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카메라를 보세요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평점 :
‘전혀 모르는 사람의 시간을 사용하되 그사람이 시간을 낭비 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것.‘
이 단편집의 저자인 유명작가 커트 보니것의 소설 창작원칙이라고 한다.
멋진 원칙이다.
다른 이들의 시간에 대한 존중과, 은연중에 결코 시간낭비로 치부되지 않을거라는 자기 작품에 대한
당당한 자신감.
그의 작품을 읽고나니 충분히 저런 말을 할 자격 있는 작가임을 인정하게 된다.
솔직히 그의 이름은 알고있었지만(그런데 커트 보니것, 커트 보네거트, 컷 보네것 등 출판사마다 다른 그의 이름 표기는 통일하면 안되는 건가요?ㅜㅜ),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된 건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이다.
하루키의 책을 읽다보면 그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가로 그의 이름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필력이나 작품에 대한 칭송도 여러번 언급되기 때문에 호기심을 갖게 될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심히 유감스럽게도 내가 애정하는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라 해서 그 작품이 반드시 내 취향과도 부합되진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은 터라 계속 읽어? 말아? 하고 있었다.
그러던 내가 이 책을 읽기로 한 건 한결같이 재밌다는 감상을 쏟아내는 독자들 서평의 힘이 컸다.
설마 이 많은 독자들이 모두 나와 다른 관점에서 소설을 읽는 건 아닐텐데, 대부분 일단 재밌다는 감상이 첫번째인 걸 보니 최소한 지루하진 않겠구나
라는 안전보장(?)의 확신이 있었던 거다.
다행히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고, 단편집 치곤 꽤 두꺼운 책임에도 순식간에 다 읽었을만큼 수록된 작품들 모두 편차 없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장점이라는 블랙유머.
유머에는 열광하는 나지만, 어설픈 유머는 차라리
성실한 지루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특히 블랙유머라는 건 유머라고 불리는 어떤 감각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조건들이 충족되어야한다고 믿기에 보니것 작품의 특징이 블랙유머라는 글을 읽고는
실망과 감탄중 어느 쪽일지 내심 기대를 가지고 읽었다.
결론적으로 엄청난 감탄과 찬사가 저절로 나올 정도는 아니었지만(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개인취향을 기준으로 한 만족도에 따른 거다), 폐부를 찌르는 서늘한 유머로 웃음 터지게 만드는 문장 대신 전체적으로 작품에 흐르는 분위기나 여지 없이 기대와 다르거나 앞서버리는 반전, 독자의 예상을 비웃듯 전혀 다른 길로 흐르는 전개 등에서 그의 유머감각(블랙유머 인정)은 빛을 발한다.
특히 오래전 화석에서 발견된 예술적 감성을 지닌 턱없는 개미들의 멸종 원인을 찾아낸 고고학자
형제를 시베리아로 유배 보내고, 그들의 연구결과를 거꾸로 편집해 공산주의의 당위성으로 만들어내는 러시아 관리의 이야기에서 그의 블랙유머는 정말 놀랄만큼 반짝인다.
연인이라 생각했던 바람둥이 음악가에게 버려진 앨런이란 소녀가 그의 다른 여자들처럼 절망이나 비난에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6개월동안 예민한 음악가의 주변에 밤낮으로 꾸준히 소음을 일으킴으로써 그 소음에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진 음악가가 그녀를(엄밀히는 그녀가 만든 소음들을) 잃지않기 위해 어쩔수 없이 그녀와의 결혼을 선택하게 만드는 웃픈 이야기에도,
평범한 주부였다가 이웃들의 위선을 소설로 써 유명작가가 되었지만 외톨이가 된 아내와, 아내의 소설 때문에 해고된 남편이 최악의 상태까지 몰려 서로를 미워하다가, 어느날 길을 지나던 외판원을 만나면서 자신들을 전혀 모르는 그에게서 위로받고 서로를 돌아보게 되며 예전의 애정을 회복하기 시작하는 이야기에도,
평범한 소시민 부부가 일년동안 모은 돈으로 결혼기념일 호사를 누리기 위해 찾은 식당에서 멸시를 당하고 살인까지 목격하지만, 그 식당의 주인이자 도시의 지배자인 범죄자에 의해 도리어 살인자로 몰려 쫒기다가, 결국 상상도 못했던 전개 속에 결국 악을 응징하고 소중한 일상을 되찾는 이야기에도..
작가 커트 보니것의 장점이라는 날카로운 블랙유머의 강력한 힘과 소설적 매력이 넘칠만큼 충분히 담겨져 있다.
다른 단편집들과 달리 책 제목인 ‘카메라를 보세요‘란 제목의 작품이 책의 거의 끝부분에서야 나오는 것도
신선했고, 이야기들 대부분이 예측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도 아주 흥미로웠다.
거의 1세기 전에 태어나(1922년생이라니!) 이미 고인이 된 작가의 작품이 이렇게 재미있고 공감을 느끼게 해주다니..
예술이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 감각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며 끄덕이게 된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조롱한 부자들의 안일함과 이기주의, 권력자들의 무자비한 탐욕과 위선, 순수학문까지 위협하는 체제의 부당함이 이 시대에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서글프고 유감스럽지만,
소박한 일상이 주는 기쁨과, 따뜻한 관계를 통해 얻는 삶의 소중한 가치는 언제나 변함없이 지켜질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지않은 위로와 격려가 된다.
장편도 이렇게 술술 읽히고 재미있을까?
그렇다면 다른 작품들도 설레는 마음으로 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