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이라는 수사학은 늘 한결 같다. 대의제를 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대의제를 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엄청난 수고와 함꼐 발생되는 비용의 낭비, ...즉 따라서 의사 결정에 국민은 한 마디로 낭비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민주주의와 약간이라도 유사한 것을 결코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정당이란 대의라는 수사에 의존하며 실제로는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따라서 "정당의 나쁜 점은 너무도 명백하다." 4년마다 단 한 번 국민은 품귀 현상에 시달리며, 나머지 영역에 대해선 "공공적 삶의 문제들에 대해 의견을 표현할 기회나 수단" 없이 산다. 고개를 조아리는 청소 용역부들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시선. -이것은 그저 사실에 지나지 않는데, 문제는 이것을 사실이 아니게끔 하는 외양적인 분노들 =사과를 촉구하는 그것이야말로 민주적이고 반민주적인 것이다. 시몬 베유는 말한다.
모든 정당의 첫째 목적이자 궁극적인 유일한 목적은, 어떠한 제한도 없는 자기 확장이다. 바로 이 세 가지 성격으로 인해 정당은 그 씨앗에서부터 그리고 그 열망에 있어서 전체주의적이다. … 즉 목적과 수단의 도치가 그것이다. … 사실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모두 수단이다.
정당 체제는 무한한 확장을 그린다. "보통의 사람들이 정당에 몰두하면 정당의 확장을 욕망하게 되는데, 이때 그들은 정당을 어떤 제한도 갖지 않는 것처럼 여긴다." 그것은 가능한가? "정당의 확장이 선의 기준이 되면서 정당은 사람들의 생각에 집합적 압력을 행사한다. 이 압력은 실재하고 공개적으로 펼쳐진다. 이 압력은 고해 되고 주장된다. 이는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는 익숙해져서 무감각해졌다." 우리는 전적으로 아렌트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오직 근본적인 파괴를 통해서뿐이다: 스미스 부인은 이미 죽었다고 말하고는 가서 그녀를 죽여버리는 살인자의 경우처럼 말이다."
"저는 약속드립니다. 어떤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건 간에 제가 특정한 집단의 일원임을 완전히 잊고 오직 공공선과 정의만을 위해 저 자신을 바치겠다고 말입니다." 이런 발언은 매우 나쁘게 여겨진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마저도 그를 배신자로 여길 것이다. 보다 온건한 사람들은 "그는 왜 당에 가입했지?"라고 말할 것이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정당에 소속됨으로써 언제나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면, 정당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악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능력은 동시에 두 곳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양자에서 승자는 사적인 것의 공공성이다. 사적인 이해가 공적인 의식에 -(논문이 주목하는 루소에서의) '정념'적으로- 주인하고자 하기 때문에 공공은 언제나 사적으로 파괴된다. 그럼에도 "공공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효과적인 개입을" 원하기 때문에 이 패거리 문화에 짓눌리고 만다.
"저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 사실상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구체적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구체적 태도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국민은 어디까지나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믿는 것이며, 차라리 그것은 실제 요행을 바라는 것보다 더 기행적이다. 합리적이고, 거기다 우주의 탄생 근원으로까지(심지어 벌써부터 우주 탄생 이전까지) 육박해 가는 시대에, 비합리적이고 이미지 추론에 전적으로 모든 것을 위임하는 이 "영역에서, 이제 사람들은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초등학교에서도 어린이들에게 찬성 또는 반대를 하는 연습을 시킨다. … 시험을 칠 때는 세 시간 동안이나 답안을 작성해야 하는 데도, ("여러분들, 찬성이에요 반대예요?") 이에 대해 찬성인지 5분 동안도 자문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얼마나 진실에 다가갔는지, 얼마나 진리에 다가서 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 모든 '파산'적인 사태(특히 금융 위기 당시 이 표현은 아주 단골이었으나 정작 '오늘'이 입증하듯 파산 당사자는 -오히려- 파산이란 용어의 주체였다)가 범람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아무렇지 않게 구르고... 굴러가고... 동글동글... 그렇게 지구는 돈다. 정치도 알아서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