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즐거움
위치우위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이다미디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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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색이 드리우는 인생의 각별한 무늬  
 

『사색의 즐거움』
위치우위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이다미디어, 2010

‘증정’ 또는 ‘기증’이라는 스탬프가 찍힌 책들은 처음부터 내 눈으로 찍은 책들이 아니어서 그런지 대개는 읽는 순서에서 밀리거나 거의 안 읽혀지기 일쑤다. 그러나 최근에 받아본 위치우이(余秋雨)의『사색의 즐거움』은 사정이 다르다. 중국 공안의 단속망에 걸린 유흥업소 여종업원의 핸드백에서도 립스틱과 함께 그의 책이 나와 ‘문화립스틱’이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위치우위 신드롬’을 일으킨 저자에 대한 호기심이 앞섰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320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 앞에서 ‘思索’에 앞서 ‘死色’이 먼저 되었다) 

위치우이는 중국의 새뮤얼 존슨 또는 현대판 루쉰으로 불리는 유명한 문화사학자이자 예술평론가이다. 이 책은 그가 독서를 통해 얻은 사상, 철학, 인생관을 짧은 명상록 형식으로 적은 글모음이다. 원래 제목은 『인생철언(人生哲言)』이라는데 제목 만으로는 청소년 시절에 연애편지 채우느라 찾아보던 격언이나 명구 엮음집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보고, 현재 역사의 한가운데를 여행하면서 역사속에서 길을 묻고 길에서 느낀 생각의 갈피들을 기록해 놓았다. 저자는 향기로운 역사나 문화 이외에 폐허와 유배지, 또는 쓸쓸한 변방을 거니는 고독한 발걸음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내 마음이 가장 많이 끌리는 곳은 폐허를 여행하는 것이다. 석양 아래 부서진 기둥, 우거진 잡풀 사이 잘라진 비석에 익숙해지면 트렁크 속 역사책에 의혹의 눈길이 닿을 수밖에 없다. 폐허는 우리를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 속으로 인도한다. 폐허가 없다면 어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어제가 없다면 오늘과 내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폐허는 한 편의 교과서로, 우리에게 지리를 역사로 탈바꿈시켜준다. 폐허는 과정이다. 인생은 옛 폐허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폐허로 나아간다.” (58-60쪽)
 

이 문장을 읽다가 실크로드를 여행했던 어느 해 여름을 떠올렸다. 트루판 동쪽 끝에 있는 고창국의 옛 도시터인 ‘고창고성’을 당나귀마차에 의지해 찾아갔다. 부서진 기와와 벽돌, 붉은 흙덩어리들이 황폐한 들풀 사이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8월의 폭염 아래서 난 한참을 그렇게 정물처럼 서 있었다. 폐허를 바라보며 세상을 기어이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애틋하고 장렬한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저자는 이미『중국문화답사기』를 통해 유려하면서도 장중하고 서정적인 필력을 자랑한 바 있는데 이 책에서도 빼어난 글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짧은 기행 감상문에도 향기로운 역사, 운치 서린 사유, 깊고 깊은 삶의 내음이 얼마나 가득 담겨져 있는지, 당장 짐을 꾸려 떠나고 싶은 충동을 내내 억눌러야 했다.

“중국에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 참으로 많지만, 나는 유독 쑤저우(蘇州)에서 진정한 휴식을 얻을 수 있다. 이곳은 물이 맑고, 아름다운 복사꽃에, 창가는 매혹적이다. 주전부리가 너무 달고, 여인은 너무 곱고, 다관이 너무 많고, 서점이 너무 즐비하고, 서법은 지나치게 유려하다.” (115쪽)

“위대함이라는 찬사를 받을 도시는 로마이다. 로마는 모두 예술 거장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고, 모든 설계는 주위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공간적으로 전혀 어색함이 없으니, 다른 도시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눈치껏 위대함이라는 단어를 비껴갈 수밖에 없다.” (131쪽)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보면 그래도 가장 건전한 도시는 파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곳은 다른 도시의 장점과 단점을 거의 모두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장단점을 최대한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 도시에서 잠시 동안이라도 살 수 있다면 생명까지 자유로워질 것 같다” (136-137쪽) 

그의 글은 역사와 인물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내밀한 사유공간과 직접 연결된다. 여행을 하며 생각의 길을 걷다보면 예술이 보이고, 역사가 보이고, 어느덧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며 삶의 길을 묻고 대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문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동서고금의 역사·문화·예술 전반을 누비고 다니는 그의 글솜씨를 쫒아가다 보면 막혔던 ‘사로(思路)’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든다. 

“비극이 없다면 비장함도 없고, 비장함이 없다면 숭고함도 없다. 설봉이 위대한 까닭은 산등성이에 등산가의 시신이 묻혀있기 때문이다. 대해가 위대한 까닭은 곳곳에 선체의 잔해가 떠돌기 때문이다. 인생이 위대한 까닭은 백발, 이별, 어찌할 수 없는 실패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63쪽)

“중년이 가장 쉽게 저지르는 오류는 바로 모든 희망을 노년에 기탁하는 것이다. 지금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절제하며, 엄숙하고 정중하게 그리고 숨죽이며 인내하는 것은 모두 부를 축적하여 존엄하고 자유로운 노년을 쟁취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년에 무능한 사람은 결국 노년이 되어서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200쪽)

 

“사람은 평생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부류의 우정, 즉 넓은 의미의 우정과 엄격한 의미의 우정이 있어야 한다. 전자가 없으면 불편하고 불안할 것이며, 후자가 없으면 깊이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 (295쪽)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인문학적인 통찰과 상상력으로 덧칠한 아포리즘 형식의 짧은 산문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처음부터 읽어도 되지만 순서없이 어느장을 펼쳐도 무관하다. 내가 읽은 책에는 특히 3장(역사의 폐허를 거닐다), 6장(낯선 땅으로의 먼 여행), 8장(삶을 순례하다!)에 무수히 많은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쓴 사람의 사색의 기록이 책에서 걸어나와, 읽는 이의 삶에 각별한 무늬를 드리우는 소중한 증거다. -끝-(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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