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객 세계문학의 숲 8
콘라드 죄르지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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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국가의 낯선 작가와의 만남은 항상 기대와 설렘을 동반 한다. 하지만 결과가 항상 좋을 수 만은 없는 법이다. 헝가리 작가 콘라드 죄르지의 [방문객]은 아동 복지과에 근무하는 T의 자의식의 세계를 통하여 인간 세계의 오로지 어둡고 부정적인 조각에 현미경을 들이 대어 고난, 분노, 고통과 비명의 큰 퍼즐을 맞춰가는 지리하고 우울한 여정을 그려 간다. 하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쉼표로 토해지는 작가의 정서와 감정을 소화하기에는 나의 호흡과 맥박은 그리 건강하지 못하다. 감정의 폭발도 반복되면 무디어지고 충격은 일상화 된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는 강약의 조절이 필요하고 문학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요즘 계속해서 작품들과 궁합이 좋지 않다. 거기다가 날씨까지 더우니 책 읽기가 녹녹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에어컨 틀어 놓고 문학 책을 읽기에는 사는 것도 뭐 그러니.. 참 서글픈 모양새다. 하지만 아이가 옆에서 열심히 Why 책을 읽고 있으니 나도 분발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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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성경 How To Read 시리즈
리처드 할로웨이 지음, 주원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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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시 이 동네하고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성직자이면서도 신학적인 부분에만 치우치지 않고 인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성경을 해석하고 있어 좋은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역자의 성경투 해석이나 역자 후기에서의 너무나 종교적인 문체가 눈에 거슬렸다. 물론 내가 교인이었다면 더 반가웠겠지만 이 책의 목적은 인문학적인 지식의 산물로서의 성경이지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성경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이 시리즈에서 성경은 빠져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제대로 읽고 싶어도 왜 성경은 그렇게 얇은 종이에, 글씨도 그렇게 작고, 특히 그 어색하고 늘어지는 고어체 문장들 - 물론 예수와 하나님의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 만 고집하는 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믿음이 아닌 독서의 대상으로서 성경은 독자들에게 매우 불친절한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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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두 편을 읽었다. 찰스 램의 [굴뚝 청소부 예찬]과 밀란 쿤데라의 [만남]이다.

[굴뚝 청소부 예찬]이 소소한 일상 생활에 대한 기억 및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에세이라면 [만남]은 작가가 프랑스에서 지식인들과의 우연적인 만남과 대담을 통해 문학과 예술의 현대성의 철학적인 사유에 대한 비평 에세이에 가깝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에세이는 나와 잘 맞지 않는다. 에세이는 저자의 타자 그 것이 사소한 일상사에 관한 명상이든 예술과 문학에 관한 철학적 사유이든 상관 없이 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주가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운명을 가진 문학 장르로 독자가 이에 공감하지 못할 경우 심각한 부조화를 피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찰스 램은 [굴뚝 청소부 예찬] 구석구석 마다 그리스 신화와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있으나 나에게는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전혀 울림이 없는 어느 지식인의 자기자랑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굴뚝 청소부 예찬]에서 두 장의 리포트 과제를 위해 한 장 분량의 내용을 글자 크기나 간격을 조절하는 꼼수로 늘려 보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밀란 쿤데라의 [만남]은 여러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의 예술적 비평과 소설이 가지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깊은 사고를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그가 거론하는 작가들의 대부분을 나는 알지 못하며 그러므로 그의 비평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밥에 김치만 먹다가 갑자기 프랑스 풀코스 요리를 먹으려고 하니 영 식욕이 나지 않고 일단 들어간 음식이 소화되지 않는 꼴이다.

 

그리고 위 두편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격려와 위로' 한 답시고 요즘 쏟아져 나오고 있는 에세이들이 참 불편하고 불만이다. 워낙 그런 부류의 책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이 적절한 처사일지 모르지만 꼭 이말만은 하고 싶다. 개인적인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 정, 모든 인생의 상처는 몇 줄의 아름다운 은유나 그럴싸한 아포리즘 따위로 치유될 수 없다. 이런 부류의 책들을 잠시 휴식하는 차원에서 물 한 모금 먹는 정도 이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위험하며 경계할 일이다. 

 

요즘 게을러져서 책도 읽기 귀찮고 읽은 책도 영 별로다. 장마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슬럼프가 강림하신 것 같다. 그래서 기분 전환 겸 책 몇 권을 아낌없이 질러 버렸다. 도착한지 이틀이나 됐지만 아직 열어 보지도 않았다. 다른 박스들이 기다리고 있어 주저하고 있지만 마냥 저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하지만 급할 것은 없다. 이 번에 다시 한번 느끼지 않았나? 내 분수와 능력에 맞지 않는 과욕은 자존심만 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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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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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홍 [생사의 장]에 이후에 만나는 중국 대륙의 소설, 바진의 [차가운 밤]이다.

이 소설의 주요 등장 인물은 주인공 왕원쉬안, 그의 아내 청수성,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아들 샤오쉬안이다.

소설 속의 인물을 감히 논하자면 한마디로 중국판 '사랑과 전쟁'의 배우와 별 다름이 없다는 느낌이다. 주인공 왕원쉬안은 걸핏하면 눈물을 흘리는 나약한 가장이지만 그 나약함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요조만큼 절실하지도 치열하지도 못하다. 더불어 그의 아내 청수성은 불륜의 장본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그의 어머니가 보여주는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아들에 대한 애정은 며느리에 대한 질투의 반대 급부에 불과해 보인다. 작가 바진이 여전히 봉건적인 구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국 지식인의 한계와 당시 중국의 여성 비하적인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를 비판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가 아니었다면 이 소설속의 주요 등장 인물들은 '사랑과 전쟁'에서 "4주 이후에 뵙겠습니다" 의 부부와 뭐가 다를가 싶다. 

 

작가 바진이 중국 문학의 상징일지는 모르지만 이 작품은 통속적인 신문 연재 소설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주인공이 승전 경축행사일에 죽음을 맞는다는 설정은 참 어이없기도 하고 맥빠지는 일이다. 저자가 과연 이 정도 설정으로 항일 투쟁의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 했을까? 그랬다면 그는 사끼꾼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바진이 그랗게 중국 근대/현대 문학사적으로 주요 작가라면 그의 작품중에 하필 이 소설을 궂이 번역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아심이 들 뿐이다. 

 

건방진 푸념이지만 이 정도 소설이면 책을 읽느니 아침 드라마나 '사랑의 전쟁'을 보는게 낫다.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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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어느 겨울동화 세계문학의 숲 12
하인리히 하이네 지음, 김수용 옮김 / 시공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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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하이네 (1797-1856), 참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니 하이네는 괴테와 버금가는 독일의 위대한 낭만적 시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풍자, 유머, 위트의 수단으로 그 당시의 봉건적 잔재가 남아 있던 독일 사회를 비판하고, 개인과 언론의 자유를 옹호한 정치적 풍자시를 썼던 이상주의적 사상가로도 유명했다고 하니 다재다능한 지식인음에 틀림 없다. 이러한 하이네의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예술적 재능과 현실정치 참여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책에 수록 된 [독일, 어느 겨울 동화] [아타 트롤, 한 여름밤의 꿈] 물론 그 당시 독일의 급진적인 진보주의 성향의 평론가들로부터 재능은 있지만 성격 (이념)이 결여된 시인이라고 비난 받았다고 하지만 말이다. – 이다.

 

[아타 트롤, 한 여름밤의 꿈][독일, 어느 겨울 동화]가 쓰여진 1842-1844년 독일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 빈 회의 (1814) 체제에서 39개 느슨한 동맹국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 된 하나의 독일즉 독일제국에 대한 민족주의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을 때이다. 나폴레옹은 독재적 정복자임에는 틀림 없었으나 그가 의도 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그의 정복 활동은 서유럽에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권리 정신을 전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 이전 구체제로의 회귀를 인위적으로 주도했던 빈 체제는 사회학적으로는 보다 많은 자유를 요구하는 신흥 부르주아지 계급과 구 봉건 계급 (왕족, 귀족, 교회)과의 충돌을, 지정학적으로는 강력한 통일국가를 꿈꾸는 후진적 봉건 제후 국가 (독일, 이탈리아)와 기존 강대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간의 갈등으로 해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하이네는 후진 봉건 제후 국가의 신흥 부르주아 지식인이라는 완벽한 조합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작품을 읽어 보면 하이네는 자유는 강력하게 옹호 했지만 통일에 대해서는 반동적 복고주의만큼이나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치부한다.

 

자유에 대한 옹호는 과거와 현재, 현실과 신화/꿈을 넘나들며 황제, 귀족, 종교에 대한 조롱과 풍자로 끝없이 이어진다. 하이네가 빈 체제의 결정적인 동요를 가져온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 정신에 전도되어 진보적 지식인에 대한 검열과 감시가 강화된 독일을 떠나면서 그는 망명지인 프랑스에서 범유럽적이고 범세계적인 인간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하지만 하이네를 포화 속에도 홀로 깃발을 들고 전진하는 혁명가로 오해하지는 말자. 하이네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촌 여동생을 사랑했고 자연과 꿈과 신화를 동경했던 시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이네가 자유를 옹호하고 숭배했을 망정 유치하고 직설적인 비예술적 경향은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이네가 프랑스 망명 시절에 급진적인 혁명론과 인간의 개성을 무시하는 획일화된 사회주의 사상에 회의를 가졌다고 하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급격하고 과격한 진보적 또는 혁명적 이론이나 운동에는 반감을 보일 수 밖에 없는 예술가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특징은 [아나 트롤, 한 여름 밤의 꿈]에서 잘 나타나 있는 데 인간을 적대시하는 곰 아나 트롤은 인간의 개성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획일적이고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사회주의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진보주의자들에 대한 느낌이 동의와 비판이 섞인 애증의 복합된 감정이라면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과 혐오는 분명하다. 특히 통일에 대한 반감, 정확이 말하자면 통일을 빌미로 타민족과 자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한 혐오는 [독일, 어는 겨울 동화] 24장에서 강하게 표현 되어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애국심을, 그것이 가진 모든 궤양과 함께,

과시하고 다니는 천민 무리들,

그들이 나는 정말 혐오스럽다오.” (p132)

 

반면 같은 책 12장에서 그는 늑대로 비유되는 과격한 진보주의자들에게 자신을 변절자로 매도하지 말라고 자신도 같은 동지라고 호소한다.

 

나는 양이 아닙니다. 나는 개가 아닙니다.

궁중 고문관도 아니고 대구도 아닙니다.

나는 늑대로 남아 있습니다. 내 심장도

내 이빨도 늑대의 것입니다.” (P69)  

 

처음 첫 장을 넘겼을 때의 내 첫 마디는 소설이 아니었어?” 였다. 다시 한번 나의 무식함을 확인할 수 있는 발견 이었지만 (이젠 너무 잦아서 발견이라기 보다는 습관에 가깝지만…) 그것보다 난감했던 점은 나는 시를 읽지 않는 다는 거였다. 그냥 책을 덮을까 하다가 그래도 한 번 읽어 봐야 하겠단 생각에 시작한 게 단숨에 해설까지 읽어 버렸다. 시 라는 느낌 보다는 소설이나 희곡을 보는 것 같았고 재미있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 시에서 언급되는 독일, 프랑스 역사, 정치, 사회적 배경이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를 찾아 보는 재미도 솔솔 했다. 혁명, 공화국, 나폴레옹, 왕정복고, 다시 혁명, 공화국, 제국으로 반복되는 반동과 전복의 유럽의 역사를 다시 한번 정리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하이네를 하나의 기준으로 정확히 평가 할 수는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너무 재능이 많아서 외롭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보수, 진보 양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서운함을 또 한편으로는 억울함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끝내 혁명의 선을 넘지 못한 이유를 그의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라는 신분적/계급적 한계 보다는 그의 세련되고 우아한 예술적 재능에서 찾고 싶다. 그에게 공산주의/사회주의는 투박하고 촌스러운 프로파간다로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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