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당시를 체험했던 사바찐의 행적을 추적해 역사를 구성하는 논문이다. 사바찐은 이른바 현대라는 건축 양식을 도입하고 건설하는 건축사(토목사)였지만, 이런저런 시비에 휘말리면서 그 위치가 "고종을 보호하는 외국인 대궐수비대"로 바뀌게 된다. 이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사건이 있은 바,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왕정의 방도였다. 외국인을 궁에 상주케 함으로써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일본의 셈을 이용한다는 나름의 궁리였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예상과 믿음과는 다르게 현실은 을미사변으로 나타났지만 말이다. 


 을미사변 당시 사바찐은 호출을 받아 현장에 있었다. 심지어 궁을 휘젓고 다니는 무리를 직접 마주하기도 했으며, 그들과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한 일종의 '타협'도 그 과정에서 맺었다. 그는 무사히 현장으로부터 벗어난다.


 논자는 사바찐이 탈출한 이후 시해에 대해 물어오는 질문에 '그 당시에 없었다, 즉 그 이전에 현장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사바찐의 진술에 문제를 제기한다. "사바찐의 진술에 따르면 새벽 5시 45분 건청궁을 출발한 그는 정동 소재 러시아공사관에 6시 30분 도착해서 베베르 공사와 슈테인 서기관에게 자신이 목격한 것을 증언했다. 아무리 느린 걸음으로도 걸어도 건청궁에서 광화문까지 15분, 광하문에서 정동 러시아까지는 15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바찐이 발걸음을 늦췄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여기에 '시해 당시'를 기록하는 몇몇 증언에서 '당시에' 발견되는 사바찐의 행적들은 그러한 사바찐의 진술을 불온전하게 만든다고 논문은 지적한다. 따라서 논자는 이를 총체적으로 종합해 "사바찐은 왕비가 암살될 시각인 5시 50분 전후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사바찐은 왜 기억을 누락 및 왜곡했을까?' 라는 질문이 뒤이어 온다. 논자는 "(사바찐)의 보고서에서 오카모토를 '매우 고상한 외모', '단정한 양복 차림', '당신과 같은 신사' 등으로 폭도가 아닌 신사로 묘사했다"는 점을 주목하고, 이후 "목격자" 사바찐이 시달려야 했던 불안에 주목하며 그의 궤적을 따라간다. 



 (오카모토와의 협상이 있은 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그 순간, 사바찐은 곤령합 마당으로 들어오는 한국인과 눈을 마주쳤다. … 이 한국인은 사바찐을 보고 놀란 나머지 '아'하며 탄성을 질렀다. 그는 사바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 한국인은 궁궐 안에서 비서를 담당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너무 놀라 잠시 멈칫했으나 곧바로 곤령합으로 들어가는 일본자객에게 접근하며 활기차게 무언가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 사바찐을 알아본 그 한국인은 오카모토에게 끈질기게 뭔가를 설득시키려고 애썼다. 그 한국인은 사바찐이 풀려난다면 사바찐을 고발한 자신에게 닥칠 혹시 모르는 불이익을 생각했던 것 같다. 사바찐은 곤령합의 유일한 서양인 목격자인 자신을 풀어주어 발생하는 위험을 열심히 설명하는 것으로 보였다.





















※논문은 《역사비평》(91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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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의 발제성만 읽었다. 해당 논의는 푸코의 '담론의 질서'를 통해 종횡하는데, 그 의미를 "'사회로부터의 담론'이 아니라 '담론으로부터의 사회'가 형성되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련의 정치 형태를 보면 정치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흥미롭다. 오늘날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척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공유되는 것으로부터 공통되게 느낄 수 있는 '웃음'이라는 콘텐츠다. 오유는 진보고, 일베는 보수라는 이 분법이 그렇게 나누면서도 동질적이게 묶이고 뒤섞이며 헝클어지는 것은 웃음이다. 서로는 서로를 웃음으로, 즉 도착적이고 강박적인 웃음 대상으로 삼는다. 쌍방 모두 일그러진 표층 위에 존립한다. 이것은 하나의 외상적 질료인데, 입식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희생을 반드시 수반하기 때문이다. "웃긴가? 그럼 너도 이젠 우리로 불릴 수 있다. 맘껏 즐겨라. (단! 네가 불쾌해 하지 않으리라는 확약 아래에서.)" 이제 정치의 사활은 오직 자극에 대한 반응, 즉 자세에 뒤따르는 것이다. 정치는 오직 '쾌/불쾌'의 척도이다. 여기서 통용되는 유일한 원칙은 단 하나이다. "웃겼는가?" 근래의 '밥 노스' 사건은 그 불분명하게 부유하는 덩어리를 표층한다. 일상과 일베의 구분과 경계는 옅어져 간다. 웃음은 내면의 심층을 파고들어 잠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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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의학 윤리 - 책임 원칙의 실천
한스 요나스 지음, 이유택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더 없이 실증적이고 헤맬 필요 없이 우리의 직관으로 보이는 대상성을 갖춘 의학 시대는 우리의 낙관을 자신의 '진보'라는 운동성으로 해명해 주고 있다. 우리는 그 어디에서나 의학의 발전이라는 희망의 조치(그것조차도 의료 행위인데)가 어디서나 꺾이지 않고 낙관적으로 주입되는 병상의 모습을 수고 없이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의학은 그 자체로 (인간의) 완결성이며, 다만 현대가 처한 곤란이란 인간이 그 완결을 헤아릴 수 없는 '턱없이 부족한' 진보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대에도 여전히 (빈곤한) 소박함이 완벽히 망각하는 것은 아니다. 불로와 영생에 대해 아주 미세하게 약간 더 기대할 수 있다고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결국 이 시대에 최종적인 것은 그런 기대감들의 총체성이 빚어내는 낙관이다. 왜냐하면 "'진보'가 가치 개념의 표현은 아니라 하더라도, '변화'라는 말로 간단히 바꿀 수 있는 중립적인 표현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태의 본질상 기술적 진보의 다음 단계는 앞 단계에 비해 언제나 우월하기에 그렇다."(22) 우주는 해명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를 심판한다. 그렇기에 요나스는 묻는다. "도채에 무엇이 현대 기술에게 끊임 없는 운동을 강요하는가?"(23)



 옛날 같으면 어느 누가 성대한 오페라 공연이나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심장 수술, 비행기 참사로 죽어간 사람들의 사체 인양을 (비누, 냉장고, 생리대 광고는 차치하고라도) 그의 거실에서 보고 싶어하겠는가? 어느 누가 커피를 일회용 종이컵에 따라 마시고 싶어 했겠는가? 어느 누가 인공수정, 시험관 아기, 대리모 등을 원했겠는가? 또 어느 누가 자기 혹은 타인의 복제물이 거리를 활보하기를 바라겠는가? (21-22)



 "미지의 세계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깊고 새로운 차원이 속속 출현하면서 과학은 오늘날 스스로 놀라고 있다."(28) 앞으로 무엇이 출현할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 그러나 그 세계는 여전히 '과학의 미지'라는 점에서 우리는 과학을 담보로 '더 나은' 세계를 기대한다. 모르는 것은 오히려 "지속적인 혁신을 위한 잠재력 또는 무한한 것"으로 대체된다.(28) "과학의 가치중립에 대한 믿음 … 연구의 절대적 자유의 권리에 대한 믿음"(77-78)은 사실상 "신앙고백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78) 신의 의지를 누가 알겠는가? 요나스의 논의는 거기까지 미치지 않지만, "철도와 증기선은 우편마차와 돛단배와는 질적으로" 다르듯(33), 신앙생활과 과학생활은 "(목적을 제외한다면,) 자신의 경험에서도 다르다."(33) 



 한때는 공리주의를 떠나 이루어지는 최고의 지적 추구였던 이론이 이제는 외부 세계의 온갖 요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하는 시녀-'프로메테우스적' 외양(31)-(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30)


 

 기계의 증식은 "직선적이라기보다는 상반된 관계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그물과도" 같아서(32), 현대 이전의 생활은 하나의 (진절머리나는) '수수께끼'가 되었고, 그것은 (앎을 전제로 하는) 호기심을 마구 불러일으킨다. 현대는 언제나 과거를 종합하지만, 그렇다고 과거를 내용으로 하지는 않는다. (가령 미디어라는 동시성으로 전달되는 원시성[부족]이라고 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제임스 와트의 소박한 증기기관"이 possible이었다면, "탄광에서 물을 빼내는 기계에 이르는 긴 사슬"은 im-possible을 의미한다.(32) (다시 말하듯) "왜냐하면 사태의 본질상 기술적 진보의 다음 단계는 앞 단계에 비해 언제나 우월하기 때문이다."(22) 현대 시대의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더 많은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없는'을 더 많이 ('~이 있는' 가운데에서)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고 현대는



행운과 실험을 통해 발견된 경험적 처리 방법(예컨대 청동기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금속 합금이나 요업, 재빵, 포도주 발효 등)과는 전혀 다르다. 추상적인 설계도(계획)에 따른 인위성 또는 창조적 구성은 물질의 핵심을 향해 육박해 들어간다. 분자생물학에 있어서 이것은 여러 가지 끔찍한 가능성들이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34) … 물리학적인 의미에서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녹음기, 계산기 등은 어떤 '노동'도 수행하지 않으며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우리의 감각과 정신에 봉사할 뿐이다. 이들 기계는 비물질적인 의식을 겨냥하여 만들어졌고, … 거시적이고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고전적 유형의(36) 



세계와는 다름을 뜻한다.


 요나스는 여기서 문제를 보다 심화한다.



 쟁기는 좋은 것이고 (사람을 해하는) 칼은 나쁜 것이다. 평화로운 시대에 칼은 쟁기로 변하기 마련이다. 이를 현대 기술 시대의 언어로 바꿔 말하자면 원자폭탄은 나쁘지만 인류의 부양을 돕는 화학비료는 좋다. 그러나 (그렇기에) 여기서 우리는 현대 기술을 괴롭히는 딜레마를 발견하게 된다. 현대 기술의 '쟁기'는 장기간 지속하다 보면 '칼'만큼이나 해로울 수 있다! (그리고 점증하는 결과의 '장기적인 지속'은 -이미 언급했듯이- 현대 기술의 적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48)



 핵은 무기라는 소유적 양태를 통해 "그것의 사용을 막는"(48) 역설성을 실천하는 반면에 '자원'으로 이름을 달리하면서 그것은 도처에 핵을 증식시킨다. (그 위험성의 '봉쇄'라는 측면에서만 우리는 어떤 가이드가 있을 뿐이지, 그 범위를 넘어선 사태에 대한 매뉴얼은 전혀 없다. 그것은 오직 신만이 아는 일. 우리의 자세는 따라서 "과학자여, 과학일지어다!"[90]) 여기서 비워지는 것은 우리의 시야이다(49). "즉 지구라는 무대의 유한성"(49)을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무대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인류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직'의 볼모이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인류 운명은 오직 배역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현대 문명의 모두가 -놀랍게도- 외계인을 알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멋진 패러디로 이것을 정식화 할 수 있다: "외계인 모르면 외계인이게요?""지난 시절 높은 가치가 부여되었던 호전적 용기가 앞으로 차지하게 될 자리는 없다. … 전쟁방지는 전쟁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류의 생존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 극단적인 수단이 억제하고 있는, 무장을 통한 갈등 상황에서 개인의 용기는 그를 넘어선 기술의 힘에 보잘것없다."(60) 요나스는 말한다. 당면 시대가 요청하는 덕목이란,



 매우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두려움이다. 말하자면 두려움의 느낌 역시 새로운 가치를 획득한다. 겁쟁이의 약점 정도로 취급됨으로써 과거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둘움의 느낌은 이제 존중되어야 한다. 두려움의 느낌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윤리적 의무이다. (63)



 (그렇기에) 요나스는 더욱 각별히 말한다. 「절제와 정의」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회페가 말한 시민성(또는 시민적 용기[Zivilcourage])을 발현하는 맥락과 같다. 용기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논의 대상은 -좋건 나쁘건- 그 안에서 '시대'가 펼쳐지고 진보가 이루어지는, -사람과 사람의 직접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57)- 초개인적 공공 영역이다. (58) (그러한 초개인적 공공 영역의) 추방 이유는 다음과 같다. 17세기에 목적인이라는 개념이 자연 관찰에서 사라짐으로써 생겨나게 되었다. 즉 뒤에 오는 것은 가치와 무관한 필연성에 의해 동일한 성격을 가진 앞선 조건들을 뒤따를 뿐이다. 따라서 '어디에서'로 표현되는 배후의 힘은 결정되어 있지만, '어디로'는 그렇지 않다.(79) 현대인의 과소비는 사실상 뻔뻔함 그 자체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관습의 … 아래로부터의 개혁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자발적 합의에 의한 길과는 다른 또 하나의 길은 공법과 그에 근거한 규제를 통해서 검소함을 위로부터 강요하는 것이다.(66) … 앞으로 우리는 어디에서건 최고 기록을 향한 질주를 계속해야 하는가? 과연 그래도 되는가? 수명 연장에 있어서의 최고 기록을 위해서? 유전자 변형에 있어서? 심리학적 행위 조절에 있어서? 산업과 농업 생산에 있어서? 지하자원의 활용에 있어서? 각종 기술의 효율성 일반의 제고에 있어서? (67) 나치와 관련된 현상을 아무런 가치판단 없이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86) (그렇다!) 지금 우리의 논의 대상은 -좋건 나쁘건- 그 안에서 '시대'가 펼쳐지고 진보가 이루어지는, -사람과 사람의 직접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57)- 초개인적 공공 영역이(기 때문이)다.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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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식민주의의 3총사"로 소개되는 사이드, 스피박, 호미 바바를 경유해 (제목에서의) 탈식민주의와 포스트탈식민주의의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논문이다. 그 재료가 되는 사이드, 스피박, 바바에 대한 비평 작업이 이루어지지만, 아무래도 원자료에 대한 지각 없이 비평을 인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성급한 거 같아서 거리를 두고 탈식민주의 3총사의 내적 측면에 집중했다.


 우선 논문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주체는 사이드이다. 















 논자에 따르면 사이드는 푸코의 과업을 경유한다. "권력은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편재적'(푸코에게서 권력이 수직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중심 없는 밑으로부터 도처의 다양한 지점에서 발생하는) 관리 혹은 지배 시스템을 구성하고, 이 시스템을 통해 주체를 훈육하고 개조하며 통제함으로써 주체가 권력의 대상으로 해당 사회 체제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구조적인 힘"에 주목한다. 이엔 앙이 모호성의 함정」에서 인용하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논의를 차용하자면, '중국'이라는 자극이 있기 전에 (이미 일상적으로 불리는) '중국인'이라는 자명성-자각이 '크게' 각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앤더슨은 시니컬하게 말한다. "일부 동남아 중국인들은 1890년대에 이르러서야 17세기부터 유럽인들이 계속해 온 일이 무엇이었는지, 즉 자신들은 결코 중국인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네덜란드 식민지배들은 "스스로 '중국인'임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중국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며, 혹시 비토착언어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간에 소통되지 않는 본토의 언어를 쓰는 중국인들"에 대해 '중국인'을 위한 별도의 법체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중국인을 법적 지위에서 계속 분리하는 것을 제도화하고 별도의 의복, 두발, 여행 제한 등을 의무화해 갔다. (『흔적』 Vol. 2)



 "지배하고 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로 동양의 동양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시선에 의해 분리되고 고정되는, 그래서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적 일람표가 작성"되고 그러한 "합리적인 알람표에 은거하여 동양에 대한 일종의 원형감시시설 혹은 원형감옥이 마련된다." 이것은 "푸코의 말처럼 원형감옥 안에서 감시자인 식민 지배자는 유리한 조망권(특권과 힘)을 갖는다." 달리 말해서 지배하는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다. 둘의 만남은 하나의 질서로 소화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스피박이다.
















 식민과 탈이라는 문제 모두에서 소외된 '묵살의 여정'을 추적한다. 길지만 가장 핵심적인 단락이기에 전부를 인용한다.



 인도의 순장습관인 '사티'의 희생자인 인도 과부여성은 스피박이 말하는 하위주체의 한 예이다. 사티는 토착 엘리트(왕족)에 속하는 과부가 힌두교의 관습에 따라 죽은 남편의 시신을 화장하기 위해 쌓아올린 장작더미 속으로 몸을 던져 함께 죽는 잔인한 의식이다. 1929년 영국은 반여성적·야만적 악습으로부터 인도 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 순장관습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인도의 전통을 존중한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사티의 잔인함을 이유로 이를 폐지하려 했던 영국과 다르게, 토착 민족주의자들은 여자들이 실제로 죽고 싶어 한다는 말로 이를 고집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은 사티를 서구 문명으로부터 민족문화를 수호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여겼다.




 세 번째로는 바바(와 파농)이다.

















 우선 출발점은 파농이다. "철저한 식민지 교육을 으면서 프랑스가 자신의 모국임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던 파농, "그래서 2차 대전 당시 모국 프랑스 군에 입대하여 나치즘과 싸워 무공훈장까지" 받은 파농, 그런 파농이었지만 끝끝내는 프랑스의 외질, '흑인성'(Blackness)에 거주해야 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흑인이라는 주체 의식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가족 구조 내에서는 정상적인 성장을 겪은 흑인 아이가 식민지 사회에서 백인과의 접촉을 통해 식민주의적 트라우마, 즉 인간들이 처한 문화적·역사적 조건을 무시하고 보편적인 용어로 심리와 무의식을 설명하기에 유럽 정신분석은 이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조를 파악하는 일 자체가 구조화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외상을 파고든다.



 파농은 흑인이 영원한 타자로 고착화되는 과정을 라캉의 '거울 단계'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 식민지 현실에서 흑인은 백인과의 '모방'관계 속에서 흑인으로 된다는 것이다. 백인은 흑인에게 상상적인 거울이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오인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그들과 같다는 의식을 갖게 되고, 반대로 자신들의 동족들에게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논문에서의) 바바는 그런 파농을 인정하면서도 거부한다. 하얀 가면, 검은 피부. 여기서 "결코 선험적이거나 완성된 산물이 아니며, 항상 '총체성'의 이미지를 향한 문제적인 접근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바에게 있어  '모방'은 "식민권력에 복종함으로써 그것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식민과 피식민의 차별성과 종속을 지워버리고 와해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즉 "차별당하는 자의 시선이 권력의 주체에게로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지배의 전력을 역전시키는 전략의 한 형태"인 것이다.



 검둥이가 추워서 떨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백인은 검둥이의 분노를 상상한다. 이는 백인의 불안감, 불안에 대한 편집증의 증거인데, 바바는 백인의 이러한 분열적 정체성을 저항의 지점으로 파악한다.



 이런 꿈을 작업해주는 것으로부터 근본 꿈을 역전이 하는 것이다. (내가 캐셔로 있을 때 찾아온 외국인[물론 여기서 등장하는 외국인은 흔히 노동자로 분류되는 그런 이들이다]이 무언가를 내게 분주히 물었는데, 나는 도통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외국인이 답답했는지 펜과 종이를 꺼내더니 -여기서 나는 그런다고 얼마나 사태가 진전되겠냐고 반문했지만- 뭔가를 쓰더니 내게 건넸다. 문자그대로의? "갈비")


가령 영어 텍스트를 인도나 우리가 발음하거나 전달할 때 그 텍스트에 대한 왜곡된 전유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일종의 제국 텍스트를 교란시키는, (즉 지배담론의 한 축인 자유와 저항의 담론까지 배우게 되는) 모방의 한 예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논자의 저작물은 아니지만, 비슷한 구성의 논의로는 다음과 같은 책이 있다.


















※논문은 《현대사상》(2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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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주권과 피주권, 즉 쥐는 고양이의 부재 여부와 상관없이도 늘 "고양이의 폭력 아래"에 노출되고 고정돼 있다는 점에서 '고양이 쥐'에게서 찾아지는 '와'의 "실체, 좀더 단순히 말하면 권력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서 권력 근거를 찾는 개념들을 비판면서(45-46), "모호한 영향력과 복잡한 상호작용이 넘쳐나는 시대"에 "권력을 다시 상기할 필연성을 제기", "권력의 쇠퇴로부터 초래될 문제들을 우리가 겪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표지). 이를 위해 저자는 에고(ego)와 타자(alter)의 매개성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외적 자극에 자립적으로 응답하는 이러한 능력이야말로 유기적 존재의 특징"으로, "생명 없는 사물은 응답하지" 않기 때문이다(18-19). 여기서 저자는 구태여 하지를 소거하고서 '응답'에 한해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지'를 하나의 자체로 부각시킨다. 생명 없는 사물은 (에고의 지시로부터) 작동한다. 그것은 '응'(ja)이 없는 오직 '답'인 것이다. (공장에서 통용되는 은어로 이야기하자면) 버튼맨은 사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답이 관활하는 운동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기획은 이렇게 변주된다. "생각한다. 내가 거기 있다.") 따라서 저자는 타자가 의지로 에고에 응답하는 것에서 권력을 파악할 것을 말한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가 스스로 권력자가 원하는 행동을 하려고 하고, 권력자의 의지를 마치 자신의 의지처럼, 심지어 미리 알아서 따르려고 하는 것, 이것은 더욱 강력한 권력의 지표이다. (16-17)



 권력을 수행하는 차원은 곧 응답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아니요'라고 하는 것보다 권력자에 공감하는 '네'(ja)가 더 강한 권력에 대한 응답, … "내가 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내가 할 것이다"라는 말에는 더 강한 권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17). 가령 "하기 싫지 않지?"라는 질문은 이렇게 서술된다. "네가 하기 싫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네가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 역시 나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 질문은 스스로 답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타자의 "네"는 에고의 반복이다. 이것은 운동이다. 그것은 실천이 아니다.


 따라서 논자는 "절대적인 권력을 얻으려는 자는 … 타자의 자유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21) 타자로부터 에고적 의지가 내뿜어질 수 있도록, "… 권력 존재는 타자에게서 자신의 의지를 본다. 타자에게서 자아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권력 감정의 핵심이다."(91) 니체에게서 찾아지는 '낯선 질료에 자기 상(像)'을 찍는 것은, "비개연적 선택이 일어날 개연성을 증가시키는" "기회"로서의 권력에 다름 아니다.(23) 좀 더 세밀화해 "권력은 '누군가의 행위 선택을 다른 이의 결정에 이전'시킴으로써 '인간의 행위 가능성의 불확정적 복잡성을 감소'시킨다."(23-24) 권력(macht)은 '삶의 의미를 창출하는 힘 있음'(machen)의 가능이다.


 

 타자의 "네"는 회피하고자 하는 대안을 곁눈질하지 않고서 생겨난 긍정, 에고의 결정 그 자체에 대한 긍정일 수도 있다. 일말의 "어쩔 수 없지, 뭐"도 포함하지 않는, 에고에 대한 타자의 전폭적인 "네"에서 에고의 권력은 정점에 달하는 것이다.(30) … 해고와 같은 부정적 제재 조치로 위협하면서 자신의 결정을 관철시키려는 상급자의 시도는 그의 권력을 증가시키기지 못한다.(32)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재확인하는 (무기력하고 쾌할하지 않은) '네'에서 "운명에 대한 사랑"은 저주의 확인이다. 논자는 적극적인 '응!'(ja)에서 찾아지는 넘치는 힘과 뿜어져 나오는 환희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희생자들이 사회적으로 부여된 운명에 스스로를 봉헌하고 희생하게 만드는 아모르 파티,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 생겨난다."(74-75) 규율권력은 부채를 골자로 한다. 타자에게 죄를 이식하며 죄의식을 내면화하도록 만든다. "반성(reflexion)이 아니라 반응(reflexe)을 통해 작동한다."(69) 그는 말한다. "권력은 부재를 통해 빛을 발한다."(83)



 이 책은 권력을 '까다롭게' 다룬다. 몇몇 독자는 벌써 이 표현으로부터 어떤 낌새를 느꼈듯, 헤겔이라는 카테고리를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그렇다. 저자는 푸코의 다음과 같은 말에 주목한다. "권력은 사회적 신체 전체를 포괄하는 생산적 망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권력을 억압 기능을 수행하는 부정적 심급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 권력이 '배제하고' '억압하고' '억누르고' '검열하고' '추상화하며' '감추고' '은폐한다'고 권력 작용을 부정적으로만 묘사하는 (니체적으로 말해 '표명하는'p.55)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오히려 권력은 생산적이다. 권력은 실재를 생산해낸다."(61, 60) "이쯤 되면 헤겔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만약 현실이 우리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으면, 현실은 그만큼 더 악화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체계가 적합하다면, (불완전하게나마) 현실에 들어맞는 형싱적 틀을 구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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