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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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 겐자부로와의 첫 만남...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작가 등단 50주년을 기념하는 소설이라고 한다. 그의 나이 72세에 쓴 작품이라니 노익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명성에 비해 작품은 밋밋하고 제목대로 "싸늘하게 죽다" 수준이었다. 이전에 겐자부로 작품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작가의 문학세계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이 작품이 50주년이라는 상징 이상의 의미가 있다면 겐자부로의 다른 소설은 - 물론 그의 전성기 - 절대 읽지 않을 것이다.

 

클라이스트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 를 일본의 유신 이전 막부 시대의 농부 봉기로 각색하여 영화화하는 과정을 다룬 이 소설은 미 점령시대 사쿠라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성적 추행(?) - 적절한 단어인지 잘 모르겠다. 성적 학대, 성폭력이라고 쓰기에는 작가 겐자부로의 사쿠라의 감정과 태도 묘사가 모호하고 에로탁하기 때문이다. - 의 억압된 기억의 진실을 찾아가는 심리 추리 소설의 구조가 큰 뼈대를 가진다. 어린 시절 사쿠라의 후견인에서 도미 이후에는 남편까지 되는 데이비드 마거섁의 영화 [애너벨 리 영화]의 원본이 공개 되는 순간 사쿠라의 성적 트라우마의 진실은 밝혀지고, 거대한 진실의 무게를 담당하지 못한 사쿠라, 고모리 (겐자부로의 친구이자 영화 제작자, 그리고 사쿠라의 연인, 뭐 그 비슷한 관계), 겐자부로는 30년 동안 침묵한다. 

 

30년이 후가 흐른 후, 겐자부로가 장애를 갖고 있던 아들 히카리의 발작을 대로 한복판에서 보호하는 장면을 우연히 길에서 보게 된 고모리와의 짧은 만남을 계기로 그들 셋은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메이스케의 어머니' 중심의 영화로 각색하는 첫 걸음을 다시 떼기 시작한다.

 

소설은 전제적으로 지루했다 소설이 난해해서 재미 없었다기 보다는 소설의 소제나 주제가 너무 작가 신변 잡기적이라 제삼자인 독자인 '나'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아래의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는 독자의 교양 수준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1. 애드러 앨론 포의 시 [애너벨 리]를 읽거나, 읽었더라도 이해하고 있을 것

2. 클라이스트 [미하엘 콜하드]를 읽거나, 읽었더라도 이해하고 있을 것

    - 다행히도 읽은 책이다. 좋은 책으로 기억하고 있다.

3. 마지막으로 오엔 겐자부로의 인생과 가족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을 것.

 

물론 나의 다분히 사적인 기준에 맞춘 헛소리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내가 편집자라면 세계문학 전집에서 겐자부로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이 소설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사소설은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것 같아 불편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하지 않았던 친구의 넋두리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억지스럽고 어색한 느낌을 준다.

 

첫 만남이 실망 스러우니 겐자부로의 다른 책을 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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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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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넘어서 아름답다.
우리 모두 침묵할때 외롭게 외쳐대던 1980년의 광주를 잊지 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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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뿔(웅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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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에 이어 앨리스 먼로와의 두 번째 만남.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밥에 그나물’ - 물론 좋은 의미로 말이다 - 이었지만 양념이 좀 약했다.

 

 

작가는 인생이라는 선택지 물론 대부분 남녀의 사랑에 관한 - 에서 우리가 골랐던 답변의 결과인 현실이 시간이라는 미로에서 처음의 생기와 흥분을 잃어버리고 일상적인 습관을 넘어서 종국에는 고통과 부담이 되어 버리는 과정을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문체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동시에 우리가 고를 수 있었으나 끝내 고르지 못한 선택지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살짝 비추지만 다른 선택을 하였더라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는 지나온 길에 대해 후회와 아쉬움에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을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여러 가지 가정에서 다른 여자랑 결혼 했다면’, ‘다른 대학을 갔더라면’ ‘ 내가 이혼하지 않았더라면현재의 우리는 다른 모습의 우리로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작가 앨리스 먼로의 답을 음미해 보자.

 

''그러나 이제 그녀, 혹은 그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게 자신의 행복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자신이 한 거래의 대가라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밀스러운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전혀 없는 그런 삶의 전망.

이 삶에 집중하자. 그녀는 생각했다. 갑자기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이 삶이 내가 가진 전부이다.''

               [포스트 앤드 빔, 295]

 

가장 흥미로운 작품은 [곰이 산을 넘어오다] 이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에서 남성은 가부장적인 아버지나 남편 아니면 일탈의 매개와 수단으로의 정부 물론 정신적인 측면도 있긴 하지만 로 작품의 화자는 항상 여자이다. 하지만 [곰이 산을 넘어오다]에서 화자는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 피오나의 사랑을 관찰하는 남편 그랜트로, 몇 번의 외도를 제외하고는 결혼 생활에 충실했다고 자부하던 그랜트는 치매로 요양원에 입원한 피오나가 오브리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모습에 처음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나 종국에는 아내의 새로운 사랑을 위해 오브리 부인과의 외도도 물론 전화 메시지 몇 통으로만 암시되어 있지만 피하지 않으려는 파격적인 태도 변화를 보여준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에서 우리 인생은 억압된 기억과 조작된 기억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치매는 단순한 질병이 아닌 죽음보다 더한 인생의 고통과 두려움을 의미한다. 치매는 기억의 상실과 존재의 부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리하게도 작가는 치매를 배우자에 대한 지고 지순한 희생이라는 클리셰를 넘어서 배우자의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는 역설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랜트가 피오나의 대소변 및 온갖 진상 짓을 다 받아주다가 같이 동반 자살이라도 하는 결말이었으면 다시는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았을 것 같다. 이런 결말은 애틋하고 안타까운 신문기사거리는 될지언정 소설의 소재가 되기에는 전형적이고 단정적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곰이 산을 넘어오다] 2006 [Away From Her]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어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소설은 암시와 여운의 열려있는 결론을 보여 주고 있는데 영화는 어떨지 시간을 내서 꼭 봐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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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녀의 짓궂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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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역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라는 느낌이었다.  [염소의 축제]의 라틴 아메리카 독재 정치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적 연사 인식, 그리고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의 놀라운 성적 상상력과 유머를 통한 정치 풍자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작가로서의 능력, 아니 이야기꾼으로서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착한 소년과 나쁜 소녀의 평생에 걸친 파란 만장한 러브 스토리와 간간이 곁들여진 남미, 특히 페루의 격동적인 혁명과 독재로 점철된 현대 정치사는 독자에게 한치의 지루함이나 난해함을 허용치 않는다. 작가는 과도한 심적 묘사나 불필요하고 장황한 사물 및 현상에 대한 미적 분석을 배제하고 인물과 사건 위주의 서사적 진행으로 독자에게 가독성 이라는 선물을 아낌없이 선사한다. 주인공 착한 소년이 파리에 있을 당시 프랑스 문화계에 대한 아래의 글은 작가의 소설론을 대변한다.

 

 

-       “(중간 생략) 그로 인해 창작가 대신 비평가들이 멘토가 되면서 문화가 약간 위축되었다. 처음에는 미셸 푸코와 롤랑 바르트 같은 구조주의가 멘토였다가 그나중에는 질 들뢰즈와 자크 데리다 같은 해제주의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오만하고 난해한 수사법을 구사하는 그들은 자기 신봉자들과만 은밀하게 무리를 이루며 고립되어 일반 대중과 멀어졌고, 이런 변화의 결과로 문화생활은 갈수록 진부해졌다”.

 

 

난 이 부분을 읽고 격하게 동의했다. 대학시절 사회학 수업을 듣는데 강의 과목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미셀 푸코,

질 들뢰즈의 책들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고 결국 난 이 과목을 중도에 포기했다. 머리 나쁘고 게으른 내 잘못

이었지만, 수업을 들을 때마나 강단 앞에서 떠들고 있는 교수는 자신의 말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지 궁금했는데

그의 표정과 눈빛은 그의 나불되는 입만큼 자신감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착한 소년의 친구들은 매력적이다. 파리에서 만난 파울은 페루 학생들을 쿠바 게릴라 훈련에 파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열렬한 혁명주의자이지만 오로지 파리에서 사는 것이 꿈인 소부르주아주적인 리카르도를

비난하거나 계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페루 학생들 무리에서 첫사랑 나뿐 소녀를 보고 자신의 업무를

망각한 채 그 여자와의 데이트를 부탁하는 철딱서니 없는(?) 친구 리카르도를 보고 데이트를 허락하면서

현실적인 충고를 잊지 않는 파울은 혁명주의자이기에 앞서 진정한 친구이자 남자 였다. 그러기에 파울은 페루

산악지대에서의 게릴라 활동이 자신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페루 혁명의 결과가 결코 쿠바에서처럼 해피

엔딩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리카르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혁명 동지들에 대한 죄의식과 자신을 시기하는

무리들의 비판에 괴로워하는 순수한 혁명적 열정으로 페루행을 결정하게 된다. 또한 히피 친구 후안 바레토와

유네스코 친구 통역사 살로몬의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그들의 죽음은 처연하다.

 

 

하지만 정작 소설의 중심이 되는 주인공들의 사랑은 후반부로 갈수록 길을 잃고 서로에게 심리적, 육체적 고통과 파멸을 주는 극단적이고 엽기적인 양상을 보이다가 종국에는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 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인류 불면의 신파로 끝이 난다. 마지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 남자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여 평화와 사랑을 외치는 반전 메시지로 무장한 히피로 출발 했으나 결국에는 문란한 성적 방종과 마약에의 탐닉으로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첫사랑 제니의 죽음을 지켜주는 모습처럼 말이다. 물론 이는 아름답지도 않는 클리셰에 불과하다. 

 

 

반복되는 엽기적인 나쁜 소녀의 거짓말과 변신은 진부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쁜 소녀의 악행을 그대로 받아주기만 하는 착한 소년은 답답하고 짜증난다. 칠레소녀 릴레, 아를레테 동지, 차콘 사령관의 정부, 로베르토 아르누아 부인, 리차드슨 부인, 구리코, 리카르도 소모쿠루시오 (착한소년)의 부인, 그리고 본명인 오틸리티까지, 나쁜 소녀의 변신은 처음의 기대감이 무색하게 소설적 개연성을 희생하는 대신 절대적 사랑의 극한을 보여주겠다는 작가의 과도한 욕심의 충실한 도구가 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사랑은 윤리가 아닌 감정이다. 그래서 때로는 질병이 될 수도 있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소설 [나쁜 소녀의 짓궂음] 속의 사랑의 질병은 인위적으로 계산된 질병이다. 마치 인간의 질병을 연구하기 위해 쥐에게 인위적으로 병균을 투입한 후 질병의 정도에 따라 그들의 행동의 변화와 적응의 과정을 관찰하는 실험 같은 느낌 말이다.

 

 

뭐 이런거다. 남녀의 사랑에서 한편에는 이기적이다 못해 무책임한 소녀를, 반대편에는 순수함을 지나쳐 미련해 보이기 까지 하는 소년을  통해 '사랑이란 이럴수도 있는거야' 라는 자유롭고 절대적인 사랑에 바치는 헌사와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공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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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연 을유세계문학전집 9
조셉 콘라드 지음, 이석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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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연] [진보의 전초기지] 두 편의 중편 사실 [진보의 전초기지]는 단편으로 보는 게 합당할 듯싶다 은 자연과 인간의 만남과 충돌이라는 주제를 공유한다. 자연이 신비, 원시, 야만, 야생을 상징한다면 반대로 인간은 이성, 문명, 진보를 상징한다. 하지만 자연에 대처하는 두 작품의 인물들의 태도와 자세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가 빠져 들었던 신비로운 세계에 대한 악마적인 사랑과 섬뜩한 증오가 원시적 감정을 실컷 맛보고 거짓 명예와 가짜 명성을 탐하며 성공과 권력의 과시를 탐하게 된 그의 영혼을 소유하겠다고 싸웠다네

[어둠의 심연] p148

 

[어둠의 심연] 말론의 일화에서 주인공 커츠는 아프리카의 밀림의 야만성과 원시성에 매료되어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력 욕망을 타인의 굴종과 복종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 준다. 커츠는 원주민에게 추앙 받는 신격화된 존재로 자신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야만적인 본성이 원초적인 자연과 접촉함으로써 과대망상적인 자기 분열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커츠의 변화에 대한 인과적 플롯이나 설명 없이 갑작스러운 커츠의 죽음으로 끝나는 부분은 소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콩고강의 운항에서 묘사되는 자연의 야생성과 야만성에 비하면 커츠라는 인물의 개연성과 필연성에 소설적 장치들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어둠의 심연]은 프란시스 코풀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의 모티브가 되었던 원작이라고 알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전쟁, 특히 분명한 적의 개념도, 명분도 없이 인간성의 파괴와 잔혹한 피의 희생만을 요구했던 전쟁이라는 배경이 있었으므로 주인공 커츠 대령의 광기와 파멸이 설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둠의 심연]에서 작가의 아프리카를 초기 인류의 발생지로, 아프리카 인을 원시 인류와 동일한 수준으로 보는 관점은 서유럽 백인 중심의 제국주의적 식민주의 사관으로 비판 받아 마땅하다. 단순히 요약해서 말하자면 원시적인 미개한 아프리카에 가보니 자신 조차 모르고 있었던 야만성이 깨어났다는 것인데 내가 아프리카인 이었다면 당연히 황당하기 그지 없는 백인들의 쓰레기 같은 이론에 경멸감과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반면 [진보적 전초기지]의 케예르와 카를리에는 나약하고 무능한 백인의 전형이다. 그들은 현지 아프리카 부족민들을 무시하고 경멸하지만 자신들은 거대한 원시적 자연 앞에서는 의식주도 제대로 해결 못 하는 부적응자들이다.

 

제도와 도덕의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경찰과 여론의 힘을 맹목적으로 믿는 민중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야만과 접촉할 때, 심각한 문제가 개인의 마음속에서 갑자기 생겨나게 된다

[진보의 전초기지] p175

 

이 소설에 지적하듯이 백인들의 존재는 고도로 조직화된 문명화된 군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군중을 떠난 개인들은 보잘것없고 무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군중 속에 있다는 안도감과 안전하다는 믿음이 인간의 대담성과 능력으로 표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적 전초기지]의 두 백인은 유럽이라는 사회 (군중)의 배경 없이는 아무 쓸모는 없는 나약한 인간들로 오히려 문명화된 현지인 마콜라의 생활력과 교활하기 까지 한 지혜가 돋보이기까지 한다.

 

굳이 다시 비교하자면 문학/예술적 관점에서 [어둠의 심연] [진보의 전초기지]보다 월등히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치/문화적 관점에서는 – politically correct – [어둠의 심연]은 백인중심, 식민주의 관점이 농후한 반면 [진보의 전초기지]는 미약하나마 유럽중심 제국주의에 대한 우려 섞인 조롱과 풍자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진보의 전초기지]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어둠의 심연이라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 존재일까? 요즘 우리 사회를 보고 있자면 인간의 야만적인 폭력성은 천성이 아닐까 싶다. 그럼 작가 조지프 콘래드의 생각처럼 우리가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문명화된 군중에 속해 있다면 우리의 야만성은 길들어지고 우리는 안전하게 보호 받을 수 있을까?

 

답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속해 있는 군중이 커츠 대령의 왕국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보니 자신이 없고 간담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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