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상의 마지막 밤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3
로랑 고데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뭐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한때 인기 드라마의 명대사처럼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마치 그리스 비극이나 신화를 읽는 것처럼 문장은 장엄하고 비장하다. 하지만 과장되거나 작위적이지 않다. 물론 주제는 통속적이고 대중적이다. 아들을 잃은 부모의 고통, 슬픔, 분노, 희생, 사랑, 그리고 죽은 아들의 환생과 복수는 인류가 시작된 이후로 여러 예술 작품에서 다뤄온 낯설지 않은 소재와 주제들이다. 문제는 이 재료들을 어떻게 맛나게 요리해내는냐가 관건일 지언데 로랑 고데의 [세상의 마직막 밤]은 인간의 삶과 죽음의 영원한 숙제를 기교나 재주에 기대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힘있고 무게있는 문장으로 실로 오랜만에 내 마음을 격정적인 감동으로 푹 적셔 주었다. 물론 작품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역자의 탁월한 번역에도 찬사를 보낸다.
억지로 눈물을 짜내기 위해 여기저기 감동적인 클리셰 장치를 심어놓은 영화에 지쳐서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뚝심있게 밀어 붙이는 영화를 찾고 있는 독자라면 받드시 읽어야할 책으로 주저없이 추천한다.
등교길 아들 (피포)의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볼수 없었던 아버지(마테오)의 자책과 절망적 고통과 - "그(마테오)의 눈앞에서 절망 내지는 사악함이 함꼐 방황했다" (p61) - 아들의 죽음의 복수를 남편 마테오에게 요구하는 어머니(줄리아나)의 슬품과 극도의 분노 - "나(줄리아나)를 둘러싸고 울던 모른 사람들을 나는 저주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한다. 피포는 여기에 없다" - 는 우리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시련으로 마테오의 복수 실패와 동시에 줄리아나는 집을 나가 버린다.
하지만 [세상의 마지막 밤]의 압권은 마테오가 신부 마체로티와 함께 연옥 (지옥)의 세계로 들어가 피포를 구출하는 장면이다. 우선 지옥에 대한 현장감 있는 묘사는 망령들의 고통과 탄식을 느끼기에 충분하고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마지막 삶에 대한 망령(망자)들의 지푸라기 같은 희망과 집착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우리(산자)들의 기억속에 아직 남아있는 망령들은 빛을 발산하고 무(無)를 향해 미세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미 잊혀진 망령들은 빛 없이 퇴색되어 나선 중심을 향해 전속력으로 미끄러진다"
[세상의 마지막 밤] p226
하지만 뭐니해도 최고의 장면이 마테오가 자신을 희생하고 피포를 지옥에서 구출하는 장면이다. 오직 망자만이 지나갈 수 있는 내세의 문에서 신부 마테로티의 죽음 - 정확히 말하자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잠깐 외출 나온 망령... 나중에 다시 살아난다. - 지옥에서 아들 피포를 구출했으나 정작 이 문을 다시 통과해서 현재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목숨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의 아비 마테오와 또 다시 생과 사의 이별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아들 피포의 울부짖음은 아들을 하나 둔 아비인 나의 심장을 말 그대로 후벼팠다.
"문은 너를 다시 내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네가 영혼 하나늘 가져왔으니 문은 그 대가로 생며을 요구한다...
(중략) 한순간 그들은 흥분한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언제나 부족할 것이고 그 부채와 더불어 살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마지막 밤] p236
그러면 줄리아나는? 아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들의 상실과 복수 실패의 원흉으로 마테오를 증오하고 그의 곁을 떠나버닌 비정한 아내 줄리아나는 피포가 구출되던 그날 발생한 나폴리의 대지진으로 마테오가 실종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자신의 가슴을 도려낸다.
"나는 나 자신을, 나를, 추한 여자 줄리아나를 저주한다...(중략) 내 남자들은 쓰러졌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돕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따라가지도 않았다. 나는 그들을 내 영혼에서 추방했다...(중략) 이제 나는 칼을 들고 내 두 젓가슴을 도려낸다. 첫 번째로, 내 아들에게 수유하던 젓가슴을 도려내 한때 나도 엄마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것을 언덕 돌 위에 놓아둔다. 두 번째로, 내 남가작 핥아 주던 젓가슴을 도려내 한때 나도 그의 연인이었던 사실을 기억하며 언덕 돌 위에 얹는다.
[세상의 마지막 밤] p284
그리고 아들 피포가 찾아갔을 때 치매에 걸린 줄리아나... 하지만 만남은 둘이 아닌 셋이었다.
우리는 다시 셋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머니 당신이 앓는 치매의 방에 아버지와 함께 들어섭니다...(중략)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 사람 모두, 시간이 길게 느껴집니다. 행복한 날, 느리지만 은혜로운 동작으로, 당신은 두 팔을 벌립니다.
[세상의 마지막 밤] p284
말은 더 이상 필요없다. 나의 보잘 것 없는 졸필이 소설의 미래 독자들에게 폐가 될까 걱정될 뿐이다. [세상의 마지막 밤]의 모든 대사들, 특히 독백투의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과 비정한 신에 대한 고전적인 비장미에 난 홀딱 반해 버렸다. 한마디로 닥공(攻)이 아닌 무조건 닥독(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