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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
언제부턴가 남루한 일상과 지리멸렬한 삶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어중간한 존재로 사는 쓸쓸함과 피로감이 미역줄기처럼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어느 날 아침 토스트를 굽다가 식빵이 톡하고 튀어 나와 식탁 아래로 굴렀다. 커피도 떨어지고 냉장고 안도 텅 비어 있었다. 갑자기 인도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들레르처럼.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가장 빨리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구하고 짐을 꾸렸다. 불룩해진 배낭에서 옷가지를 빼고 몇 권의 책을 채워 넣었다.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도 그중 하나다. 앨리스 먼로는 우리 삶이 ‘그래서’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온통 비밀로 둘러싸여 있는 것임을 말해 준다. 그저 지키고 남아있고 바라보고 돌아오고 기다리는 것들로 인생이 채워져 있다며, 너무 많이 흔들리지 말라고 낮게 속삭인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앨리스 먼로, 『디어 라이프』, 문학동네, 2013, 142쪽)
먼로의 소설은 여행 내내 위태로운 내 발걸음을 위무慰撫해 주었다. 읽을 때마다 매번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는 느낌과 함께 내가 살아냈던 인생의 어떤 한 장면과 마주치게 하면서, 삶 속으로 무찔러 들어와 균열을 냈다.『디어 라이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416쪽) 먼로는 삶은 우리보다 강하다고, 그러니 살아내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델리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마지막 쪽을 덮으며 한쪽 여백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용서하라, 사랑하려면! 사랑하라, 용서하려면!”지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지우지 못한 그 사람에게 올해가 가기 전에 전화를 걸어야겠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브라마의 도시 푸쉬카르에서 낙타를 타고 들판을 가로질러 사막으로 갔다. 들판에서 만난 목동들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게임을 하거나 다운로드한 음악을 듣느라 염소 떼를 돌보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염소들이 제멋대로 멀리 달아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염소들이 저렇게 흩어지는데 괜찮아? 안 쫓아가도 돼?”
여전히 스마트폰에 코를 박은 목동이 답한다.
“No Problem! 저들이 가는 방향이 내가 가려던 쪽이예요.”
여행은 자주 멈추고 자꾸 뒤돌아보게 만든다. 이름 모를 역을 지나칠 때마다 낯선 전율과 흥분이 눈을 찌른다. 발걸음은 더뎌지고 감상은 농밀해진다.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새삼 외로움이 더해지는 게 기어코 휴지 한 장을 더 꺼내 빈자리까지 닦아낸다. 그러나 하나는 적지만 둘은 너무 많은 게 여행 아닌가. 때론 비어있는 자리가 더 많은 말을 건넨다. 빈자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에 익숙해지는 게 여행이다. 불안과 주저와 한숨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이니, 그럴 때마다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푸쉬카르에서 아그라를 거쳐 카주라호에 도착했다. 50루피짜리 자전거를 빌려 타고 한가롭게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방인들이 점령해 버린 관광지를 벗어나 자연 속에 자리 잡은 마을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냈다. 울타리 없이 짐승을 기르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사진 찍히기를 두려워하는 우물가의 여인들을 지나치기도 했다. 카주라호는 궁색한 시골벽촌 이지만, 여전히 북인도 최고의 사원 유적지다. 노골적인 에로틱한 힌두사원 조각을 보기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조각상들은 인도 최초의 성애서인 카마수트라에 실려 있는 것들로 일반적인 종교에서 금기시하는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상상을 초월한 체위의 남녀 미투나상(교합상)들이 너무나 리얼하다. 남녀 둘만의 교접에서 더블Double은 물론, 동성애와 심지어 수간까지 등장한다. 이쯤 되면 19금이 아니고 49금이다. 그러나 신의 허락 아래 이루어지는 투명한 사랑의 행위라니 어쩔 것인가. “어떡하나요, 사랑 없인 살 수 없고, 사랑만으로도 살 수 없으니.”‘외로움’이 지나쳐 ‘애로움’으로 변했는지, 카주라호에서의 마지막 날 밤 꿈속에 현란한 미투나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참지 않았다.
몽정은 나의 외가外家다. 몽정이 육체의 정열이 될 수 없는 것은 자신이 그 육체를 사용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 몽정은 타인의 몸과 나누는 성교가 아니다. 자신의 육체와 벌이는 성교다. (중략) 몽정은 자신의 몸을 그리워하며 몸을 지나간다. 몸에 잔설殘雪을 남긴다.
(김경주, 『밀어』, 문학동네, 2012, 35〜39쪽)
사막에서 사람들이 타고 온 낙타들이 저녁이 되면 둥글게 모여서 울곤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캄캄한 어둠속에서 낙타들이 집단적으로 수음을 하는듯한 몽롱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밀어』는 인간의 몸속에 억겁으로 뒤엉킨 시차의 눈을 달래며 엄혹하고도 정밀하게 써내려간 육체의 서사시다. 신체 각 부위에 명명된 인간의 욕망과 고뇌의 흔적들을 하나씩 호출한다.
밤기차를 타고 콜카타에 도착했다. 한때는 대영제국의 전 세계 영토 중 런던을 제외하고 가장 컸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20세기 초반의 한 언저리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퇴락해가는 슬픈 화양연화花樣年華의 기억을 간직한 도시다. 집과 사람이 함께 쓰러져 가고 있는 슬럼가를 곳곳에 품고 있다. 역에서는 꼬질꼬질한 옷과 때 묻은 손을 한 아이들이 기부나 후원을 뜻하는‘박시시!’를 외치며 맨발로 앞을 가로막는다. 인도 아이들의 눈은 정말 엄청나게 크다. 아마 다른 민족에 비해 몇 배는 더 검고 몇 배는 더 흰 눈동자를 가진 듯하다. 그 큰 눈에 자신들의 모든 감정을 한껏 담아 손바닥을 내미는 아이들의 눈동자는 낙타의 그것처럼 허망하고 공허하다.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맞추지 않는 것으로 일단 피해 보지만 여자들은 빈손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의 등짝을 후려쳐 아이들을 관광객 앞으로 다시 내몬다.
나는 라면이 끓는 사이, 그들의 눈을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나눠 먹어야 마땅했지만 그 소중한 그것을 나눠 먹는 일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저 약간의 사례를 하고는 다 끓은 라면을 들고 찬바람까지 일으키며 그곳을 빠져 나왔다. 내가 떠나자 아이들이 라면 봉지와 스프 봉지를 차지해 핥으면서 다투기 시작했다.
(이병률,『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달, 2012, 7#)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71억 인구의 12%에 해당하는 8억 4200만 명이 기아에 내몰리고 있다. 5초마다 10살 이하의 어린이가 못 먹어 죽어가고 있고, 해마다 630만 명의 어린아이들이 5살이 되기 전에 굶어 죽고 있다. 축복받은 땅일수록 저주받은 땅이고, 풍요로운 곳일수록 굶주림이 많은 곳인가. 세상의 거의 모든 신이 깃들어 사는 이곳 인도에 거의 모든 가난과 비참함이 동거하고 있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콜카타를 떠나기 전날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비오는 콜카타를 찍겠다고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한다. “카메라와 사람 둘 다 젖지 않으면서 좋은 사진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다.”우산을 던져놓고 셔터를 눌렀다.
이러면 어떨까요. 모두를 던지는 거예요.
그 다음은 그 이후의 모두를 단단히 잠그는 거예요. (중략)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이병률,『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달, 2012, 11#)
인도에서 한 달 쯤 시간이 지나자 입고 갔던 옷들의 단추가 하나둘씩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자주 멈추고 자꾸 뒤돌아보긴 했지만 그건 다른 빛깔의 희열이고 충만함이었다. 그러나 여행에서 막 돌아온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여행이라고 했던가.어디론가 짧은 편지를 썼다. “당신이 그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삿포르 대신에 상하이행 항공권을 끊었습니다. 12월 14일 11시 55분에 푸동공항에 도착하는 OZ 363편입니다. 삿포르는 아니지만 공항에서 당신이 눈을 맞고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상하이에도 눈이 올까요?”-끝-
▶ 리뷰한 책들
디어 라이프, 앨리스 먼로, 문학동네, 2013
밀어, 김경주, 문학동네, 2012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병률, 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