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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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10년 전 소설이다. 반갑기도 하고 오글거리기도 하다.

 

작가 정이현은 나랑 동갑이다. 정이현 작가는 어느 일간지에서 자신을 “90년대 아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이

'강남작가'로 불리는 것도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90년대 세대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강남이 작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게 된데 연유한 것 같다고 말한 인터뷰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난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던 약 5년  동안 강남에서 살았는데 항상 주류의 근처를 맴도는 주변인 신세였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서울 변두리에서 전학을 온 나란 존재는 강남 토박이 친구(?)들에게는 딴 행성에서 온

별난 생명체요 자신들과는 태생이 다른 종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에서라도 강남의 정서와 느낌을

어떤 강남 토박이 보다 정확히 이해한다고 자부한다. – 사실 자부할 만한 가치도 없는 하찮은 일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어중간한 주변인이 떄로는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때도 있기도 하니까.   

 

"반포는 확실히 가리봉동이나 봉천동, 수유리등과는 다른 이름인 것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 p 18

 

내 친구가 대학교 1학년 때 소개팅녀가 어디 사냐고 묻길래 봉천동에 산다고 했더니 그 다음부터 분위기가 싸해

졌다면서 봉천동(奉天洞)어때서! 하늘을 받드는 동넨데라고 울부 짓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 봐도 웃음이

나오곤 한다. - 오해 없으시길, 난 대방동이라는 동네에서 10년 이상 살았으니까요 ㅎㅎ -

물론 웃음으로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시대, 바로 90년대는 그랬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여자들이 속물이라서 그랬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정이현 소설 속의 여성들은 속물로 사는게 어

때서!” 라고 독자들에게 꺼림낌 없이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주인공 유리에게 있어 순결이란 최고의 유전자를 가진 똑똑하고 부유한 배우자를 만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로 살 게 아니라면 평범한 여성들이

생존하기 위한 최고의 전략은 여성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남자를 당당하고도 영리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물론 어이없는 첫날밤의 결과에 당황하는 유리처럼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배기량 2000cc급 자동차의 오너가 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트렁크} p42

 

지금은 소위 개나 소나외제차까지 타는 시대지만 90년 초만해도 해도 중형 소나타는 성공한 직장인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직무 능력과 함께 남자를 적당히 이용할 줄 하는 재주(?)로 직장에서 승승장구 했던 주인공 그녀는

난데없는 차 트렁크에 실려 있는 선미의 시체때문에 일이 꼬일 대로 꼬이지만 자신의 정부 권을 살해하기 까지

하는 - 주인공은 결코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이자, 자시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중형 자동차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소녀시대]에서 아빠 애인의 중절 수술 비용을 마련 하기 위해 포르노 나체 사진을 찍거나 남자친구 용이 오빠와

함께 납치 자작극을 서슴없이 꾸며되는 혜나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육체까지도 이용하는 극단적인

여성성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서평에서처럼 정이현의 주인공들은 위장의 방식으로 체제가 요구하는 여성의

존재를 연기함으로써 자기욕망을 실현하다

 

다음의 단편들도 충분히 재미있고 훌륭하다. 하지만 맨 처음에 강조했듯이 이 소설이 출간 된지는 10년도 넘었다.

작가의 등단이 2002 [낭만적 사랑과 사회]이고 모든 단편이 2002년에서 2003년에 쓰여졌다고 하니

작가 서른살 때 일이다. 일단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서른 살이면 난 그냥 놀고 있을 때다. 그리고 더 부끄러운건

그때 나는 내 자신이 아직 이십 대 인줄 알고 살았었고 그 시절 90년대에 대한 어떤 고마움도 연민의 느낌도 없었

다는 것이다. 지금 와서 느낌을 되 찾자니 기억이 나지 않고 응답하라 1994’ 를 보자니 지금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정이현 작가도 10년 전 자신의 단편들을 지금 보고 있자면 본인도 모르게 얼굴이 붉그레지고 어딘가 숨고

싶은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하다. 감히 말하자면 이 단편들은 아직 날 것 그대로의 신선함은 있지만 동시에 날 것

고유의 비린내는 숨길 수 없고, 젊음의 치기는 뚜렷하지만 성숙한 고민의 흔적은 없고, 날은 제대로 서 있지만

손을 베기 십상이다.

 

나는 이 소설들을 통해 다시 한번 90년대를 돌아보게 해 준 것만이라도 작가 정이현에게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

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 있어 정이현 작가 최고의 단편은 [상품백화점이]이다. [상품백화점]

내가 뽑는 한국 최고의 단편 중 하나이며,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잠시 동안 생각을 멈추고 먹먹한 가슴에 올린

떨리는 손을 통해 전해오는 미세하지만 또렷한 진동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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