재미도 잠깐이다. 그렇다고 매번 새로운 아이템item을 쫒으며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버겁다. 되도록 빨리 아이 엠i am을 찾는 공부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스는 2030년 안에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직업적 격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시간을 보람 있게 쓸 수 있게,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게, 웃을 수 있게,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 가장 큰 존경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삶의 질 향상사’쯤이 될까. 구체적인 직업을 생각해 보자. 예술가, 철학자, 영화제작자, 축구선수, 심리치료사는 살아남을까? 그럴 것이다. 정치인과 은행가도 살아남을까? 그러길 바란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한다. “자신의 가슴을 타인의 노래로 채우지 마라!” 그렇다. 가지나 잎을 따는 사람은 절대로 꽃이나 열매를 가질 수가 없는 법이다. 나를 구원할 이는 오직 나뿐이다. 그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우리 스스로가 내딛는 공부다. 기존의 공부에 대한 통념을 전복하고, 공부에 대한 새로운 통찰에 다가서야 한다. 바로 남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자기 자신과 경쟁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를 변혁하고 삶을 벼리는 새로운 공부의 방식이다. 다행히 디지털 문명 덕분에 누구든 어디서건 최고의 지성에 접근할 수 있다. 대신‘지금 당장’‘여기서’시작해야 한다. 살아 있다는 건‘지금, 여기’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강력한 의지는 삶을 항상 현재적인 것으로 만든다. 하루가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의역학에서는 40세가 되기 전까지는 발산 운동이 지배하므로 활발히 움직이고 일하며, 40세 이후에는 수렴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로 서서히 활동을 줄이고 힘을 기르는 수렴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40세 이후에 공부 욕구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올해 쉰을 살았다. 주역에서 50을 기본수라고 한다. 인생에서 50이라는 시기는 매우 중요하다. 자연과 인생을 시작과 끝을 놓고 볼 때 중간을 매개하는 숫자가 50이다. 우리는 매년 사계절을 경험하지만 특히 봄여름에서 가을겨울로 넘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생의 변곡점을 어떤 식으로든 겪어야 제대로 마디를 넘을 수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 그럼 대체 공부란 무엇인가? 교과서를 달달 외고 문제집을 술술 풀고 계산을 척척 해내는 게 공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안다. 그렇다. 공부는 쿵푸다. 몸과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것을 넘어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부의 핵심은 역시 소리요 청각이다. 신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낭송과 암송’이라는 전통의 공부법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니체는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비유컨대,‘정신은 몸의 의지를 수행하는 손’이라는 것. 그러므로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지도 않고, 분리할 수도 없다. 고로, 나는 신체다!
(고미숙,『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북드라망, 2014, 20〜21쪽)
몸은 삶의 유일한 현장이자 무대요, 존재와 우주가 교차하는 접점이다. 낭송은 아주 구체적이면서 신체적인 활동이며 몸이 좋아하는 독서법이다. 백미보다 현미가 몸에 좋은 것처럼 묵독보다 낭송이 몸에 더 잘 호응한다. 묵독은 이야기에 담긴 긴장과 갈등, 지혜와 성찰의 호흡을 제거한다. 그런데 낭송하는 순간 책속에 몽글몽글하게 웅크리고 있던 활자들이 그 뜻을 곧게 펴고 책 밖으로 걸어 나온다. 내용을 이해하고 못하고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건 그 파동과 기氣를 몸이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을 하려면 입과 귀를 써야 한다. 입과 귀가 움직이면 뇌가 충전된다. 그리고 뇌를 자극하면 심장을 거쳐 신장으로, 허벅지와 발바닥까지 그 기운이 전달된다. 그래서 낭송을 일종의 양생비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유일한 부작용은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나쁜 중독이든 좋은 중독이건 중독은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다. 낭송에 빠지면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입 밖으로 소리 내서 읽으려고 달려들지 모른다. 비록 그것이 가계부와 애 성적표일지라도. 그러니 일단 신체와 궁합이 잘 맞는 좋은 고전을 고른 다음에 머리로 바짝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낭송을 통해 몸에 새기는 과정이 필요하다. 낭송에 가장 적합한 텍스트는 동양고전이다. 그중에서도 『춘향전』이나 『심청전』같은 우리말의 보고인 판소리계 소설이라면 금상첨화다.
낭독이나 낭송은 혼자 할 수도 있고, 같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낭독과 낭송은 그 자체로 다중적이며 공동체적 행위다. 함께 읽어야 하고, 서로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이다. 감동을 주는 요긴한 방법 중 하나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서로 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낭독이나 낭송은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이 길을 오래 걸어가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같이 하는 것이 좋다. 광장이나 마당을 통해 일종의‘지성의 코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크기는 삶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말 그 자체가 명령서이면서 실천윤리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발달할수록‘말’과‘지혜’로 삶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욕구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창조의 언어인 로고스logos를 통해 개인의 운명과 삶의 배치를 바꾸는 것, 그것이 디지털 문명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윤리적 선택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는 점점 더‘불통의 시대’로 변하고 있다. 폭언과 무언 사이를 허망하게 왕복달리기 하기 일쑤다. 신체를 소외시킨 우리 시대의 화법이 호흡은 짧고 서사는 빈곤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신은 어쩌면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인간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핵심은 외는 것이다. 다 외워야 낭송이 가능하다. 암기와 암송은 다르다. 암기가 음소거 상태에서 의미 단위로 텍스트를 먹어 치우는 것이라면, 암송은 소리로써 텍스트를 몸 안에 새기는 행위다. 그렇다. 뼈에 새기려면 외워야 한다. (고미숙,『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북드라망, 2014,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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