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장 불티나는 성상은 역시 십자가+예수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모종의 공통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에게서 찾아지는 페티쉬즘이다. 우리는 예수를 들여다보는 것일까, 아니면 예수 내면에 자리한 그 이면의 십자가에 대한 도착이 있는 것일까... 물론 둘에 대한 분리의 강조는 웃긴 논리이다. 그것은 예수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까닭은 가장 근본적인 소박한 질문을 가로막는다는 것에 있다. "예수란... 누구란 말인가?"
2. 언제가 내려간 부산역 앞에는 확성기를 이용해 전도를 하는 교인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커다란 깃발에무슨 천국(천국에 대한 내용은 잘 기억에 남질 않았다) 불신지옥이라는 흔히 떠도는 거 캐릭터의 완벽한 정형성을 띠고 있었다. 상당한 노구였음에도 강고해 보였다. -그것은 참 놀라운 경험이었다. 믿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귀신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단언컨대- 무당이었다. 그 완벽한 로컬라이징에 감탄하지 않기란 어려운 것이다.
3. 정훈이었나 종교 행사(-그렇다. 종교는 오늘날 어디까지나 행사다)였나 무튼 훈련병 시절 어느 영상을 시청할 기회가 있었다. 내용은 실미도에 대해였다. 지루하지 않게 중간중간 영화의 장면도 삽입하고, 생존한 기간병의 증언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점점 어디서 부터인가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하더니 놀랍게도 영적 체험에 대한 간증으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개인의 체험적 차원이므로 논박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것 역시 원천적으로 가질 수 있는 가장 소박한 물음들을 기적으로 대체하는 일반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그 중 단연 으뜸은 볼썽사나운 한숨 소리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