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절하여 절돤되고, 봉합하여 맺어지는 신체라는 기관에 대한 책이다. 칼럼니스트인 저자답게 각 계단마다 잡학하게 다루어지기 때문에 책은 술술 읽히지만 진도가 삐걱인다. 뭔가 생각할 틈이 잘 나지 않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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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필리핀 여성들처럼 테레사도 더 나은 삶을 찾아서 싱가포르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림씨 가정에 가정부로 취업한 테레사는 골칫거리 아들 쟐르와 독특한 유대관계를 형성하지만,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가 시작되자 훈훈한 인정의 그 관계가 위협 받는 것을 느낀다.'




 이 영화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외국인 노동자는 수요 노동 현실에 따른 입국자이자 타자이다. 영화에서 '우리'라는 민족의 범주에서 이 타자들은 포용과 화해, 친절과 용서 등으로 상대화된다. 국가에게 있어 국민이라는 당위성이 애국이듯이 이들의 질서 역시 목적에 부합되어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라는 범주가 골치 아파지는 상황, 즉 우리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 왔을 때, 이들의 존재 위치는 어디인가? 더는 '우리로하여금 필요하지 않는 그들'일 때, 여전히 포용 가능한 우리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우리에 통합되는 것이 불가능한 그들인가? 영화는 마지막에 테리는 결국 떠날 수밖에 없는 '우리라는 타자'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소름 끼치는 것이, 가정부인 그녀가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우리보다 더 우리 같은' 얼굴로 우리 안에 (그들이) 존재하고 말을 걸어온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결여된 무언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닌 우리 안에서 스스로 기능하는 '다름'이라는 사실이, 그러나 어디까지나 '방편적인 대체'라는 인식의 불일치가 자아내는 불안이고, 그 불안의 양상은 폭력으로 맺어지곤 한다. 그들은 충분히 대체 가능할 것이며, 해소를 위해 소비되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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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히가시 중학교 출신, 스즈미야 하루히. 평범한 인간에게는 흥미 없습니다. 이 중에 우주인, 미래인, 이세계인, 초능력자가 있다면, 저에게로 오십시오. 이상!"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라는 연작이 시작되는 도입은 이렇게 출발한다. 물론 스즈미야 하루히의 이런 발언 이전에 어쩐지 심심해진, 달리 말해 '우주인도 미래인도 이세계인도 초능력자도 없는' 그저 허구라는 현실에 몸을 담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쿈의 독백이 첫장을 이루고 있지만 말이다. 이것은 시간이 흐른 뒤(이 시점은 작품에서 대단히 혼잡한 인칭인데)에 코이즈미가 쿈에게 말해주듯 하루히가 보여주는 '이율의 종합성'이다. 신 또는 신적인 그녀가 구축한 세계, 즉 빅뱅 이후 빅뱅이라는 우주가 보여주는 상식과 (상식에 대한 이율적) 배반의 장소인 것처럼 말이다.


 그녀가 일삼는 일들은 하나같이 과잉된 우울의 모남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를 미워할 수 없고, 아니, 그 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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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적한 마을에서 자그만 카페를 운영하며 어여쁜 아내와 슬하의 아들, 딸을 두고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과 마주하며 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가게에 놓인 쓰레기에도 군소리하지 않고서 치우는 선량함의 표본인 톰 스톨이 있다. 그런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던 마을에 '지겨운 동네'를 지긋해 하며 살인을 일삼던 불량배가 그의 카페에 방문하고,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톰 스톨은 기회를 엿보다 그들 둘을 죽임으로써 상황을 제압한다.


 삽시간에 평범한 시민이었던 톰은 영웅이 되고 (본인은 그것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만) 가족의 자랑이 된다. 그러나 그의 유명세와 함께 카페엔 그가 원치 않는 불청객이 찾아와 톰 스톨을 죠이라 부르며 그의 과거를 추궁하는 무리가 스톨과 스톨의 가족을 따라다니며 협박을 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폭력은 한껏 혼종을 겪는다. 그는 폭력의 피해자이며 희생량인 동시에 가해자이며 또한 집행자이다. 비록 모종을 심긴 하였으나 영화에서 그는 내낸 폭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스톨은 평화를 원하지만 그 대답은 폭력이며, 따라서 되돌아가는 응답 역시 폭력으로 일그러진다. 그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것 또한 폭력이며, 그 진실을 회피하는 대답 역시 폭력이고 그 진실을 말하는 것 역시 폭력이다.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스톨은 자신의 과거와 조우한다. 역시 폭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평화, 그곳에서 어떤 역사를 만난다. 아침이 밝은 호숫가에 스톨은 총을 던져 버린다. 총은 잔잔한 수면에 물결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렇게 폭력의 증거는 침몰한다. 아물며 잊히고 폭력은 사라질 것이다. 그는 자신을 씻어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폭력의 영원한 보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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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점차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게 변하는 지구를 무대로 한다. 전쟁과 같은 패권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은 살아간다'는 조건의 명제를 지키기 위해 사회망은 재조직된다. 우주는 재앙이고, 정치는 과학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물론 과학은 정치의 역사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여차여차하는 이유로 해체된 줄 알았던 나사의 '나사로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된다. 무한을 가늠할 수 없는 우주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지구적 의지가 인상에 남았던 영화이다. 아멜리아가 던지고 쿠퍼가 대답하는 것, 거기엔 [기생수]의 첫 장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가 있었다. 자연에 선한가 악한가 물을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타협이 아니라 의지할 때 비로소 선할 수 있는 것이다.



 지구 위 누군가 생각했다. 만일 인류 절반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지켜질까?

 지구 위 누군가 생각했다. 만일 99%의 인류가 사라진다면 오염 역시 99% 줄어들까? 

 누군가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이 생명들을 지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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