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사이드
미국의 이라크와의 전쟁?은 과연 승리였다. -무엇이? 미국을 향한 적개의 감정은 배신이라는 윤리적 테제, 그러니까 "미국인 아닌 미국"인(배반자라 일컬어지는) 보복의 대상으로 배치되었다. 즉 미국인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들은 '미국'이 소화한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인들은 "미국인"이 아니다. 그들에게 응징이라는 미명하에 가해지는 가공할 수준의 폭력은, '미국인'의 수고를 피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동등해질 수 없는 차이, 바로 '미국'인과 '미국인'의 격차가 좁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양단으로부터 섞일 수 없는 배출구 같은 뭉개진 삶들. 그들은 선택받은 적도, 버림받은 적도 없기에 그 중층에서 갈로에 서게 된다. 미국이라는 존재 하지 않는 유령(이라크에서 일어나는 테러로 인한 민간 피해를 일일이 집계하는 것조차 넌더리가 나며[왜냐하면 그건 당연한 일상이다], 그것을 '역사적'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그건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그건 그곳에서의 당연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건 토막 뉴스다.])은 '미국'인이라는 배신의 적별(敵別)을 떠돌게 하고, 그것은 어김없이 근본의 더 없는 사실성을 부여해 주었다. 적을 밝혀주는 가장 '원시적인 열정', 바로 그 영혼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빈 라덴의 '드높았던 열정'을 높이 샀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필요 없으리라.) "정의가 실현됐다."
물론 이 문제는 그리 녹록하지 않다. 집요한 "무고"에 대한 언급과 그를 둘러싼 생산의 양식들 속에서 언제나 실은 득을 압도하고 득은 언제나 실에 연관돼 있으며 그것은 다시 무고를 양산한다. 망자는 내맡겨져 있기에 '무고한 희생'을 언급하는 빈 라덴이나 무고함을 선점하려는 당파적인 이해에 귀속된다. 9.11이 있고 3년 뒤에야 했던 빈 라덴의 시인은 무엇인가? 그 뒤에서도 보인 행태들은 애매한 둘 사이의 시위를 보여준다. 아니라고도 했다가 시인하고, 또 달리 아니라고도 했다가 다시 시인하고.. 그렇게 희생을 대리했다. 9.11은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전적으로 아닌 (순수한? 근본적인?.. 이를 근본적으로 순수한이라고도 하는데) 미국에 대한 미국인을 향한 공격이었고, 그 근본적인 종족성은 더 없는 완벽한 유형성을 가져다 주었다. (희생자는 미국인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되었으며, 그것은 우리와 그들의 이해를 뜻한다.) 포로에 대한 인도적인 반응은 그래도 미국의 정신과 부합했다. (약 270명의 여학생 납치도 불사하는 나이지리아 반군을 보라.) 포로가 겪었을 '수치심'을 언급하며 인권을 말하고, 이 전쟁의 의미를 일깨우는 정합성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9.11의 무고한 희생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것이 중심인 것은 아니다. 그 배경에는 언제나 물결치며 거세게 요동치는...
그렇다. 진실의 무게는 불변한다. 그리고 진실은 기만당한다.
그렇다. 진실은 기만당한다. 그러나 진실의 무게는 불변한다.