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몇 년만에 가보는 인사동과 명동 이었다.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아들놈에겐 처음 서울 한 복판 구경이었다.

경기도 촌 놈이 서울 구경을 하니 기분이 좋은 지 아들놈은 처음에는 좋아라 뛰어 다녔다. 물론 한 2시간 지나고 나선 집에 가자고 졸라되기 시작했지만 뭐 그래도 기분 좋은 날이 었다.

 

근데 명동은 정말 중국 사람 반, 한국 사람 반이었다. 가는 식당, 매장 마다 중국 관광객들은 꼭 한국 사람 만큼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큰 나라에서 "우리 나라에 뭐 볼게 있어서 왔나?" 라는 궁금즘은 곧 "뭘 살게 있어서 왔겠구나!" 라는 싱거운 답변으로 넘겨 버렸는데 직접 물어 보지 않았으니 정확한 이유는 알 도리가 없음이다.

 

[남자의 자리]는 뭐 그냥 읽었다는 느낌만 들뿐이다.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객관적이고 담담한 기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 같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일단 작가 - 모신 하미드 - 가 파키스탄이라는 점에 끌려 읽기 시작했는데 시작은 대단히 흥미롭고 참신하다. 물론 그가 미국물(?)을 먹은 엘리트 지식인 파키스탄인 이라는 점은 기대와 동시에 우려를 자아낸다. 그래도 2015년은 어느 해 보다 가볍고 신나는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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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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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다 못해 너무 밋밋한 느낌이다. 하지만 보지도 않고 감히 말하건데, 영화 [국제시장]에서의 희생의 아이콘 아버지보단 더 막막하고 애잔한 그리움의 대상임엔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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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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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마지말 날 하루 전이다. 정작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별 다른 느낌이 없는 반면에 오늘같은 마지막 하루 전날에 오히려 기분이 싱숭생숭 하면서 뭔지모를 갈증이 나는 건 알다갈도 모를 일이다. 요즘 추억 팔기가 유행이라고 하는데 각박한 세상에 자신이 그래도 찬란했던 - 물론 주관적인 - 시절로 잠시 돌아 간것만 같은 느낌을 줄 정도면 이건 상술이 아니고 봉사라고 하는 게 더 맞을 듯 싶다.

 

[휴먼 스테인] 은 평생 백인 - 정확하게는 유태인 - 행세를 하면서 살아온 흑인 콜만 실크에 대한 이야기 이다. 어릴적 부터 뛰어난 두뇌, 훤출한 체격, 특출한 운동 능력으로 가족과 지역사회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콜먼은 자신이 백인 조상이라는 유전적 배경으로 피부색이 옅은 흑인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백인사회의 거짓된 삶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누가 그의 선택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자격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수 있나?

 

"작은 그들이 우리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의 규범을 강요하게 둘 수 없듯 거대한 그들이 자신들의 편견을 강요하게 둘 수는 없다. ........ ~  울워스의 그들이든 하워드의 우리는 마찬가지다. 그 대신 아주 명민한 있는 그대로의 있다."

                                                                                                                                     - [휴먼스테인 1] p175

 

그들은 백인을, 우리는 흑인을 지칭하는데 콜먼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나 - 자아의 발견이라고 해두자 - 가 되고자 한다. 콜먼의 거짓을 정당화 하기 위한 궤변이라고 차부할 수도 있겠지만 편견에 가득찬 그들과 대항하기 위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우리라는 틀에 나를 가둬두는것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문제임에는 틀림 없다.  

 

"어릴 시절 부터 죽 그가 원했던 것은 자유로운 인간으로 사는 것이었다. 흑인으로도, 심지어 백인으로도 아니었다. 그저 나 자신으로 자유럽게."

                                                                                                                                       - [휴먼 스테인 1] p193

 

콜먼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지독한 개인주의자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에게 정치적 올바름은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흑인 인권 운동가의 도덕적 자질은 커녕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막발로 콜먼이 백인들에게 굴종하고 복종하는 비굴한 삶을 선택한 것도 아니지 않는가?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았는 소설속의 화자 네이선 주커먼도 우리라는 공동체의 파괴적인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체적 열정이자 역사적으로 가장 불온하고 파괴적인 쾌락인, 자기만 성자인 척하는 감정적 도취가 부활했다

                                                                                                                                       - [휴먼 스테인 1] P13

 

빌 클린터 대통령의 성스캔들에 광분하는 미국 사회에 대한 일침으로 위선적인 도덕적 우월성으로 무장한 우리라는 공동체의 무자비한 마녀 사냥식 공격에 걱정을 넘어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한 평생을 성공한 백인 교수로 살아온 콜먼에게 수업 시간에 자주 결석하는 학생들에게 무심코 던진 'Spooks"  - 사전적 의미로 유령이라는 뜻과 함께 흑인을 비하하는 뜻이 있다고 한다. 물론 네이버 사전에는 흑인 비하의 뜻은 나오지도 않는다 - 라는 단어 한마디는 그에게 인종차별주의라는 낙인과 함께 대학사회에서의 추방이라는 비극을 가져온다. 한 평생 백인 행세를 살아온 콜먼이 인종차별주의라는 이유로 학교를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생의 아이러니임에 틀림 없지만 콜먼의 분노와 억울함 역시 개인의 당연한 감정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콜먼은 정치적 올바름과는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 뼈속까지 고립 된 개인주의자로 그의 상처는 포니아 팔리라는 여성과의 성적 만남 - 접촉이라는 단어가 사실 더 적합하다 - 으로 치유되는 듯 보인다. 포니아라는 존재는 콜먼에게 원초적이고 성적인 사랑이 주는 쾌락으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멍청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그 무엇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퇴행이라고 할 것이며 누군가는 이를 구원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인습적인 공동체는 남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는 일탈마저 노교수와 젊은 청소부의 변태적 성적 스캔들로 매도하여 그들의 작은 평화도 용납하지 않는다. [휴먼 스테인] 에서 공동체 - 물론 가족을 포함한 - 의 개인에 대한 무자비한 도덕적 공격은 우려감을 넘어 공포감을 갖기에 충분하다. 

 

[휴먼 스테인]은 또한 인간의 분노에 대한 보고서이다. 콜먼은 자신에 대한 공동체의 부당성에 분노하고, 포니아는 계부의 성적 학대와 이를 방치하는 친모에 대한 분노, 그리고 두 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신에게 분노하고, 포니아의 전 남편 레스터 팔리는 베트남 전쟁의 상처에 분노하며 델핀 루 교수는 자신의 지적 허영심과 질투심에 분노한다. 그리고 콜먼의 자식들을 비롯한 모든 주변 인물들도 무슨 이유이든지 항상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원인은 있을 지언정 모호하거나 돌이킬수 없고 해결책도 묘연하다. 작가 필립 로스는 인간의 예측 불허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오만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 되지도 않으며 주제넘는 상처의 치유책도 내놓지 않는다. 사람들이 필립 로스를 소설을 사랑하는 첫 번째 이유이자 마지막 이유가 아닐 까 싶다. 소설에서 위로 받고자 하는 독자라면 필립 로스의 소설은 멀리 해야 한다. 답답함만 더해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속에 한 문장 "모든 것에 내재된 끔찍한 임시성에 허를 찔렸던 것이다" [휴먼 스테인 2] p211 처럼 인생은 예측할 수 없고 때로는 불가해하다. 딱히 이유는 없지만 갑자기 누군가가 방송에서 한 말이 기억난다. 행복을 목적으로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미래의 행복이란 실체가 없는 것으로 행복이라는 집착과 허울에서 벗어나자고. 맞는 말이다. 우리 모두 남 눈치 보지 말고 화나면 소리치고, 슬프면 울고, 재미나면 웃자.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 아니 인생 일 것이다.  

 

역시나 생각 없이 쓰다 보니 책 내용은 생각이 안 나고 자꾸 옆길로 빠져 시간만 낭비한 꼴이 되버렸다. 하지만 괜찮다. 나 혼자 뻘짓 한 거에 만족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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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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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헬러는 10대 시절 의붓형 바비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친아버지 모리스 헬러와 새어머니 윌라

파크스의 집을 나와 7년 동안 자학에 가까운 떠돌이 생활을 전전하다 플로리다에서 고등학생 소녀 필라

산체스와 사랑에 빠져 다시 한번 삶애 대한 애착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세상은 마일스의

순진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마일스는 필라의큰언니 안젤라 로부터 미성년자인 자기 동생과의 사랑

물론 섹스가 문제겠지만 을 빌미로 금품 요구와 폭력의 협박까지 받는 지경에 이르자 선택의 여지 없이

감옥행을 피하기 위해 또다시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된다.

 

마일스의 뉴욕으로의 도피는 아이러니 하게도 파산, , 가압류 등으로 버려진 폐가를 무단 점유하고 있었던

친구들과의 동거로부터 시작된다. 폐가에서의 생활이 역설적인 이유는 플로리다에 마일스의 마지막 직업이

파산, , 가압류 등으로 버려진 폐가들을 청소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폐가에 남아있는 물건들을 죄의식 없이

훔치던 탐욕스러운 동료들과는 다르게 마일스는 주인들이 소중하게 사용했음이 틀림없는 하지만 지금은 쓸모

없이 버려진 물건들을 사진 속에 담으면서 자신의 인생의 패배의 고통과 상처를 곱씹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폐가에서의 생활이 역설적인 궁극적인 이유는 마일스가 제 아무리 깨끗하게 꼼꼼히 치워도

패배의 악취를 지우지는 못한다” (P9) 와 같았던 버려진 집들이 인생의 낙오자요,패배자들한테는 세상에 대한

저항의 연대의식의 장소요, 저마다의 삶에 대한 욕망을 되살리는 터전이 되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우선 현재의 마일스를 과거의 마일스와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 고리였던 빙 네이선의 최대 고민은 마일스

앞에만 서면 성적으로 흥분되는 당황스러운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었지만 제이크 앨리스의 옛 남친

- 와 하룻밤 테스트(?)로 자신이 이성애자라는 사실에 안도감(?) 동시에 마일스에 대한 외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평생 비밀로 간직하기로 다짐한다.

 

자신의 다소 뚱뚱한 외모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앨리스 버그스트롬은 연인 제이크와의 소원해진 관계를

자신의 외모 떄문 이라 생각하는 나약한 여자이면서, 영화 [우리생애 최고의 해]에 대한 박사 논문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고 있던 다소 폐쇄적이었던 여성이었지만 펜클럽에서전세계적으로 정치적인 이유로 핍박 받는

반체제 작가들을 지원하는 일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게 되고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던 남자친구 제이크와

만남을 정리하면서 그들이 헤어진 진짜 이유는 제이크의 성 정체성의 회복(?) 에 있지만 앨리스가 평생

모르는 게 속 편할 것이다. -  저술가로서의 꿈에 더욱더 매진하게 된다.

 

스무살 가정교사 시절 열여섯 남학생과의 불장난으로 인한 임신 중절과 자살 시도 이후 자신의 신체 일부

특히 성기 에 대한 병적인 집착으로 외설적인 데생에 침잠해 있던 엘런 브라이스에게 삶의 의지를 회복하게

하는 처방약은 다름 아닌 지금은 멋진 성인으로 성장한 그 시절 어린 남학생을 다시 만나 사랑 물론 섹스

에 빠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좀 뜨악 했지만 뭐 다시 생각해 보면 세 친구 중에 엘런이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정상적인 삶으로의 귀환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세 친구는 이 소설의 조연으로 중요한 갈등의 축은 주인공 마일스 헬러, 아버지 모리스 헬러, 그리고

새어머니 윌라 파크스간의 관계이다. 물론 친어머니 메라--스완도 포함시킬 수 있겠지만 내 관점으로

그 여자는 모든 갈등의 원인이 되는 사건, 곧 바비의 죽음과 직접적인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단지 헬러 부자의

관계의 특수성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배경 정도의 인물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특히 마일스와 모리스의 부자 관계, 모리스와 윌라의 부부 관계는 가족에 대한 사랑, 증오, 이해, 화해의 과정을

꾸밈 없이 담담하게, 과장 없이 차분하게 다루고 있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는 (모리스) 그녀 (필라)가 얼마나 어린지 듣고 질겁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고

나서 아들이 그 나이의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만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들의 삶은 중도에 멈추어 제대로

자연스럽게 성장하지 못했다. 겉보기에는 다 자란 성인 남자일지라도 내적 자아는 열여덟 살과 열 아홉 살

어딘가 쯤에 머물러 있다.” (P299)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장으로 모리스의 아들 마일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이해가

진하게 묻어 있으며 마일스의 모든 행동과 사고가 바비의 죽음 후 집을 나갔을 당시의 나이에 멈추어 있다는

탁월한 문학적 해석을 집약해 주고 있는 문장이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가족의 갈등과 화해에 대한 작품이다. 하지만 중요한 다른 주제는 인생은 결코

만만하거나 녹녹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이 [선셋 파크]의 모든것을 말해 주고 있다고 믿는다.

퇴거 명령을 집행하는 경찰과의 갑작스러운 몸싸움이 경찰 폭행으로 까지 예기치 않게 흘러가면서 간신히

회복했던 것처럼 보였던 마일스의 인생은 다시 한번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p328)

 

역자 송은주씨는 이 문장을 비록 미래에 대하 희망은 걸지 않는 것에는 변함 없지만 과거와는 달리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지금 현재만을 살기로 결심한 마일스의 내적 변화의 새로운 시작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마지막 문장의 마일스는 그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간에 소설

첫머리의 마일스로 다시 돌아가는 첫 시작을 암시한다고 해석하고 싶다.

 

7년 동안의 그가 뭔가 이룬 것이 있다면 현재를 사는 것, 지금 여기 말고는 생각하지 않는 이와 같은

능력이었다.” (p10)

 

역자의 해석과는 반대로 마일스는 폐가를 정리하고 버려진 것들의 사진을 찍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일스가 과거의 고통과 상처를 항상 현재화 하여 자신을 감정의 극단까지 몰아 붙이던 삶으로, 필라와의 사랑,

친구들과의 연대, 그리고 제일 중요한 가족과의 재결합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쉽게 허락되는 것처럼 보였던 일상의 행복이 마일스에게 쉽게 열리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도 마일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도 자신만의 인생의 무게에 눌려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지만

요즘 유행어처럼 희망은 일종의 고문일 수도 있다. 그냥 사는 것 차제가 우리의 삶의 목표일 것이다.

그 어떤 고통과 상처도 무의미하지 않다. 행복은 환상이므로 이제부터라도 행복이 목적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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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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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10년 전 소설이다. 반갑기도 하고 오글거리기도 하다.

 

작가 정이현은 나랑 동갑이다. 정이현 작가는 어느 일간지에서 자신을 “90년대 아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이

'강남작가'로 불리는 것도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90년대 세대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강남이 작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게 된데 연유한 것 같다고 말한 인터뷰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난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던 약 5년  동안 강남에서 살았는데 항상 주류의 근처를 맴도는 주변인 신세였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서울 변두리에서 전학을 온 나란 존재는 강남 토박이 친구(?)들에게는 딴 행성에서 온

별난 생명체요 자신들과는 태생이 다른 종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에서라도 강남의 정서와 느낌을

어떤 강남 토박이 보다 정확히 이해한다고 자부한다. – 사실 자부할 만한 가치도 없는 하찮은 일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어중간한 주변인이 떄로는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때도 있기도 하니까.   

 

"반포는 확실히 가리봉동이나 봉천동, 수유리등과는 다른 이름인 것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 p 18

 

내 친구가 대학교 1학년 때 소개팅녀가 어디 사냐고 묻길래 봉천동에 산다고 했더니 그 다음부터 분위기가 싸해

졌다면서 봉천동(奉天洞)어때서! 하늘을 받드는 동넨데라고 울부 짓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 봐도 웃음이

나오곤 한다. - 오해 없으시길, 난 대방동이라는 동네에서 10년 이상 살았으니까요 ㅎㅎ -

물론 웃음으로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시대, 바로 90년대는 그랬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여자들이 속물이라서 그랬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정이현 소설 속의 여성들은 속물로 사는게 어

때서!” 라고 독자들에게 꺼림낌 없이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주인공 유리에게 있어 순결이란 최고의 유전자를 가진 똑똑하고 부유한 배우자를 만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로 살 게 아니라면 평범한 여성들이

생존하기 위한 최고의 전략은 여성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남자를 당당하고도 영리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물론 어이없는 첫날밤의 결과에 당황하는 유리처럼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배기량 2000cc급 자동차의 오너가 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트렁크} p42

 

지금은 소위 개나 소나외제차까지 타는 시대지만 90년 초만해도 해도 중형 소나타는 성공한 직장인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직무 능력과 함께 남자를 적당히 이용할 줄 하는 재주(?)로 직장에서 승승장구 했던 주인공 그녀는

난데없는 차 트렁크에 실려 있는 선미의 시체때문에 일이 꼬일 대로 꼬이지만 자신의 정부 권을 살해하기 까지

하는 - 주인공은 결코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이자, 자시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중형 자동차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소녀시대]에서 아빠 애인의 중절 수술 비용을 마련 하기 위해 포르노 나체 사진을 찍거나 남자친구 용이 오빠와

함께 납치 자작극을 서슴없이 꾸며되는 혜나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육체까지도 이용하는 극단적인

여성성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서평에서처럼 정이현의 주인공들은 위장의 방식으로 체제가 요구하는 여성의

존재를 연기함으로써 자기욕망을 실현하다

 

다음의 단편들도 충분히 재미있고 훌륭하다. 하지만 맨 처음에 강조했듯이 이 소설이 출간 된지는 10년도 넘었다.

작가의 등단이 2002 [낭만적 사랑과 사회]이고 모든 단편이 2002년에서 2003년에 쓰여졌다고 하니

작가 서른살 때 일이다. 일단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서른 살이면 난 그냥 놀고 있을 때다. 그리고 더 부끄러운건

그때 나는 내 자신이 아직 이십 대 인줄 알고 살았었고 그 시절 90년대에 대한 어떤 고마움도 연민의 느낌도 없었

다는 것이다. 지금 와서 느낌을 되 찾자니 기억이 나지 않고 응답하라 1994’ 를 보자니 지금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정이현 작가도 10년 전 자신의 단편들을 지금 보고 있자면 본인도 모르게 얼굴이 붉그레지고 어딘가 숨고

싶은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하다. 감히 말하자면 이 단편들은 아직 날 것 그대로의 신선함은 있지만 동시에 날 것

고유의 비린내는 숨길 수 없고, 젊음의 치기는 뚜렷하지만 성숙한 고민의 흔적은 없고, 날은 제대로 서 있지만

손을 베기 십상이다.

 

나는 이 소설들을 통해 다시 한번 90년대를 돌아보게 해 준 것만이라도 작가 정이현에게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

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 있어 정이현 작가 최고의 단편은 [상품백화점이]이다. [상품백화점]

내가 뽑는 한국 최고의 단편 중 하나이며,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잠시 동안 생각을 멈추고 먹먹한 가슴에 올린

떨리는 손을 통해 전해오는 미세하지만 또렷한 진동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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