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은 『사회계약론』(사회계약, 또는 정치권의 원리)을 필두로 한 루소의 정치 철학을 고찰하면서, 그가 '민주주의 이론가들에게서 보이는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습관을 다시 소개했으며, 일반의지로 대표되는 그의 학설은 지도자와 국민의 신비한' 일체감을 부여한다고 비판한다. 일반이라는 의지적 측면이 주권이라는 양태적 측면, 즉 일반지가 되면서, 결과적으로 관철은 부차적이고 (일반) 관찰이 선차적으로 놓이기 때문이다. 러셀은 루소가 "가슴, 당시의 용어로는 '감수성'에 호소한 데서 기인했다"며, 그러한 루소의 면모는 "히틀러"를 통해 현대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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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먼젓번에 읽었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비해 다소 딱딱하고 무겁다고 느꼈다. 눈대중과 날림으로 읽은 탓에 어디까지가 루소의 견해인지 불투명하게 나의 흔적으로 남았다. 그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루소는 책에서 자신이 "군주도 아니고 입법자도" 아닌 탓에 "오히려 그렇기에 정치에 관해 글을 쓴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정치적인 이들이야말로 가장 비정치적이라는 그의 발언은 신선함을 넘어서 놀랍기까지 하다. 그는 1부의 전제이자 책 전체를 아우르는 서발로, "나의 목소리가 국가의 일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아무리 약하다 할지라도, 자유국가의 시민이자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투표권을 가진 것만으로도 정치에 관해 알아야 할 의무를 나 자시넹게 부과하기에 충분하다"라고 부치고 있다.
우선, 그는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자유로웠는데, 어디서나 노예가 되어" 있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탐구한다. 루소는 여기서 "자신을 달느 사람들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기실 그들보다 훨씬 더 노예가 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주인이 '보다 노예적'이라니. 어째서인가? 「초기 사회에 관하여」라는 장에서 루소는 가정을 통한 정치 사회의 스케치를 그린다.
자식은 자신의 생명 보존에 필요한 만큼만 아버지에게 매여 있다. 그 필요가 없어지면 곧 그 자연적인 관계는 사라진다. 자식은 아버지에 대한 복종의 의무에서 벗어나고, 아버지는 자식을 돌보아야 할 의무에서 벗어나면, 그들은 모두 똑같이 독립을 되찾는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결합되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연적인 게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 그 자체는 오로지 계약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35)
아버지라는 권위는 자식(과의 계약)에게서 찾아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루소는 "국가의 우두머리는 아버지와 흡사하고 인민은 자식들과 흡사"하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라고는, 가정에서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아버지로 하여금 아이들을 보살피게 하지만, 국가에서는 우두머리가 인민들에게서 지배한다는 기쁨이 자식에게 갖는 아버지의 그런 사랑을 대신한다는 것뿐이다." (36) 결과적으로 우두머리의 원천적인 기쁨은 "먼젓번의 힘을 이겨낸 힘은 모두 그 먼젓번 힘의 권리를 계승하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권력은 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38) 루소는 그것을 "인정한다." 단,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하는 한에서 그는 인정한다: "노예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노예가 되기 위해서 태어나는데, 이보다 더 분명한 사실은 없다." 달리/같이 말해서 "내가 그 세 군주의 직계 후손이어서, 아니 어쩌면 장손가문이어서 자격을 확인해 보면 인류의 적법한 왕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36, 37) 결국,
이러한 선천적인 노예의 존재는, 선천적이지 않은 노예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화적) 폭력이 최초의 노예들을 만들었으며, (신적인) 그들의 비굴함이 그 노예 신분을 영속화시켰던 것이다. (37)

(착란. 그것은 현실의 내밀한 이름이다. '귀하신 몸' 사건은 마냥 현실이 그러한 (『왕자와 거지』라는 허구적인 공간과의) 거리에 안주할 수 없다는 현실 그 자체를 투영해 주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루소는 (그 악명높은 전체적인) '일반의지'를 등장시킨다. 그것/곳은 "시민 각자가 자신의 의견에 따라 소신을 밝히는 것(/곳)"으로(62), "인간의 모든 정념을 이해하지만 그 어떤 정념도 느끼지 않으며, 우리 인간의 본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면서 그것을 철저히 알고 있으며, 그의 행복이 우리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복에 큰 관심을 쏟고자 하며, 끝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먼 훗날의 영광을 준비하면서 이전 세기에 노력하고 다음 세기에 그 결실을 향유할 수 있는 그런 뛰어난 정신적 존재", (74) "숭고한 이성"이다. (77) 의지는 "공익이 무엇인지 알지만 배척"하고, 일반은 "공익을 원하지만 잘 분별하지 못한다." 따라서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지를 이성에 복종하게 할 필요가 있고, 공중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줄 필요가 있다." (73) 이성의 공적 사용, 그것이 바로 지성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책을 부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연구들에서 매번 내 나라의 정부를 사랑할 만한 또 다른 이유들을 발견하게 되어 기쁘다!" (34)
정부를 위해 인민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정부를 희생시킬 준비가 항상 되어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98)
공권력은 이용이 아니다. 그것은 '사용'이다. 그는 「보편적 의지는 소멸될 수 없다는 것」을 확언한다. "심지어 돈을 받고 자신의 투표권을 팔더라도,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전체 의지를 소멸시키지 못한다. 그는 그 의지를 피할 뿐이다. 그가 범하는 실수는 문제의 형태를 바꾸어 질문을 받은 것과 다른 답변을 한다는 점이다. 투표를 하면서 이런저런 의견을 통과시키는 것이 국가에 유익하다고 말하는 대신, 어떤 한 개인 또는 어떤 한 당파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146) 루소는 당부한다. "이 격언을 기억하라. 자유는 획득할 수는 있으나 결코 되찾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는 보편 의지의 "인격체"로 우리를 불러일으킨다. (68)
언제나 보편적 의지를 묻고, 또 그것이 답변하도록 하는 데 있다.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