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당시를 체험했던 사바찐의 행적을 추적해 역사를 구성하는 논문이다. 사바찐은 이른바 현대라는 건축 양식을 도입하고 건설하는 건축사(토목사)였지만, 이런저런 시비에 휘말리면서 그 위치가 "고종을 보호하는 외국인 대궐수비대"로 바뀌게 된다. 이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사건이 있은 바,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왕정의 방도였다. 외국인을 궁에 상주케 함으로써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일본의 셈을 이용한다는 나름의 궁리였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예상과 믿음과는 다르게 현실은 을미사변으로 나타났지만 말이다. 


 을미사변 당시 사바찐은 호출을 받아 현장에 있었다. 심지어 궁을 휘젓고 다니는 무리를 직접 마주하기도 했으며, 그들과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한 일종의 '타협'도 그 과정에서 맺었다. 그는 무사히 현장으로부터 벗어난다.


 논자는 사바찐이 탈출한 이후 시해에 대해 물어오는 질문에 '그 당시에 없었다, 즉 그 이전에 현장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사바찐의 진술에 문제를 제기한다. "사바찐의 진술에 따르면 새벽 5시 45분 건청궁을 출발한 그는 정동 소재 러시아공사관에 6시 30분 도착해서 베베르 공사와 슈테인 서기관에게 자신이 목격한 것을 증언했다. 아무리 느린 걸음으로도 걸어도 건청궁에서 광화문까지 15분, 광하문에서 정동 러시아까지는 15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바찐이 발걸음을 늦췄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여기에 '시해 당시'를 기록하는 몇몇 증언에서 '당시에' 발견되는 사바찐의 행적들은 그러한 사바찐의 진술을 불온전하게 만든다고 논문은 지적한다. 따라서 논자는 이를 총체적으로 종합해 "사바찐은 왕비가 암살될 시각인 5시 50분 전후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사바찐은 왜 기억을 누락 및 왜곡했을까?' 라는 질문이 뒤이어 온다. 논자는 "(사바찐)의 보고서에서 오카모토를 '매우 고상한 외모', '단정한 양복 차림', '당신과 같은 신사' 등으로 폭도가 아닌 신사로 묘사했다"는 점을 주목하고, 이후 "목격자" 사바찐이 시달려야 했던 불안에 주목하며 그의 궤적을 따라간다. 



 (오카모토와의 협상이 있은 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그 순간, 사바찐은 곤령합 마당으로 들어오는 한국인과 눈을 마주쳤다. … 이 한국인은 사바찐을 보고 놀란 나머지 '아'하며 탄성을 질렀다. 그는 사바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 한국인은 궁궐 안에서 비서를 담당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너무 놀라 잠시 멈칫했으나 곧바로 곤령합으로 들어가는 일본자객에게 접근하며 활기차게 무언가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 사바찐을 알아본 그 한국인은 오카모토에게 끈질기게 뭔가를 설득시키려고 애썼다. 그 한국인은 사바찐이 풀려난다면 사바찐을 고발한 자신에게 닥칠 혹시 모르는 불이익을 생각했던 것 같다. 사바찐은 곤령합의 유일한 서양인 목격자인 자신을 풀어주어 발생하는 위험을 열심히 설명하는 것으로 보였다.





















※논문은 《역사비평》(91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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