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 3.0 -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새로운 시장의 도래
필립 코틀러 지음, 안진환 옮김 / 타임비즈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새로운 시장의 도래 

 

『마켓3.0』
필립 코틀러 지음, 안진환 옮김, 타임비즈, 2010

<뉴요커> 수석 칼럼니스트인 켄 올레타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은 대개 두 종류로 나뉜다. 몸을 뒤로 기대는(lean back)사람들이 있는 반면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lean forward) 사람들도 있다. 개인은 물론이고 기업 역시 급변하는 시대에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는 세찬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만다. 물결을 일으키는 자가 될 것인지 물결을 타는 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물결에 휩쓸리는 자가 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마켓 3.0』은 마케팅의 아버지라 불리는 필립 코틀러 교수가 새로운 시장의 판도와 그것을 돌파하는 기업과 개인을 위한 통찰을 제시한다. 경영학, 특히 마케팅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들에게 코틀러 교수는 경외의 대상이다. 그는 <파이낸셜타임즈>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구루 4위에 선정되기도 하였고, 그의 대표작인 『마케팅관리』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함께 <파이낸셜타임즈>가 선정한 역사상 최고의 책 50권에 포함될 정도다.

  마켓3.0은 우리에게 익숙한 규칙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저자는 마켓3.0 시대를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고 규정하며 화려했던 옛시절과 과감히 작별하라고 말한다.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마켓1.0 시대에 기업의 주된 관심사는 제품을 표준화하고 생산비용을 최소화함으로써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있었다. 그를 통해 더 많은 구매를 유도하고 이윤창출의 극대화를 추구했다. 정보화와 함께 열린 마켓2.0 시대는 ‘고객가치창출’로 대변된다. 고객의 수요를 파악하고 고객에게 보다 나은 가치를 제공하기 위한 다양한 마케팅이 등장했다. 고객의 이성(머리)과 감성(가슴)을 모두 감동시키기 위한 노력에 따라 경쟁우위가 갈렸다. 이제 3.0 시장은 감성을 충족시키는 마케팅을 넘어서, 영혼을 감동시키는 마케팅을 요구한다. 3.0 시장들을 리드하는 기업들은 단순히 고객 만족과 이익 실현을 넘어서 좀 더 큰 미션과 비전, 가치를 통해 세상에 기여하고자 한다. 소비자 역시 기업이 제공하는 가치에 대해 수용자 입장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를 투영할 대상을 직접 찾아나서는 능동적인 참여자로 변화했다. 그러다보니 고객 중심의 마케팅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고객과 함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전의 마켓2.0과는 다른 고객가치 창출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 마켓 3.0이 도래했다.

코틀러는 한 인터뷰에서 마케팅의 진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설명했다. “초창기의 마케팅은 소비자의 생각(mind)에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우리 회사 세제의 세탁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강조하는 식이다. 고객이 합리적이라면 품질 좋은 세제를 산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마케팅 1.0’ 방식이다. 여기서 한발 나아간 ‘마케팅 2.0’은 감성(heart)을 자극하는 방식이다. 이 브랜드의 옷을 입으면 당신도 세련된 패션리더가 될 수 있다는 메시를 던진다. ‘마케팅 3.0’은 궁극의 마케팅으로 사람들의 영혼(spirit)에 호소한다. 환경에 신경쓰고,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이라면 내게 특별한 혜택을 주지 않더라도 그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 소비자들이다. 현명한 기업들은 그런 소비자들에게 다가서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마케팅 3.0’이다.” 

1980년대 중반, 소비자들은 코카콜라라는 브랜드와 그 유명한 비빌 제조 방식에 대해 일종의 감정적인 유대감을 느낄 정도로 미국 대중문화의 일부분이었다. 그런데 1985년에 뉴코크(New Coke)는 출시 된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소비자들의 반발 때문에 시장에서 철수해야 했다. 뉴코크는 이런 유대감을 손상시켰고 소비자들은 이 신제품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스칸다나비아의 디자인가구 브랜드인 이케아(IKEA)도 2009년에 비용 절감을 위해 스타일리시한 기존 공식 서체를 기능성 높은 서체로 바꾸었다. 소비자들은 분노를 표출했고 트위터에는 온갖 억측들이 난무했다. 이 두 사건은 소비자들의 그러한 반발이 단순한 제품 개발 실패 그 이상이라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3.0시장에서는 어느 기업의 특정 브랜드가 성공을 거두고 나면 그 브랜드는 더 이상 그 기업의 것이 아니다. 3.0 시장에서는 사실상 ‘브랜드를 통제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브랜드는 이제 그 기업의 것이 아니고 소비자들의 것이다. 소비자들은 이제 기업의 새로운 오너다.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의 행동을 브랜드 미션과 일치시키는 것 뿐이다.

시장은 이제까지의 양상보다, 그리고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질 것이다. 단언컨대 기업을 포함해, 생존과 번영을 모색하는 모든 이들은 ‘공동창조’와 ‘협력’이라는 키워드를 그 중심에 놓지 않고는 이 변화를 헤쳐 나갈 수 없다. 누가 그렇듯 네트워크와 공존하며 협력하는 법을 가장 빨리 배우느냐에 따라, 향후 비즈니스의 지도가 뒤바뀔 것이다. 이제 ‘제때 월급을 두둑이 주는 회사’라는 이유만으로 일류 인재를 유치할 수 없을지 모른다.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 기업, 그리고 기업가정신은 모두의 심장을 뛰게 하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의미와 가치를 제공해주는 주체,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있다. ‘마켓 3.0’은 우리가 기업하는 방식, 일하는 방식, 창조하고 만들어내는 모든 방식을 바꾸어놓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그 변화의 실체를 그 어떤 필치보다 정교하고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여기다 22쪽에 달하는 꼼꼼한 참고문헌은 신뢰를 더한다. 이 책을 비단 미래경쟁력을 대비하는 기업뿐 아니라 정부, 비정부기구(NGO), 미래의 진로를 고민 중인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자들에게 일독하기를 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끝-(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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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나이스비트 메가트렌드 차이나 -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가는 중국의 8가지 힘
존 나이스비트 & 도리스 나이스비트 지음, 안기순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중국을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 
 

『메가트렌드 차이나』
존 나이스비트ㆍ도리스 나이스비트 지음, 안기순 옮김, 비즈니스북스, 2010
 

존 나이스비트는 앨빈 토플러와 함께 미래학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세계적인 미래학자이다. 1967년 중국 땅을 처음 밟은 후, 43년 동안 100번 넘게 중국을 방문한 ‘중국통’으로 텐진 난카이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나이스비트 중국연구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메가트렌드 차이나』는 나이스비트 부부가 오늘날 중국의 번영을 가져온 비결을 서구인이 아닌 중국인의 시각으로 썼다. 중국의 현재를 가장 정확하게, 중국의 미래를 가장 뚜렷하게 알 수 있는 책으로 꼽힌다. 이 책을 읽다가 작년 글로벌 금융위기때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떠돌던 말이 생각났다. “1949년,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다. 1979년,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다. 1989년, 중국만이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었다. 2009년,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의 탐욕에서 비롯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위기를 중국만이 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지금 중국은 수출 세계 1위, 기업 시가총액 2위, 군사비 2위, GDP 2위로 미국의 턱밑까지 바싹 추격했다. 골드만삭스의 경제학자 짐 오닐은 2030년이면 세계 GDP 순위가 중국 미국 일본 인도 순으로 바뀐다고 예측하고 있다. “중국이 언제 미국을 앞지를까요? 중국이 우리의 직업을 빼앗아 갈까요?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야 할까요?” 이것이 바로 요즘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낙후된 사회체제로 허덕이며 세계 빈국으로 꼽히던 중국이 30년 만에 미국과 함께 G2로 불릴 정도로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한 비결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를 하향식 지도와 상향식 참여의 균형, 중국 특색 사회주의로 안정을 찾은 정치, 국제적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추구하는 대외관계 전략, 자유와 공정성 등 ‘8가지 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는 특히 중국 발전의 원동력이 서구의 ‘수평적 민주주의’와 대비되는 중국식 ‘수직적 민주주의’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개인의 자율과 경쟁을 기반으로 선거를 통해 주기적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서구식 수평적 민주주의와 달리, 중국식 민주주의는 타인과 공동체와의 조화를 중시하는 수직적 민주주의라며 ‘중국모델’을 치켜 세운다. 중국이 공산주의 옷을 입은 자본주의 국가인지, 자본주의 옷을 입은 공산주의 국가인지를 묻는 것은 우문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서구 지식인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서구식 잣대를 들이대며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데 반해, 나이스비트는 중국을 서구의 관점이 아닌 중국인의 시각에서 보라고 누누히 강조한다. 서구식 민주주의는 한 세대가 아닌 수백 년에 걸쳐 성숙되었는데 비해, 중국은 자유와 국민 사회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한 지 불과 30년밖에 안 되었는데도 서구는 중국을 비난한다고 꼬집는다. 유럽이 자유무역을 시작하고 나서 민주적인 시장경제를 수립하기까지 300년이 걸렸고, 미국에서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정책이 폐지되는 데에도 거의 200년이 걸렸음을 상기시킨다. “중국은 천천히 전진할 것이다. 미끄러운 돌다리를 딛고 강을 건널때는 무엇보다 균형을 잡아야 한다. 비록 계속 비틀거릴지는 모르지만, 중국은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서구 지식인들 가운데 드물게 중국 정부로부터 환대를 받는 이유가 짐작된다. 

마지막 부분에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된 3T'(톈안먼 광장, 타이완, 티베트) 등 중국이 당면한 여러 문제에 대한 논쟁거리를 조심스럽게 던져 놓았다. 그러나 저자는 ‘중국 내부자의 시선으로 중국의 변화상을 살펴본다’는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에 몰두한 탓인지 중국 사회의 약점을 다룰 때조차도 한없이 너그럽다. “중국에는 부패가 존재한다.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도 존재한다. 중국에는 의심쩍은 지방정부가 있다. 하지만 직원이 수백 명인 기업에서도 절도, 뇌물 수수, 음모 등을 막을 수 없는데 인구가 13억인 기업이 결함 없이 돌아갈 수 있을까?” 티베트 문제를 언급할 때는 심지어 중국 정부의 대변인같은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중국에서 사람들은 보통 1950년 이전에는 티베트인의 95%가 ‘봉건주의 농노’로 살았다고 본다. 공산당이 지배하기 전의 티베트는 낮은 계급의 사람, 특히 최하층 천민에게 ‘지구상의 지옥’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90% 이상의 티베트 사람들을 농노 제도에서 해방시킨 것만으로도 중국은 이미 티베트를 지배할 도덕적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라는 구절은 선뜻 수긍하기 힘든 대목이다. 지난해 인민일보가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선정 했는데 자칫 중국인에게만 환영받을 책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 
 

일본이 독일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떠올랐던 시기는 1968년이다. 그 무렵 허먼 칸(Kahn)이라는 미래학자가 서기 2000년 일본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2010년 올해, 42년 동안 일본이 누려온 세계 2위 자리는 중국에 넘어간다. 42년 전 미국 추월론에 들떴던 일본은 지금 추락의 길을 걷고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 중심의 판도 재편 역시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극심한 부의 격차와 계층의 분화, 도시와 농촌의 발전 격차 등은 중국 지도부가 안고 있는 최대의 숙제이다. 2030년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 이라는 예언 역시 과잉 예찬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책을 비롯하여 차이나 파워를 다룬 책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중국의 몰락』(고든 창),『중국이라는 거짓말』(기 소르망),『반편이들의 상식』(량원다오) 등 다른 주장을 펼치는 책들을 함께 읽어 중국을 바라보는 균형있는 시각을 갖추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쨌든 중국은 우리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다. 갈수록 커지는 중국의 경제우산 속에서 중국의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대응전략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 중국은 2003년 미국, 2007년 일본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수출국과 수입국으로 떠올랐다. 대(對)중국 교역규모가 미국 및 일본과의 교역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을 정도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중국이 너무 잘돼도 걱정이고, 문제가 생겨도 우려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나이스비트는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비즈니스맨들에게 보다 객관적인 중국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 비즈니스맨들에게 해 주고 싶은 충고는 무었이냐”는 질문에 그는 “중국을 공부해라. 중국인의 시각으로 중국을 봐라. 깊이 알면 알 수록 중국은 거대한 기회의 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중국은 위협이 아닌 기회다”라고 답했다. 저자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중국을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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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즐거움
위치우위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이다미디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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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색이 드리우는 인생의 각별한 무늬  
 

『사색의 즐거움』
위치우위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이다미디어, 2010

‘증정’ 또는 ‘기증’이라는 스탬프가 찍힌 책들은 처음부터 내 눈으로 찍은 책들이 아니어서 그런지 대개는 읽는 순서에서 밀리거나 거의 안 읽혀지기 일쑤다. 그러나 최근에 받아본 위치우이(余秋雨)의『사색의 즐거움』은 사정이 다르다. 중국 공안의 단속망에 걸린 유흥업소 여종업원의 핸드백에서도 립스틱과 함께 그의 책이 나와 ‘문화립스틱’이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위치우위 신드롬’을 일으킨 저자에 대한 호기심이 앞섰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320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 앞에서 ‘思索’에 앞서 ‘死色’이 먼저 되었다) 

위치우이는 중국의 새뮤얼 존슨 또는 현대판 루쉰으로 불리는 유명한 문화사학자이자 예술평론가이다. 이 책은 그가 독서를 통해 얻은 사상, 철학, 인생관을 짧은 명상록 형식으로 적은 글모음이다. 원래 제목은 『인생철언(人生哲言)』이라는데 제목 만으로는 청소년 시절에 연애편지 채우느라 찾아보던 격언이나 명구 엮음집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보고, 현재 역사의 한가운데를 여행하면서 역사속에서 길을 묻고 길에서 느낀 생각의 갈피들을 기록해 놓았다. 저자는 향기로운 역사나 문화 이외에 폐허와 유배지, 또는 쓸쓸한 변방을 거니는 고독한 발걸음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내 마음이 가장 많이 끌리는 곳은 폐허를 여행하는 것이다. 석양 아래 부서진 기둥, 우거진 잡풀 사이 잘라진 비석에 익숙해지면 트렁크 속 역사책에 의혹의 눈길이 닿을 수밖에 없다. 폐허는 우리를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 속으로 인도한다. 폐허가 없다면 어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어제가 없다면 오늘과 내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폐허는 한 편의 교과서로, 우리에게 지리를 역사로 탈바꿈시켜준다. 폐허는 과정이다. 인생은 옛 폐허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폐허로 나아간다.” (58-60쪽)
 

이 문장을 읽다가 실크로드를 여행했던 어느 해 여름을 떠올렸다. 트루판 동쪽 끝에 있는 고창국의 옛 도시터인 ‘고창고성’을 당나귀마차에 의지해 찾아갔다. 부서진 기와와 벽돌, 붉은 흙덩어리들이 황폐한 들풀 사이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8월의 폭염 아래서 난 한참을 그렇게 정물처럼 서 있었다. 폐허를 바라보며 세상을 기어이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애틋하고 장렬한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저자는 이미『중국문화답사기』를 통해 유려하면서도 장중하고 서정적인 필력을 자랑한 바 있는데 이 책에서도 빼어난 글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짧은 기행 감상문에도 향기로운 역사, 운치 서린 사유, 깊고 깊은 삶의 내음이 얼마나 가득 담겨져 있는지, 당장 짐을 꾸려 떠나고 싶은 충동을 내내 억눌러야 했다.

“중국에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 참으로 많지만, 나는 유독 쑤저우(蘇州)에서 진정한 휴식을 얻을 수 있다. 이곳은 물이 맑고, 아름다운 복사꽃에, 창가는 매혹적이다. 주전부리가 너무 달고, 여인은 너무 곱고, 다관이 너무 많고, 서점이 너무 즐비하고, 서법은 지나치게 유려하다.” (115쪽)

“위대함이라는 찬사를 받을 도시는 로마이다. 로마는 모두 예술 거장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고, 모든 설계는 주위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공간적으로 전혀 어색함이 없으니, 다른 도시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눈치껏 위대함이라는 단어를 비껴갈 수밖에 없다.” (131쪽)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보면 그래도 가장 건전한 도시는 파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곳은 다른 도시의 장점과 단점을 거의 모두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장단점을 최대한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 도시에서 잠시 동안이라도 살 수 있다면 생명까지 자유로워질 것 같다” (136-137쪽) 

그의 글은 역사와 인물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내밀한 사유공간과 직접 연결된다. 여행을 하며 생각의 길을 걷다보면 예술이 보이고, 역사가 보이고, 어느덧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며 삶의 길을 묻고 대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문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동서고금의 역사·문화·예술 전반을 누비고 다니는 그의 글솜씨를 쫒아가다 보면 막혔던 ‘사로(思路)’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든다. 

“비극이 없다면 비장함도 없고, 비장함이 없다면 숭고함도 없다. 설봉이 위대한 까닭은 산등성이에 등산가의 시신이 묻혀있기 때문이다. 대해가 위대한 까닭은 곳곳에 선체의 잔해가 떠돌기 때문이다. 인생이 위대한 까닭은 백발, 이별, 어찌할 수 없는 실패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63쪽)

“중년이 가장 쉽게 저지르는 오류는 바로 모든 희망을 노년에 기탁하는 것이다. 지금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절제하며, 엄숙하고 정중하게 그리고 숨죽이며 인내하는 것은 모두 부를 축적하여 존엄하고 자유로운 노년을 쟁취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년에 무능한 사람은 결국 노년이 되어서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200쪽)

 

“사람은 평생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부류의 우정, 즉 넓은 의미의 우정과 엄격한 의미의 우정이 있어야 한다. 전자가 없으면 불편하고 불안할 것이며, 후자가 없으면 깊이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 (295쪽)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인문학적인 통찰과 상상력으로 덧칠한 아포리즘 형식의 짧은 산문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처음부터 읽어도 되지만 순서없이 어느장을 펼쳐도 무관하다. 내가 읽은 책에는 특히 3장(역사의 폐허를 거닐다), 6장(낯선 땅으로의 먼 여행), 8장(삶을 순례하다!)에 무수히 많은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쓴 사람의 사색의 기록이 책에서 걸어나와, 읽는 이의 삶에 각별한 무늬를 드리우는 소중한 증거다. -끝-(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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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브랜슨 비즈니스 발가벗기기
리처드 브랜슨 지음, 박슬라 옮김 / 리더스북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괴짜 경영인의 세상을 바꾼 무한도전기 

『비즈니스 발가벗기기』

리처드 브랜슨 지음, 박슬라 옮김, 리더스북, 2010

“그는 아내와 영국 버진 제도의 섬에 놀러갔다가 다음 여행지인 푸에르토리코로 가기 위해 공항에 갔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비행기가 결항이 됐고, 승객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가 나서서 2,000달러에 비행기 한 대를 전세냈다. 사람 숫자대로 2,000달러를 나누었더니 한 사람당 39달러면 충분하다는 계산이 섰다. 그는 큰 칠판을 빌려서 이렇게 썼다. ‘버진 항공사 : 푸에르토리코행 편도 39달러’ 이것이 버진 애틀래틱 항공의 출발이었다. 휴가 중에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를 에피소드로 남기지 않고, 새로운 사업으로까지 연결해낸 것이다. 오늘날 버진 항공은 전 세계 30여 곳에 취항하는 세계적인 항공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이쯤이면 그가 누구인지 눈치를 채게 마련이다. 맨손으로 회사를 창업해 쇼걸에서 우주여행까지 300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영국 버진그룹의 창업자이자 회장인 리처드 브랜슨이다. 그는 난독증으로 글과 제무제표를 읽지 못할 만큼 경영자로서 천성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유분방하고 기발한 괴짜 경영인은 특유의 도전과 모험정신으로 기존 경영 이론의 상식과 틀을 통쾌하게 깨뜨렸다. 마케팅의 아버지라 불리는 필립 코틀러는 그를 이시대 최고의 마케터로 꼽았고 예수, 데이비드 베컴을 제치고 영국인이 가장 닮고 싶은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버진 콜라를 홍보하기 위해 뉴욕의 타임스퀘어에 영국 탱크를 몰고 들어가 코카콜라 간판에 한바탕 가짜 폭격을 퍼붓는 퍼포먼스를 감행한 일화로 유명하다. 코카콜라를 상대로 청량음료 전쟁을 벌인 이 미친 짓은 가장 큰 실수였지만 동시에 미국에서 버진이라는 이름의 위상을 높인 사건이기도 했다. 버진 모바일의 대담한 출범행사 아이디어도 그에 못지 않았다. 런던의 중심지인 드라팔가 광장에서 일곱 명의 매력적인 여성들과 함께 모두들 국부에 올려놓은 오렌지색 쿠션을 제외하면 완전히 발가벗은 채 버진 모바일의 탄생을 발표했다. 슬로건은 ‘지금 보시는 그대로 해드립니다’였다. 런던 경찰이 출동했음은 물론이다.

 

책 제목이 『비즈니스 발가벗기기』다. 40여 년 동안 리처드 브랜슨과 그의 동료들이 비즈니스 최전선에서 부딪치고 좌충우돌하며 겪은 성공담과 실수담으로 가득하다. 버진그룹이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지 요란법석하게 떠들기보다 버진 비즈니스를 발가벗겨 버진 회사들이 실제로 어떤 존재들인지를 기록한 책이다. 브랜슨이 사람, 브랜드, 실행, 좌절, 혁신, 기업가정신과 리더십, 사회적 책임을 7가지 성공 원칙으로 꼽으며 흥미있는 사례를 곁들여 들려준다. 그는 선천적인 난독증으로 성적은 거의 꼴찌였다. 학업이 어려워지자 고등학교를 아예 그만둬버렸다. 그러나 돈벌이에는 천부적인 감각과 재능이 있었는지 15세때 학생 대상 잡지 <스튜던트>를 창간하며 어린 나이답지 않은 기발한 발상과 대담한 기획으로 사업가적 자질을 발휘한다. 믹 재거, 존 레논과 같은 당대 하이틴의 우상이자 일류 스타를 인터뷰하는 성과를 올렸고 급기야 유명 인사들이 스스로 찾아오도록 만들었다. 그뒤 친구들과 음반 우편 할인 판매를 시작하며 회사 이름을 처음 사업을 한다는 뜻에서 ‘버진Virgin'으로 정했다. 이렇게 해서 ‘처녀’를 연상하는 버진이라는 외설적인 브랜드가 탄생했다. ‘커피’가 아니라 ‘문화’를 판 스타벅스가 나오기도 전에 브랜슨은 이미 ‘음반’이 아니라 ‘즐거움’을 판다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었다. 그가 현재 벌이고 있는 일 중에는 세계 최초의 민간 우주여객선 사업도 있다. 몇 분간의 무중력 비행과 기념촬영 등 우주 비행의 감각을 느끼는 이 여행의 요금은 무려 20만 달러(약2억8천만원)라고 한다. 3〜5시간 걸리는 여행으로는 세계 최고가다. 그런데도 스티븐 호킹, 패리스 힐튼, 마돈나 등 이미 각국에서 8만5천명 정도가 탑승 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상력의 임계치를 뛰어넘는 그의 시장 창조력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비즈니스란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무언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어떤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즈니스로 돈을 벌 수 있느냐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자부심을 안겨줄 수 있느냐이다.”

 

그는 무엇보다 비즈니스의 핵심으로 사람의 중요성을 내세운다. “사람을 돈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회사를 떠나는 이유는 대체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시당한다거나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회사 분위기에 불만이 없는데도 월급을 더 많이 주는 일자리를 찾아 구인란을 뒤지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인생은 한 번 뿐이며, 우리는 그 시간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낸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는 것이 중요하다.” 식물은 물을 줘야 잘 자라고 사람은 격려를 받아야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왜 인재가 떠나는지, 직원에게 월급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고민하는 경영자라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대목이다. “나를 아침에 일어나게 하는 것은 고객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하는 아이디어다. 내 원동력은 사람들에게 즐거운 경험과 시간을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브랜슨은 버진이 세계에서 가장 큰 브랜드가 되려고 하는것 보다는 존경을 받는 쪽이 훨씬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실천에 옮겼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버진 브랜드에 환호하는지 알만하다.

 

이 책은 비즈니스 기법만 따로 뚝 떼어낸 책이 아니다. 기업가정신을 일깨우고 비즈니스 현장에서 고동치는 심장의 소리를 그대로 들려주고 있다. “요즈음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도 아늑한 경향이 있다. 부모와 선생들은 그들의 삶을 편한 길로 인도한다. 삶의 지도는 뭐랄까, 모든 것이 너무 ‘평탄하다’. 대학에 가서 강의를 듣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주택 담보 대출을 받고,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를 만난다. 그것은 견고한 삶이다. 어떤 면에서는 좋은 삶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위험을 감수해본적이 언제인가? 애당초 시도하지 않는 것이 진짜 실패다. 시도도 하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진짜 실패자다. 나는 쉽게 성공한 사람보다 시도를 하다 꺽인 이들로부터 더욱 많은 것을 배운다.” 물론 경영자나 기업인이 브랜슨을 따라하며 비즈니스와 관련된 통찰과 팁을 얻을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을 차라리 젊은이들에게 더 권하고 싶다. 지금 자신이 처한 곳이 비즈니스의 세계와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학생들이라면 더더욱 이 책을 읽히고 싶다. 재미와 도전을 스펙쌓기보다 앞에 놓을줄 아는 지혜를 갖추고 세상에 감추어진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아직 아무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텅 빈 캔퍼스를 가졌기에 그 위에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 무엇이든 말이다. 책을 덮을 때 쯤이면 리처드 브랜슨과 그의 동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지 모른다. “당신은 이미 비즈니스의 한복판에 서있음을 잊지 말라고!” -끝- 
*기획회의 271호(10.5.4) 기고,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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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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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정치를 만나다 

『옹정제』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이산, 2001

 

옹정제는 강희제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45세 때 강희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이후 1735년 사망할 때까지 13년 동안 중국을 다스렸다. 아버지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의 재위기간이 각각 61년이었던 것에 비하면 한참 짧은 기간이지만, 옹정제는 그 어느 황제보다도 많은 일을 했으며 청조의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여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일본 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옹정제의 전기이자 근세 중국의 관료제, 재정, 재판, 풍속을 이해하는 역사서인『옹정제』를 통해 ‘중국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독재군주’였던 옹정제를 박진감 넘치게 그려냈다.

 

그동안 청조의 기틀을 다진 강희시대나 청조의 전성기를 구가한 건륭시대는 높이 평가되었지만, 옹정시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과소평가 된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옹정시대 13년이 있었기에 청왕조는 건륭시대에 최대의 번영을 맞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미야자키는 무엇보다도 옹정제의 정치력을 높이 평가한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처럼 덕망 높은 유교 군주로 추앙 받지도 않고, 화려한 대외원정으로 전 아시아에 ‘청조의 평화’를 각인시켰던 건륭제처럼 화려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만주족의 100배가 넘는 중국인과 방대한 중국 대륙을 가장 완벽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통치했다. 옹정제의 정치는 한마디로 선의에 넘치는 ‘악의의 정치’였다.

 

대표적인 것이 강희제가 만든 주접제도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곳곳에 자신의 밀정을 파견하고 관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게 했으며, 민심의 동향을 살피는 방법이다. 아울러 지방관들에게도 주비유지라는 붉은 붓으로 쓴 친필서한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지방관들을 일일이 점검했다. 그는 요즘말로 하면 워커홀릭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 밤 10∼12시까지 쉴새없이 일했다. 강희제는 종종 사냥도 나가고 또 장기간 지방을 순행하기도 했지만, 옹정제는 재위 13년 동안 단 한번도 베이징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저자가 갖고 있는 옹정제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과 호의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살아있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생생한 묘사와 구체적인 사실이 엮어내는 긴박함은 이 책을 역사에 길이 남을 10대 전기의 하나로 높이 평가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옹정제를 읽다가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정조다. 비록 시대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옹정제(1678〜1735)가 근세 중국의 대표적인 獨裁君主로 불리는 반면, 정조(1752〜1800)는 조선 후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불러 온 改革君主 또는 好學君主로 알려져 있다. 서로 다른 부분이 많지만 어느 면에서는 흡사한 구석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둘이 지금 만나 가상으로 대담을 나눈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상상이 들었다.

 

옹정제 : 내가 보위에 오르는 과정이 얼마나 신산했는지 들어 아실테지요. 부왕인 강희제께서는 덕망 높은 유교 군주이면서 다른 면으로도 얼마나 부지런하셨던지 무려 일흔명에 달하는 자녀를 두었고, 그 중에서 황자 숫자만도 서른다섯이나 되었답니다. 처음에 이이아거 형님이 황태자로 책봉되었지만 황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로 인해 결국 청조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황태자이며 두 번 황태자가 되었다가 두 번 폐위된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지요. 우여곡절 끝에 사이거인 내가 왕위에 올랐지만 이런 일을 두 번 다시 자식들에게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아 고안해 낸 것이 바로 미리 후계자를 정해 두되 행실이나 인물됨을 지켜보면서 얼마든지 바꿀수 있는 태자 밀건법(密建法)이라고 불리는 방식이지요. 내가 만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참 훌륭한 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그나저나 내 들으니 작년 2월에 대왕이 중신이었던 심환지에게 보낸 친필 어찰 297건이 새로 발견되어 세간의 비상한 주목을 받더군요. 대왕과 정치적 입장이 상반되는 노론 벽파의 중추적 인물에게 私信이면서 密書를 보내는 일종의 막후정치, 그거 솔직히 내 통치술을 따라한 것 아니요?

 

정조 : (하하) 네! 맞습니다. 맞고요. 사실 친부인 사도세자가 조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갖혀 죽음을 당한 사실로 인해서 입지가 매우 곤혹스럽고 위태로웠습니다. 내 가 구상한 정치운영 방식에 반대하는 세력을 견제하고 탕평정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심환지와 같은 노련한 정치력이 필요했지요. 느리게는 몇 달에 한 번, 빠르게는 하루에 4번이나 편지를 보내 민감한 정치현안을 막후에서 조정하고 정국을 처리해 나갔습니다.

 

옹정제 : 원래 100만도 되지 않는 만주인이 그 100배도 더 넘는 중국인 위에 서서 청조를 건설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밀정정치를 쓸 수 밖에 없었지요.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주접(奏摺)이라는 형식의 문서로 직접 보고하게 하고, 주비유지라는 붉은 붓으로 쓴 친필서한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지방관들을 점검한 것이 대표적인 방법이라오. 어떤때는 나도 주비유지에 “바보는 고칠 수 없다는 말은 바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금수라도 너보다는 낫다.” “양심을 뭉개 버리고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 소인배.” 등 원색적인 욕설과 온갖 비난을 퍼부었는데 대왕도 크게 다르지 않더이다. ‘참으로 호로자식’ ‘주둥아리를 놀리려고 한다’ 등과 같은 거친 표현이 어찰에 심심찮게 나오는걸 보면 말이오.

 

정조 : 대왕께서도 마흔다섯에 대임을 지고 천자의 자리에 오른후 13년 재위기간 동안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천자는 일일만기(一日萬機), 곧 하루에 1만 건의 사무를 처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왕이라는 자리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정말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바쁜 자리지요.

 

옹정제 : 그렇지요. 보통 밤 열시나 열두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네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 정무를 보는대도 늘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으니까요. 신하들을 보세요. 그들은 벼슬살이를 할 만하면 벼슬을 살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 두지 않습니까. 늙으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손들을 돌보면서 유유자적하게 보낼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같은 군주들은 평생토록 부지런히 수고하고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보면 우리같은 3D업종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 후대에서도 그걸 서로 하겠다고 저 난리들이니 원. (쯧쯧)

 

정조 : 지금 사람들은 그걸 워커홀릭이라고 말합니다. 조기사망의 지름길이지요. 그러나 대왕은 57세, 나도 48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장수한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서로 공통점이 많은것 같습니다. 선대왕들의 긴 재위기간 끝에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보위에 오른 것이나 선호했던 통치술도 그렇고 말입니다.

 

옹정제 : 그러게 말입니다. 어쨌거나 군주로서의 내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지는 일은 하지 않으리.” -끝- (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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