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지, 정치를 만나다 

『옹정제』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이산, 2001

 

옹정제는 강희제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45세 때 강희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이후 1735년 사망할 때까지 13년 동안 중국을 다스렸다. 아버지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의 재위기간이 각각 61년이었던 것에 비하면 한참 짧은 기간이지만, 옹정제는 그 어느 황제보다도 많은 일을 했으며 청조의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여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일본 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옹정제의 전기이자 근세 중국의 관료제, 재정, 재판, 풍속을 이해하는 역사서인『옹정제』를 통해 ‘중국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독재군주’였던 옹정제를 박진감 넘치게 그려냈다.

 

그동안 청조의 기틀을 다진 강희시대나 청조의 전성기를 구가한 건륭시대는 높이 평가되었지만, 옹정시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과소평가 된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옹정시대 13년이 있었기에 청왕조는 건륭시대에 최대의 번영을 맞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미야자키는 무엇보다도 옹정제의 정치력을 높이 평가한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처럼 덕망 높은 유교 군주로 추앙 받지도 않고, 화려한 대외원정으로 전 아시아에 ‘청조의 평화’를 각인시켰던 건륭제처럼 화려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만주족의 100배가 넘는 중국인과 방대한 중국 대륙을 가장 완벽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통치했다. 옹정제의 정치는 한마디로 선의에 넘치는 ‘악의의 정치’였다.

 

대표적인 것이 강희제가 만든 주접제도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곳곳에 자신의 밀정을 파견하고 관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게 했으며, 민심의 동향을 살피는 방법이다. 아울러 지방관들에게도 주비유지라는 붉은 붓으로 쓴 친필서한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지방관들을 일일이 점검했다. 그는 요즘말로 하면 워커홀릭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 밤 10∼12시까지 쉴새없이 일했다. 강희제는 종종 사냥도 나가고 또 장기간 지방을 순행하기도 했지만, 옹정제는 재위 13년 동안 단 한번도 베이징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저자가 갖고 있는 옹정제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과 호의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살아있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생생한 묘사와 구체적인 사실이 엮어내는 긴박함은 이 책을 역사에 길이 남을 10대 전기의 하나로 높이 평가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옹정제를 읽다가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정조다. 비록 시대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옹정제(1678〜1735)가 근세 중국의 대표적인 獨裁君主로 불리는 반면, 정조(1752〜1800)는 조선 후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불러 온 改革君主 또는 好學君主로 알려져 있다. 서로 다른 부분이 많지만 어느 면에서는 흡사한 구석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둘이 지금 만나 가상으로 대담을 나눈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상상이 들었다.

 

옹정제 : 내가 보위에 오르는 과정이 얼마나 신산했는지 들어 아실테지요. 부왕인 강희제께서는 덕망 높은 유교 군주이면서 다른 면으로도 얼마나 부지런하셨던지 무려 일흔명에 달하는 자녀를 두었고, 그 중에서 황자 숫자만도 서른다섯이나 되었답니다. 처음에 이이아거 형님이 황태자로 책봉되었지만 황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로 인해 결국 청조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황태자이며 두 번 황태자가 되었다가 두 번 폐위된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지요. 우여곡절 끝에 사이거인 내가 왕위에 올랐지만 이런 일을 두 번 다시 자식들에게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아 고안해 낸 것이 바로 미리 후계자를 정해 두되 행실이나 인물됨을 지켜보면서 얼마든지 바꿀수 있는 태자 밀건법(密建法)이라고 불리는 방식이지요. 내가 만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참 훌륭한 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그나저나 내 들으니 작년 2월에 대왕이 중신이었던 심환지에게 보낸 친필 어찰 297건이 새로 발견되어 세간의 비상한 주목을 받더군요. 대왕과 정치적 입장이 상반되는 노론 벽파의 중추적 인물에게 私信이면서 密書를 보내는 일종의 막후정치, 그거 솔직히 내 통치술을 따라한 것 아니요?

 

정조 : (하하) 네! 맞습니다. 맞고요. 사실 친부인 사도세자가 조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갖혀 죽음을 당한 사실로 인해서 입지가 매우 곤혹스럽고 위태로웠습니다. 내 가 구상한 정치운영 방식에 반대하는 세력을 견제하고 탕평정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심환지와 같은 노련한 정치력이 필요했지요. 느리게는 몇 달에 한 번, 빠르게는 하루에 4번이나 편지를 보내 민감한 정치현안을 막후에서 조정하고 정국을 처리해 나갔습니다.

 

옹정제 : 원래 100만도 되지 않는 만주인이 그 100배도 더 넘는 중국인 위에 서서 청조를 건설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밀정정치를 쓸 수 밖에 없었지요.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주접(奏摺)이라는 형식의 문서로 직접 보고하게 하고, 주비유지라는 붉은 붓으로 쓴 친필서한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지방관들을 점검한 것이 대표적인 방법이라오. 어떤때는 나도 주비유지에 “바보는 고칠 수 없다는 말은 바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금수라도 너보다는 낫다.” “양심을 뭉개 버리고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 소인배.” 등 원색적인 욕설과 온갖 비난을 퍼부었는데 대왕도 크게 다르지 않더이다. ‘참으로 호로자식’ ‘주둥아리를 놀리려고 한다’ 등과 같은 거친 표현이 어찰에 심심찮게 나오는걸 보면 말이오.

 

정조 : 대왕께서도 마흔다섯에 대임을 지고 천자의 자리에 오른후 13년 재위기간 동안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천자는 일일만기(一日萬機), 곧 하루에 1만 건의 사무를 처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왕이라는 자리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정말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바쁜 자리지요.

 

옹정제 : 그렇지요. 보통 밤 열시나 열두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네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 정무를 보는대도 늘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으니까요. 신하들을 보세요. 그들은 벼슬살이를 할 만하면 벼슬을 살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 두지 않습니까. 늙으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손들을 돌보면서 유유자적하게 보낼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같은 군주들은 평생토록 부지런히 수고하고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보면 우리같은 3D업종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 후대에서도 그걸 서로 하겠다고 저 난리들이니 원. (쯧쯧)

 

정조 : 지금 사람들은 그걸 워커홀릭이라고 말합니다. 조기사망의 지름길이지요. 그러나 대왕은 57세, 나도 48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장수한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서로 공통점이 많은것 같습니다. 선대왕들의 긴 재위기간 끝에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보위에 오른 것이나 선호했던 통치술도 그렇고 말입니다.

 

옹정제 : 그러게 말입니다. 어쨌거나 군주로서의 내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지는 일은 하지 않으리.” -끝- (20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