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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뿔(웅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디어 라이프]에 이어 앨리스 먼로와의 두 번째 만남.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밥에 그나물’ - 물론 좋은 의미로 말이다 - 이었지만 양념이 좀 약했다.
작가는 인생이라는 선택지 – 물론 대부분 남녀의 사랑에 관한 - 에서 우리가 골랐던 답변의 결과인 현실이 시간이라는 미로에서 처음의 생기와 흥분을 잃어버리고 일상적인 습관을 넘어서 종국에는 고통과 부담이 되어 버리는 과정을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문체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동시에 우리가 고를 수 있었으나 끝내 고르지 못한 선택지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살짝 비추지만 다른 선택을 하였더라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는 지나온 길에 대해 후회와 아쉬움에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을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여러 가지 가정에서 ‘다른 여자랑 결혼 했다면’, ‘다른 대학을 갔더라면’ ‘ 내가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우리는 다른 모습의 우리로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작가 앨리스 먼로의 답을 음미해 보자.
''그러나 이제 그녀, 혹은 그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게 자신의 행복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자신이 한 거래의 대가라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밀스러운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전혀 없는 그런 삶의 전망.
이 삶에 집중하자. 그녀는 생각했다. 갑자기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이 삶이 내가 가진 전부이다.''
[포스트 앤드 빔, 295]
가장 흥미로운 작품은 [곰이 산을 넘어오다] 이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에서 남성은 가부장적인 아버지나 남편 아니면 일탈의 매개와 수단으로의 정부 – 물론 정신적인 측면도 있긴 하지만 – 로 작품의 화자는 항상 여자이다. 하지만 [곰이 산을 넘어오다]에서 화자는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 피오나의 사랑을 관찰하는 남편 그랜트로, 몇 번의 외도를 제외하고는 결혼 생활에 충실했다고 자부하던 그랜트는 치매로 요양원에 입원한 피오나가 오브리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모습에 처음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나 종국에는 아내의 새로운 사랑을 위해 오브리 부인과의 외도도 – 물론 전화 메시지 몇 통으로만 암시되어 있지만 – 피하지 않으려는 파격적인 태도 변화를 보여준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에서 우리 인생은 억압된 기억과 조작된 기억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치매는 단순한 질병이 아닌 죽음보다 더한 인생의 고통과 두려움을 의미한다. 치매는 기억의 상실과 존재의 부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리하게도 작가는 치매를 배우자에 대한 지고 지순한 희생이라는 클리셰를 넘어서 배우자의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는 역설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랜트가 피오나의 대소변 및 온갖 진상 짓을 다 받아주다가 같이 동반 자살이라도 하는 결말이었으면 다시는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았을 것 같다. 이런 결말은 애틋하고 안타까운 신문기사거리는 될지언정 소설의 소재가 되기에는 전형적이고 단정적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2006년 [Away From Her]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어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소설은 암시와 여운의 열려있는 결론을 보여 주고 있는데 영화는 어떨지 시간을 내서 꼭 봐야 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