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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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마지말 날 하루 전이다. 정작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별 다른 느낌이 없는 반면에 오늘같은 마지막 하루 전날에 오히려 기분이 싱숭생숭 하면서 뭔지모를 갈증이 나는 건 알다갈도 모를 일이다. 요즘 추억 팔기가 유행이라고 하는데 각박한 세상에 자신이 그래도 찬란했던 - 물론 주관적인 - 시절로 잠시 돌아 간것만 같은 느낌을 줄 정도면 이건 상술이 아니고 봉사라고 하는 게 더 맞을 듯 싶다.

 

[휴먼 스테인] 은 평생 백인 - 정확하게는 유태인 - 행세를 하면서 살아온 흑인 콜만 실크에 대한 이야기 이다. 어릴적 부터 뛰어난 두뇌, 훤출한 체격, 특출한 운동 능력으로 가족과 지역사회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콜먼은 자신이 백인 조상이라는 유전적 배경으로 피부색이 옅은 흑인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백인사회의 거짓된 삶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누가 그의 선택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자격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수 있나?

 

"작은 그들이 우리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의 규범을 강요하게 둘 수 없듯 거대한 그들이 자신들의 편견을 강요하게 둘 수는 없다. ........ ~  울워스의 그들이든 하워드의 우리는 마찬가지다. 그 대신 아주 명민한 있는 그대로의 있다."

                                                                                                                                     - [휴먼스테인 1] p175

 

그들은 백인을, 우리는 흑인을 지칭하는데 콜먼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나 - 자아의 발견이라고 해두자 - 가 되고자 한다. 콜먼의 거짓을 정당화 하기 위한 궤변이라고 차부할 수도 있겠지만 편견에 가득찬 그들과 대항하기 위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우리라는 틀에 나를 가둬두는것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문제임에는 틀림 없다.  

 

"어릴 시절 부터 죽 그가 원했던 것은 자유로운 인간으로 사는 것이었다. 흑인으로도, 심지어 백인으로도 아니었다. 그저 나 자신으로 자유럽게."

                                                                                                                                       - [휴먼 스테인 1] p193

 

콜먼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지독한 개인주의자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에게 정치적 올바름은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흑인 인권 운동가의 도덕적 자질은 커녕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막발로 콜먼이 백인들에게 굴종하고 복종하는 비굴한 삶을 선택한 것도 아니지 않는가?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았는 소설속의 화자 네이선 주커먼도 우리라는 공동체의 파괴적인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체적 열정이자 역사적으로 가장 불온하고 파괴적인 쾌락인, 자기만 성자인 척하는 감정적 도취가 부활했다

                                                                                                                                       - [휴먼 스테인 1] P13

 

빌 클린터 대통령의 성스캔들에 광분하는 미국 사회에 대한 일침으로 위선적인 도덕적 우월성으로 무장한 우리라는 공동체의 무자비한 마녀 사냥식 공격에 걱정을 넘어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한 평생을 성공한 백인 교수로 살아온 콜먼에게 수업 시간에 자주 결석하는 학생들에게 무심코 던진 'Spooks"  - 사전적 의미로 유령이라는 뜻과 함께 흑인을 비하하는 뜻이 있다고 한다. 물론 네이버 사전에는 흑인 비하의 뜻은 나오지도 않는다 - 라는 단어 한마디는 그에게 인종차별주의라는 낙인과 함께 대학사회에서의 추방이라는 비극을 가져온다. 한 평생 백인 행세를 살아온 콜먼이 인종차별주의라는 이유로 학교를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생의 아이러니임에 틀림 없지만 콜먼의 분노와 억울함 역시 개인의 당연한 감정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콜먼은 정치적 올바름과는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 뼈속까지 고립 된 개인주의자로 그의 상처는 포니아 팔리라는 여성과의 성적 만남 - 접촉이라는 단어가 사실 더 적합하다 - 으로 치유되는 듯 보인다. 포니아라는 존재는 콜먼에게 원초적이고 성적인 사랑이 주는 쾌락으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멍청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그 무엇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퇴행이라고 할 것이며 누군가는 이를 구원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인습적인 공동체는 남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는 일탈마저 노교수와 젊은 청소부의 변태적 성적 스캔들로 매도하여 그들의 작은 평화도 용납하지 않는다. [휴먼 스테인] 에서 공동체 - 물론 가족을 포함한 - 의 개인에 대한 무자비한 도덕적 공격은 우려감을 넘어 공포감을 갖기에 충분하다. 

 

[휴먼 스테인]은 또한 인간의 분노에 대한 보고서이다. 콜먼은 자신에 대한 공동체의 부당성에 분노하고, 포니아는 계부의 성적 학대와 이를 방치하는 친모에 대한 분노, 그리고 두 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신에게 분노하고, 포니아의 전 남편 레스터 팔리는 베트남 전쟁의 상처에 분노하며 델핀 루 교수는 자신의 지적 허영심과 질투심에 분노한다. 그리고 콜먼의 자식들을 비롯한 모든 주변 인물들도 무슨 이유이든지 항상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원인은 있을 지언정 모호하거나 돌이킬수 없고 해결책도 묘연하다. 작가 필립 로스는 인간의 예측 불허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오만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 되지도 않으며 주제넘는 상처의 치유책도 내놓지 않는다. 사람들이 필립 로스를 소설을 사랑하는 첫 번째 이유이자 마지막 이유가 아닐 까 싶다. 소설에서 위로 받고자 하는 독자라면 필립 로스의 소설은 멀리 해야 한다. 답답함만 더해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속에 한 문장 "모든 것에 내재된 끔찍한 임시성에 허를 찔렸던 것이다" [휴먼 스테인 2] p211 처럼 인생은 예측할 수 없고 때로는 불가해하다. 딱히 이유는 없지만 갑자기 누군가가 방송에서 한 말이 기억난다. 행복을 목적으로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미래의 행복이란 실체가 없는 것으로 행복이라는 집착과 허울에서 벗어나자고. 맞는 말이다. 우리 모두 남 눈치 보지 말고 화나면 소리치고, 슬프면 울고, 재미나면 웃자.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 아니 인생 일 것이다.  

 

역시나 생각 없이 쓰다 보니 책 내용은 생각이 안 나고 자꾸 옆길로 빠져 시간만 낭비한 꼴이 되버렸다. 하지만 괜찮다. 나 혼자 뻘짓 한 거에 만족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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