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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도가니 : ① 주로 쇠붙이를 녹이는 데 쓰는 단단한 흙이나 흑연 따위로 만든 우묵한 그릇. <동의어> 감과(坩堝).
② ‘흥분·감격 따위로 여러 사람이 열광적으로 들끓는 상태’의 비유.
사전을 찾아 보니 '도가니'는 위의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순식간에 책을 다 읽고서 기껏 한다는 일이 사전을 찾아보는 일이었다. 그러고도 한동안 어쩌지를 못하고 그저 마음이 어수선하기만 하다.
사실 이 책을 주말에 읽고자 마음먹고 챙겨두었으나, 막상 그 첫장을 넘기기가 두려웠다. 이미 살짝 알려진 내용으로 볼 때, 그닥 쉽게 그리고 마음 편하게 읽힐 거 같지가 않아서였다. 그러나 소파 한 귀퉁이에 놓여진 채 내 신경을 거스르던 책을 주말 늦은 밤에 기여코 손에 들고 말았고, 이내 잠까지 미뤄둔 채 순식간에 '도가니'속에 빠져버렸다.
공지영의 소설이 지니는 미덕인 가독성이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다만, 소설의 전개와 문맥 전달의 가독성에도 불구하고 난 자주 이 책을 읽다고 덮곤 했다. 그것은 미리 예상되는 사건의 줄거리를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아서이다.
저자가 말했다시피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기에 소설에서 말해주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 맞닥뜨리는 세상은 학창시절에 배웠던 '정의가 승리한다', '사필귀정' 같은 말들은 그 말을 사용하는 자에 따라서 진리가 되기도 하고, 쓰레기통에 처박혀야 할 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결과에 대한 평가를 늘 수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 너머에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을 어둠의 세계, 공포의 세계, 위선과 가증과 폭력의 세계를 늘 가늠해보곤 했다. 그러나 그런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지 않았다. 그리고 힘도 들었다.
언제가부터 장애인을 표현하는 용어로 '장애우'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그 용어를 쓰는 측에서는 이 세상을 같이 살아가는 동등한 친구,라는 의미를 노골적으로 표현으로써 이미 친구가 아닌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난 생각한다. 그리고 운연한 기회에 정작 장애인들은 보통사람들이 선심쓰듯 골라서 내뱉는 '장애우'라는 표현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내 생각이 옳았다고 여긴다. 특별히 그것을 의식하고 꼬집어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결핍이다. 더 마음을 내어서 그들을 이해하는 척 할 필요도 없고, 그들은 따로 특별한 대접을 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은 말한다, 그저 우리는 사람이라고, 기뻐할 줄 알고, 모욕을 느낄 줄도 알며, 서로 마음을 나눌 줄도 아는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단지, 육신에 장애가 있다는 것이 다를 뿐.
공지영이 이번 소설에서는 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문제와 그리고 가진 자가 약자에게 무차별적으로 해대는 성폭행을 포함한 갖은 폭압에 대한 문제를 들고 나왔다. 작가는 어떤 신문기사 한 줄을 보고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도가니>를 쓰는 동안, 많이 아프고 신열에 들뜨고 고통스러웠다는 저자의 고백은 작품이 산고의 고통이라는 흔한 표현에 기댄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왜냐하면 나 또한 못지 않게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난 살아오는 동안 대체적으로 정의나 약한 자, 의 편에 서있는 줄 알았으나, <도가니>를 읽어가는 동안, 무진시의 이기적이고 가진 자들의 집단인 경찰, 교회, 시민, 시의원, 건설업자, 병원장 사모님, 등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모습에서 나의 자화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점검해본다. 나는 과연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165p
진실은 말이야, 그걸 지키려고 누군가 몸을 던질 때 비로소 일어나 제 힘을 내는 거야. 211p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거짓말이다. 246p
언제나 공포는 상상할 때 더 크다는 것을 말이다.269p
자본이 소화시키지 못하고 자본에 패배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야만에마저 패배당한 그런 인간이 될지도 모르지.281p
"삶과 현실은 언제나 그 참담함에 있어서나 거룩함에 있어서나 우리의 그럴듯한 상상을 넘어선다."(작가의 말)
자꾸만 느슨해지는 나의 삶에 긴장을 주어야 겠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내 블로그 대문에 걸린 글을 빌어서..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하여 오늘도 싸운다는 서유진처럼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의 삶, 그 삶을 위해 오늘도 난 비록 작은 투쟁일지라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굳게 믿고 실천하는 자의 것이기에. 그리고 안개는 뜨거움으로 가득한 태양이 뜨기만 시작해도 사라져 버릴 것이 분명하기에. 우리는 단단한 쇠붙이도 녹이는 열기가득 채운 도가니가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