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댈은 TED 강의에서 '민주적 토론'이라고 하는 잃어버린 기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가 플루트를 가져야 하는가? 이 문제에 착수하는 청중과 거기에 대한 유머러스한 센댈의 통박이 오가며 세련되게 세공되는 정의 과정을 보면 아주 흥미롭다. 이것은 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자격'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 논의에서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궁금한 이야기 Y」(SBS)에는 그런 올바름에 대한 우리의 어려움과 곤란이 나온다. '속 터지는 만두전쟁'이라는 제목의 궁금한 이야기로, 만두 가게와 떡집이 벌이는 '만두' 전쟁이라는 기이한 상황을 전달해 준다. 바로 옆에서 떡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서 정작에는 만두집과 만두 경쟁을 벌이며 만두 팔기에 여념 없는 떡집과 그런 떡집과 경쟁을 벌여야만 하는 만두 가게의 사정이 정말 '속 터지는' 상황을 연출해 낸다. 그 속 터지는 만두 경쟁의 사정은 이렇다. (다만 방송과 3자라는 거리감의 한계상 진실한 내막은 불투명하다는 한계를 생각해야겠다.)


 떡 장사가 대목인 명절 시즌에 바로 옆에 떡집이 있음에도 만두 가게에서 대목 시기에 떡을 같이 팔았고, 여기에 기존의 만두 가게에서 일하다 불만이 생긴 기술자와 합을 봐서 떡집이 만두 장사를 차렸다는 것. 그래서 바로 붙어있는 옆집을 서로 비난하고 출혈 내기에 바빠 정작 본업인 '장사'는 뒷전으로 물러난 상태. 심지어 제 살 깎기도 모자라 단속 신고에 도둑질까지. 경쟁을 넘어서 사활을 건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으로까지 치닫는다. 방송은 여기에 대해 그 나름의 솔루션으로 '만두의 차별화'를 제안했는데, 그 이후의 소식에 의하면 이마저도 파투난 상태였다고.. (접할 수 있는 최근 정황은 그렇고, 문을 닫았는지 파투난 이후의 이야기는 없다.) 과연 이 상황에서 찾을 수 있는 '정의'란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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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감벤은 『예외상태』에서 법에서 차지하는 '예외상태'를 고찰한다. 여기서 예외상태는 지형학적으로 객관적인 긴급사태와 주관적 긴급사태 양자가 충돌하는 지점에 자리한 모순적 상황, 책에서 사유점으로 지정하는 '유스티티움'처럼 법이 보증하는 법외권, 법적 공백 상태로서의 존재한다. necessitas legem non habet. 긴급 사태는 법률을 갖지 않는(것을 법률로 가진)다. 그간 논의에서 난점으로 여겨온 이러한 예외성의 모순점에 대해 아감벤은 "오히려 법이 그것을 통해 아노미와 합체되는 하나의 픽션"이라는 위성학적 해부로 진단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그런 '신비적' 요소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요소는 예외상태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것이야말로 해명을 필요로 하는 문제"라고 질문함으로써 그간의 문제 논의 방향에 수정을 가한다.


 그는 예외성의 형태를, 그것은 "혁명이나 헌정 질서의 사실상의 수립과 더불어, '비합법적'이지만 절대적으로 '법률적이고 헌법적인' 하나의 조치로 모습을 드러내며, 이는 새로운 규범(혹은 새로운 법질서)의 생산으로 구체화된다"고 말한다. 슈미트 이론에 대한 논평으로 반복하자면 "법 안에 기입되어야 할 것이 본질적으로 법 바깥에 있다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법질서 자체의 효력 정지"이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사유점은 "극한적인 상황에서 '법률-의-힘'은 규정 불가능한 요소로서 부유하는 것으로, (위임 독재로서 행동하는) 국가 당국에 의해서도 (주권 독재로서 행동하는) 혁명 조직에 의해서도 요구될 수 있다. (따라서) 예외상태란, 법률 없는 법률-의-힘이 핵심이 되는 아노미적 공간"으로 해부한다. (이 단락을 나타내는 '법률'에 대한 독특하고도 중요한 기호법이 있는데, 적용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즉 예외상태란 법률-의-힘으로 역할하는 '-의-힘'이라는 위성학적 근거이자 작동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논리와 실천이 식별 불가능해지는 문턱을 그리고 고로스 없는 순수 폭력이 아무런 현실의 지시 대상 없이 발화될 수 있는 양 행사되는 문턱을 나타낸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재구성되는데, "어떤 법적 규정도, 결정도 결여되어 있는 곳에서 어떻게 그런 지휘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왜냐하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로마 시민을 죽이는 것을 처벌할 수 있느냐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여기에 대해 "문제 전체가 잘못 제기되어 있다"는 말로 예외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스티티움 기간에 행동하는 자는 (아노미 상태에서 이루어진 인간의 행동에 어떻게든 이름을 부여하고 싶다면) 법을 집행하지도 위반하지도 않으며, 그저 법을 집행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행동은 단순한 사실일 뿐이며, 유스티티움이 끝난 후 그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당시의 상황에 달려 있다. 하지만 유스티티움이 계속되는 한 그의 행동을 법률적으로 절대 규정할 수 없으며, 그것의 본질 -집행인지 위반인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적 행위인지 동물적 행위인지 아니면 신적 행위인지- 을 정의하는 일은 법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아감벤은 여기서 벤야민의 '순수'라는 개념에 착수한다. 그는 이에 대해 "그것은 '순수한 수단',  즉 '목적 없는 수단성'이라는 역설적 형상"으로 말한다. 논의를 단락하고 그 의미를 우선해 본다.



언젠가 인류는 마치 어린 아이가 쓸모없는 물건들을 갖고 노는 것처럼 법을 갖고 놀 것이다. 이는 법을 경전에 따라 사용하는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런 사용에서 법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이다. (…) 말과 행위 사이에는  예외상태 속에서 법과 신화의 잠재력이 포획하려 해온 인간적인 쓰임새와 실천만이 존재한다.



 말과 행위에서 비롯됨은 완전하지 않다. 그것은 모더니티적 기획의 완성도 아니다. 그건 생명의 활동(vita activa)이다. 아감벤은 끝으로 말한다.



 예외상태는 본질적으로 텅 빈 공간이다. 법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은 인간의 행동이 삶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은 규범 앞에 놓이게 되는 공간 말이다. 그렇다고 중심이 텅 빈 이 기계가 작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규명하려 노력해온 것은 오히려 이 기계가 거의 중단하지 않고 항상 점점 더 기능을 넓혀왔다는 사실이다. 



 "법학자들이여, 어찌해 그대들 소임 앞에서 입을 다물고 계시는가?"




 책을 읽는다는 의미를 다시 점검해 보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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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환-5·18 항쟁 시기에 일어난 일가족 살인사건: 전쟁, 학살, 기억



 이 연구에서는 5·18 광주항쟁 시기에 일어난 '일가족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에서 5·18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을 재성찰해보고자 한다


 는 목적으로 쓰인 논문이다. 그는 5·18 광주항쟁의 '익히 알려진 신화 가운데 하나'로 "시민들의 무장투쟁에도 불구하고 어떤 범죄도 없이 질서정연한 자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며, 이런 신화에 반하는 일가족 피살사건은 눈에 띄지 않았거나 부각되어서는 안 되는" 지점에 바로 자리하는 '일가족 피살사건'에 주목한다. 이것은 권혁태 교수가 히로시마/나가사키라는 유일 피폭국의 '언설' 속에서 자취를 감추어야 했고 오로지 '미래 평화'라는 언설 도상을 통해서만 자기 피해 사실을 말하고 보증받을 수 있었던 피해자의 삶과도 통한다. ('일가족 피살사건'과 유일 피폭국 언설의 역설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논문들을 참조.) 누구나 기억하는,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권혁태-히로시마/나가사키의 기억과 '유일 피폭국'의 언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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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실증적 작업, 여기서 탈락하는 '기억하는 주체'라는 망각된 지위를 복원하는 역사학의 기억론적 전회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언어론적 전회의 소산물이기도 하다.) 논문에서의 응집된 표현으로 전하자면 "그동안의 논의에서 무엇이 선택되고 무엇이 배제되었는지 비판적 재검토가 진행되는 것이야말로" 사안의 의미다. 이러한 작업의 의미 선상에서 주목하는 것이 피에르 노라의 '기억의 장' 프로젝트이다. 논문은 이 일련의 프로젝트에 대해
















 당연하게 여겨졌던 프랑스 '국민감정'의 기원과 생성을 연구하기 위해 "집합적 기억이 뿌리내려져 있는 중요한 '장소'(lieux)를 분석함으로써 프랑스를 상징하는 것의 광대한 토폴로지(topology, 지세학)를 창조하고자 한" 프로젝트


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민족주의에 대한 역사학의 '상상된'이라고 하는 것과 연동돼 맞물리면서, 당연하게, 그리고 "전통적이며 강고하게, 일원적으로 표상되어온 프랑스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상대화하려고 했다는 것"에서 논자는 그 의의를 찾는다. 이질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생득적 권리란, 오히려 생후적으로 체험되고 감각되는 역설에 자리한다는 것이다.


 논문은 이러한 프로젝트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편, 이 '프랑스'적 프로젝트에서 발견되는 "프랑스 식민지를 둘러싼 요소가 대부분 '기억의 밖'으로 쫓겨나 버리고 말았다는 것은, 단순히 깜박 잊어버렸다거나 능력이 부족했다는 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상사적 개연성을 지니고" 있음을 한계성으로 지적하고, 그러한 논의 차원을 끌어 안으려면 


 '기억의 장'의 전개 속에 당초부터 있었던 그 암묵의 국민주의적 한계를 철저히 극복한다는, 즉 '내셔널 히트로리를 배워서 버린다'는 시도를 가능한 한 밀어붙인다는 자각을 가지는 방법밖에 없다.


고 진단한다. 이것에 대해 '기억하는 국민'이 수반하는 기억의 누락점-"에르네스트 르낭은 "국민의 본질이란 모든 개인들이 많은 일들을 공유하고 또한 전원이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단언했다-을 "언제든 새로운 기억이 접붙여지고 지형도가 재편성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야말로 확정적이지 않은 열린 장소로서의 동아시아, 유동적인 열린 의미의 영역인 기억을 논의한다는 것이 지닌 의미"라고 덧붙이고 있다.























※논문은 『역사비평』(102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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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를 부르짖던 나는 현재 정의로운 사람인가 Y/N"



 지망이 엇갈린 탓에 친구들과 헤어지게 된 이제 갓 중학생이 된 당시의 내게 가장 큰 고민은 역시 학교에서 같이 생활할 '새로운 친구'였다. 입학식을 치르고 들어선 그 서먹서먹한 교실의 냄새와 정경들. 종이 치면 하나둘씩 뿌리를 찾듯이 친한 친구들을 찾아 교실을 떠나는 학생들의 틈틈이 사이로 나는 가만히 앉아 어떻게 하면 새로운 친구를 사귈까, 라는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어떤 계기여서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다행히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이 편한, 이름이 '봉준'이라는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내 '느낌'은 순식간에 전복돼 '불쾌함'으로 뒤바뀌었다. 시간이 차차 흐르면서 이런저런 친구들을 알음알음함에 따라 실은 '그 친구'가 좀 모자라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리송한 기분에 휩싸였다. 물론 태도는 단호하게 결정되었다. 나는 차츰차츰 싫은 내색을 겉보이며 거리를 두었다. 나는 완벽하게 '이들'로 동화되었다. 한편으로 나는 완벽히 그들이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시범적으로 '특수학급'을 운영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몇몇 수업을 같이 받음으로 해서 일반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에서 였는데, 우리라는 사회가 만든 적응 준칙은 '놀림'이었다. 다만 특이한 것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이 모두 '웃음'이라는 범적으로 뒤엉켜있다는 것, 그것이었다. 모두가 반성을 비운 채로 동참할 수 있었고, 모두가 즐거울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당사자가 겪는 곤란이란 '말하기 어려움'이었으므로. 



 율라이는 따따르 언어로 이반 꾸즈미치의 질문을 되풀이해 던졌다. 그러나 바쉬끼르 인은 똑같은 표정으로 그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할 뿐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좋아.] 사령관이 말했다. [입을 열게 해주지. 얘들아! 저놈의 멍청한 줄무늬 옷을 벗기고 등짝을 후려쳐라. 율라이, 매운 맛을 보여 주라고.]

 두 명의 늙은 병사가 바쉬끼르 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는 선생님들의 질책과 꾸중에 항상 준비된 그 대답, "노는 건데요?"라는 저열성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렇지만 주책을 부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동참할 마음도 없었다. 초중고 내내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는 -자기표현에 소심하지만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착한 아이의 전형이었다. 나는 항상 그 (있지도 않은) '거리감'에 주의해 행동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심성이, 또는 근본은 착하다는 말을 별 어려움 없이 자주 듣는다. 그러나 이 질문은 언제나 나를 당혹스럽게 물어와 나를 어지럽게 뒤흔든다.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일까?... 나는, 정의로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에게 나빴어야 하지 않았나?"



 뒤늦게서야 생각난다. 우리가 벗기고 벗겨서야 혀 대신에 튀어나온 힘겨운 (그마저도 '대롱대롱'거리는) '작은 나무토막 하나'가 "하지마"였다는 것을. 내 진실한 거리감은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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