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주권과 피주권, 즉 쥐는 고양이의 부재 여부와 상관없이도 늘 "고양이의 폭력 아래"에 노출되고 고정돼 있다는 점에서 '고양이와 쥐'에게서 찾아지는 '와'의 "실체, 좀더 단순히 말하면 권력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서 권력 근거를 찾는 개념들을 비판면서(45-46), "모호한 영향력과 복잡한 상호작용이 넘쳐나는 시대"에 "권력을 다시 상기할 필연성을 제기", "권력의 쇠퇴로부터 초래될 문제들을 우리가 겪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표지). 이를 위해 저자는 에고(ego)와 타자(alter)의 매개성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외적 자극에 자립적으로 응답하는 이러한 능력이야말로 유기적 존재의 특징"으로, "생명 없는 사물은 응답하지" 않기 때문이다(18-19). 여기서 저자는 구태여 하지를 소거하고서 '응답'에 한해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지'를 하나의 자체로 부각시킨다. 생명 없는 사물은 (에고의 지시로부터) 작동한다. 그것은 '응'(ja)이 없는 오직 '답'인 것이다. (공장에서 통용되는 은어로 이야기하자면) 버튼맨은 사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답이 관활하는 운동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기획은 이렇게 변주된다. "생각한다. 내가 거기 있다.") 따라서 저자는 타자가 의지로 에고에 응답하는 것에서 권력을 파악할 것을 말한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가 스스로 권력자가 원하는 행동을 하려고 하고, 권력자의 의지를 마치 자신의 의지처럼, 심지어 미리 알아서 따르려고 하는 것, 이것은 더욱 강력한 권력의 지표이다. (16-17)
권력을 수행하는 차원은 곧 응답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아니요'라고 하는 것보다 권력자에 공감하는 '네'(ja)가 더 강한 권력에 대한 응답, … "내가 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내가 할 것이다"라는 말에는 더 강한 권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17). 가령 "하기 싫지 않지?"라는 질문은 이렇게 서술된다. "네가 하기 싫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네가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 역시 나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 질문은 스스로 답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타자의 "네"는 에고의 반복이다. 이것은 운동이다. 그것은 실천이 아니다.
따라서 논자는 "절대적인 권력을 얻으려는 자는 … 타자의 자유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21) 타자로부터 에고적 의지가 내뿜어질 수 있도록, "… 권력 존재는 타자에게서 자신의 의지를 본다. 타자에게서 자아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권력 감정의 핵심이다."(91) 니체에게서 찾아지는 '낯선 질료에 자기 상(像)'을 찍는 것은, "비개연적 선택이 일어날 개연성을 증가시키는" "기회"로서의 권력에 다름 아니다.(23) 좀 더 세밀화해 "권력은 '누군가의 행위 선택을 다른 이의 결정에 이전'시킴으로써 '인간의 행위 가능성의 불확정적 복잡성을 감소'시킨다."(23-24) 권력(macht)은 '삶의 의미를 창출하는 힘 있음'(machen)의 가능이다.
타자의 "네"는 회피하고자 하는 대안을 곁눈질하지 않고서 생겨난 긍정, 에고의 결정 그 자체에 대한 긍정일 수도 있다. 일말의 "어쩔 수 없지, 뭐"도 포함하지 않는, 에고에 대한 타자의 전폭적인 "네"에서 에고의 권력은 정점에 달하는 것이다.(30) … 해고와 같은 부정적 제재 조치로 위협하면서 자신의 결정을 관철시키려는 상급자의 시도는 그의 권력을 증가시키기지 못한다.(32)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재확인하는 (무기력하고 쾌할하지 않은) '네'에서 "운명에 대한 사랑"은 저주의 확인이다. 논자는 적극적인 '응!'(ja)에서 찾아지는 넘치는 힘과 뿜어져 나오는 환희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희생자들이 사회적으로 부여된 운명에 스스로를 봉헌하고 희생하게 만드는 아모르 파티,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 생겨난다."(74-75) 규율권력은 부채를 골자로 한다. 타자에게 죄를 이식하며 죄의식을 내면화하도록 만든다. "반성(reflexion)이 아니라 반응(reflexe)을 통해 작동한다."(69) 그는 말한다. "권력은 부재를 통해 빛을 발한다."(83)
이 책은 권력을 '까다롭게' 다룬다. 몇몇 독자는 벌써 이 표현으로부터 어떤 낌새를 느꼈듯, 헤겔이라는 카테고리를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그렇다. 저자는 푸코의 다음과 같은 말에 주목한다. "권력은 사회적 신체 전체를 포괄하는 생산적 망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권력을 억압 기능을 수행하는 부정적 심급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 권력이 '배제하고' '억압하고' '억누르고' '검열하고' '추상화하며' '감추고' '은폐한다'고 권력 작용을 부정적으로만 묘사하는 (니체적으로 말해 '표명하는'p.55)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오히려 권력은 생산적이다. 권력은 실재를 생산해낸다."(61, 60) "이쯤 되면 헤겔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만약 현실이 우리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으면, 현실은 그만큼 더 악화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체계가 적합하다면, (불완전하게나마) 현실에 들어맞는 형싱적 틀을 구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